185화 아비규환(3)
“회귀자가 아니라고? 그럼 누구를 말하는 걸까.”
헬라가 가만히 웃음을 지었다.
회귀자 유성하 자신이 성운전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그 말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차분한 그의 눈빛은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동시에 강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미 이곳에 있다.”
“그래?”
솔깃해진 헬라의 귀가 쫑긋거렸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회귀자가 지칭한 사람이 여기 지옥도에 있다니.
종결자?
대체 누굴까?
호기심이 생기자 헬라의 온몸에서 뿜어지던, 날카로운 아우라가 흔들거리며 넘실거렸다.
봉우리에 가득한 구름이 전부 잿빛으로 바뀌었다.
“나는 마경대전에 참가하지 않을 거다.”
유성하가 불참을 선언했다.
헬라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왜? 네가 빠지면 심심하잖아.”
“나는 너와 놀아 주는 사람이 아니다.”
“네 실력이면 우승권이라고. 예전 회귀에서도 우승한 적이 있잖아.”
“…무의미한 일이었지.”
유성하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비규환의 지옥도>에서 매년 벌어지는 ‘마경대전’의 우승자는 허울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우승자는 이곳을 1년 동안 다스릴 수 있는 지배권을 넘겨받는다. 그렇기에 여기서 살지 않는 나에게는 아무 쓸모 없는 권리지.”
“후후, 그렇긴 해.”
입가를 가리며 웃던 헬라는 천천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냉랭한 아우라가 팔을 타고 흘러가더니, 손끝에서 한 송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보랏빛 꽃잎이 흩날렸다.
“하지만 그런 걸 원하는 존재도 있지 않을까? 끝나지 않는 싸움, 영원한 전투를 즐기는 존재 말야.”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사방을 가득 채운 보랏빛 꽃잎들이 거추장스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회귀자는 싸우기 위해서 시간을 거스르는 존재가 아니다.
성운전의 끝에 도달해서 모든 걸 마무리 짓기를 원했다.
헬라는 거듭 도발했다.
“유성하, 너랑 싸우고 싶어.”
“거부하지.”
이어서 하늘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수한 차원문이 생성되는 중이었는데, 회귀의 잔재들이 쫓아온다는 신호였다.
“이제 가야겠군.”
회귀의 잔재들을 피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유성하는 손을 뻗어 차원문을 열었다.
“이제 나는 진정한 끝을 원한다.”
이어서 마지막 인사를 남긴 후에 차원 문 너머로 사라졌다.
유성하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 헬라의 표정은 아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내 실망한 낯빛이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사라졌어.”
유성하가 사라지자 하늘에서 생성되던 관문들도 다시 없어졌다.
분신인 회귀의 잔재들이 본체를 따라 다른 공간으로 방향을 튼 것이었다.
헬라는 안개의 봉우리에 혼자 남아서 한탄했다.
“다시 싸우고 싶었는데… 회귀자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난다고.”
이번 회귀에서는 싸우지 못했다.
끝없이 회귀하며 얼추 싸워 볼 만한 수준까지 올라왔는데, 자신과의 싸움이 무의미하다며 피한 것이다.
“다시 싸우고 말 거야.”
헬라가 주먹을 움켜쥐자 사방에 가득했던 꽃잎들이 불꽃처럼 타오르며 사라졌다.
지옥의 여신은 전신에서 투기를 강하게 발휘했다.
“종결자? 누가 와 있다고 했지?”
유성하가 지칭한 사람은 <아비규환의 지옥도> 성운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쌍둥이 자매들이 지키는 자라고 들었다.
“어디에 있을까?”
봉우리 너머를 쭉 살피던 헬라가 시선을 돌려서 하나의 존재를 발견했다.
저 멀리 왼팔을 잃은 검사가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는 악마들이었으나 전부 일격에 참살당하고 있었다.
“쌍둥이들이랑 비슷한 냄새가 나는 여자네.”
아우라의 기운을 가다듬던 헬라는 목적지를 그곳으로 정했다.
