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아비규환(3)
“유성하의 동료가 되는 신좌?”
아테나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레다였다.
“그런 말은 그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저희 쌍둥이 말고 함께 간 동료에 대해서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럴 거예요.”
아테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레다와 에어리스를 바라보더니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아야 이뤄지는 것도 있거든요.”
“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더라도 피할 수 없는 미래가 있다.
‘예언’ 혹은 ‘신탁’.
이번에는 반대의 의미였다.
알려지면 미래가 이뤄지지 않는다.
예언의 반대말은 없지만,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비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테나는 ‘비밀’을 숨겼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알게 될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반드시 한 명의 신좌가 유성하의 동료가 된다는 거예요.”
당부하는 말이었다.
다들 알아들었다는 듯이 침묵으로 긍정했다.
쿠구궁.
동굴이 조금씩 비틀리기 시작했다.
“심연은 계속 지형이 바뀌는 곳입니다. 어지러울 정도로 비틀리는 곳이니 신좌들도 이곳을 쳐다보기 힘들죠.”
“빙글빙글 돌아가듯이 움직이니까 계속 보고 있으면 멀미가 나는 건가요?”
“뭐, 대충은요.”
아테나가 빙그레 웃었다.
유진하도 가볍게 따라 웃었고, 아테나는 대화의 마무리를 지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왼팔과 날개 하나를 잃은 아테나가 몸을 돌렸다.
3회전의 심판관을 맡아 자신의 팔 하나까지 희생시켜서 모두를 심연으로 보냈다.
다른 신좌들의 눈을 피해 비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아테나의 생각.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은 유성하의 동료라고.’
멀리 사라지는 아테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나 남은 여신의 날개에서 스르륵 떨어지는 깃털 하나.
유진하는 그 깃털을 조심스레 받았다.
“형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어.”
“진하…….”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에어리스는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외로운 싸움인 줄 알았는데, 지켜보는 신좌들 가운데 믿어 주는 이들이 생겼으니까.”
신좌들은 저마다 독립된 개체였다.
그들의 생각은 서로 달랐고 원하는 바도 달랐다.
신좌들은 때로는 연합했고 때로는 대립했기에, 세상에는 전쟁과 평화가 공존했다.
성운전의 이면에는 최고의 성운이 되려는 그들의 암투가 밑바탕으로 깔려 있었다.
‘회귀자 유성하에 대한 신좌들의 생각도 다르다.’
누군가는 비웃더라도.
누군가는 감명할 것이니.
지혜의 여신 아테나처럼 암묵적으로 유성하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을 수 있었다.
“실패를 거듭하는 삶도 허무하지 않다는 걸… 형은 알고 있었어.”
회귀자는 성공할 운명이 아니었다.
패배하고 쓰러지고 진흙탕 속에 나뒹구는 운명이었다.
“실패를 반복하는 자. 동시에 한계를 극복하려는 자.”
레다도 차분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유성하와 함께하던 그녀도 뭉클한 감정을 받았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
유성하의 발자취는 어느새 저쪽으로 멀어지는 아테나의 발자취로 이어지고 있었다.
끈으로 이어진 인연처럼 계속되었다.
“우리도 가자.”
심연의 동굴이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라도 형태가 바뀌는 곳이기에 이대로 휩쓸리면 존재 자체가 사라질 위험이