양다리에 힘을 주었다.
순식간에 원형으로 퍼지는 기세가 봉우리 전체에 작렬했다.
“잡으러 가자.”
이윽고 헬라가 쏜살같이 나아가자 봉우리는 충격파에 무너지고 먼지처럼 사라졌다.
거센 바람이 사라지고 고요한 정적이 남았다.
방금 붕괴했던 봉우리는 뿌리부터 조금씩 재생하고 있었다.
<아비규환의 지옥도>
이곳은 마치 저주가 걸린 듯이 형태가 시시각각 변하거나, 재생하기도 하고, 스스로 소멸하기도 하는 혼란한 세상이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세상.
살아가는 존재조차 이곳의 정확한 정체를 모를 정도였다.
* * *
촤악!
귀혼검이 검무를 추듯이 움직일 때마다 악마의 피가 솟구쳤다.
“악마라는 존재도 성운에 살아가는 생명체니까.”
시오는 자신의 오른손에 든 검을 지긋이 바라봤다.
귀혼검도 시선을 느꼈는지 이명을 일으키듯 울어 댔다.
‘신좌들의 멸망을 바라는 자.’
자신은 <신멸의 구도자>였고, 신좌들이 멸하기를 강하게 갈구하고 있었다.
“신좌들은 존재 가치가 없어. 오히려 성운을 좀먹는 자들이지.”
시오는 신좌들을 세상에 해악 끼치는 존재라 단정했다.
이곳은 어두운 동굴.
악마들의 소굴이었다.
신좌가 아닌 악마들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기에, 그녀는 옷자락을 저미며 홀로 검을 들고 걸어갔다.
“신좌들이 좀벌레라는 건, 나도 동의하는 생각이야.”
시오의 생각에 동의하는 자가 나타났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곳엔, 보랏빛 머리를 번개처럼 사방에 뻗친 지옥의 여왕이 전율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헬라였다.
“너는?”
시오가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헬라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리는 듯한 불길함을 느꼈기에,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헬라라고 하지.”
자신을 소개한 헬라의 입꼬리는 기분이 좋은 듯 올라가 있었다.
“너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 회귀자의 여정에서 이쯤이면 항상 죽었거든.”
“신좌들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지.”
시오도 어렴풋이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회귀를 봤던 신좌들이 장난삼아 그녀에게 알려 줬기 때문이었다.
-회귀자가 오면 너는 죽는다.
시오의 운명을 저주하듯이 알려 주는 말.
신좌들의 악취미였다.
“그런데 신좌들도 틀릴 때가 있나 봐? 내가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 말이다.”
“신기하긴 해. 네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건 처음이거든.”
두 여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 갔으나 경계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헬라라고 들어 봤다. 라그나로크, 신들의 황혼이 일어나면 신좌들을 모조리 궤멸시킨다고 그랬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어.”
헬라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 오래된 예언인데 아직까지 이뤄진 적이 없으니까. 이제는 되려나도 모르겠고 그냥 거미줄이나 치는 거지 뭐.”
“마음에 들어. 신좌들을 모조리 죽인다는 신화가 말이야.”
시오의 눈빛이 번뜩였다.
“흐음, 나처럼 신들을 죽이려는 녀석을 보니 이상하면서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신들의 척살뿐이야. 세계의 멸망은 아니다.”
“하하, 그건 불가능해. 신화를 자기 맘대로 골라 먹을 순 없거든.”
헬라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멸망의 신화는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해.”
“신좌들만 죽이고 싶어. 공간은 하나라도 남겨 놔야 한다.”
“그건 내 맘대로 안 돼. 라그나로크 신화가 시작되면 세상이 끝나거든.”
어떠한 말도 어떠한 생각도, 멸망의 신화 앞에는 가치가 없었다.
헬라가 단언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종말론이 라그나로크 신화였다.
“…그런가.”
시오는 자신이 바라는 목표를 이룰 방법을 발견한 동시에 한계도 보았다.
모든 것의 종말은 시오가 바라는 결말이 아니었기에 깊은 고민 속에 빠졌다.
“네가 회귀자가 말한 사람이야?”
헬라가 살짝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이지?”
“회귀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성운전의 끝까지 간다고 그랬다.”
“…그게 나라는 거냐?”
“일단은 너밖에 안 보이니까. 여기서 쌍둥이 자매와 같은 냄새가 나는 사람은 너뿐이야.”
그녀의 말이 얼핏 협박처럼 들렸다.
헬라,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 수식언을 가진 신좌답게 풍기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너의 실력을 직접 보고 협력할지 말지 결정해야겠다.”
번개처럼 삐죽 솟아오른 헬라의 보랏빛 머리에는 강한 정전기가 서려 있었다.
시오는 그 기세에 맞서 당당하게 버텼다.
“너와 협력할 부분은 신들을 죽이는 것뿐이야.”
“그러려면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지. 신들의 황혼을 일으키려면 말이야.”
헬라의 손에 살기가 휘몰아치며 모여 갔다.
저 강대한 힘에 맞서기 위해서 시오도 초월격의 아우라를 방출했다.
“이 싸움으로 네가 실력이 있는지 알아보자.”
<신멸의 구도자>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
“싸울 생각이지?”
헬라가 발휘하는 아우라가 지면으로 퍼져 나갔다.
아까 회귀자 유성하에게 싸움을 거부당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지금 그런 감정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강자와의 대결.
기대감이 느껴지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원한다면 싸움을 피할 생각은 없어.”
시오도 맞받아쳤다.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하얀 도포와 머리카락이 크게 나부꼈다.
결의를 다진 그녀의 눈동자와, 아우라를 머금은 귀혼검의 칼날이 번뜩였다.
상대는 헬라.
이름 자체가 지옥이라 불리는, 멸망을 불러오는 신좌였다.
“검술로 붙겠다면 그것도 좋지.”
헬라는 만족스러운 듯이 휘파람을 불면서 머리카락 한 가닥을 손으로 잡아서 뚝 뽑아냈다.
뽑아낸 머리카락에 검기를 주입하자 단단한 검이 되었다.
“모영검.”
귀혼검 대 모영검.
서로 자신 있는 검술로 한 차례씩 부딪칠 때마다 전방위로 격렬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검술이 매끄럽고, 흐름이 좋네?”
시오의 검술은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처럼 유연했다.
그리고 <신멸의 구도자>라는 무시무시한 수식언과 다르게, 그녀의 몸놀림은 곡선처럼 부드러웠다.
“그쪽은 거칠게 몰아치는데?”
반면 헬라의 검은 직선적이었다.
찌르고, 베기로 일관하여 단순했지만 강렬한 기세로 몰아치는 검술이었다.
콰앙!
충격파가 퍼져 나갈 때마다 주변의 바위와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
시오의 귀혼검이 부르르 떨렸다.
치열해지는 검술의 대결 속에서 헬라의 기세는 점점 막강하게 커졌다.
“칫!”
시오조차 받아 내기 어려운 공격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런 강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왜? 허접한 악마들이랑은 달라?”
헬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모습은 먹이를 노리며 입맛을 다시는 포식자 같았다.
“그렇게 보이나?”
시오의 아우라가 더 거세게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헬라의 낯빛마저 진지해질 정도의 기운이었다.
“신좌를 종말로 이끄는 힘을 우습게 보지 마라.”
<신멸의 구도자>
신좌와 맞서면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자신의 한계를 넘어 설 수 있다.
“라그나로크, 신들의 황혼은 지금까지 일어난 적이 없다고 그랬지?”
분위기가 바뀌었다.
시오는 신좌들과 싸울 때마다 더 강해지는 존재였다.
“기다려라. 한 명도 남김없이 너희들을 전부 없애 버릴 거야.”
<신멸의 구도자> 시오.
오른팔만 남은 그녀는 스스로 신들의 재앙이 되고자 했다.
“내가 신들의 황혼 그 자체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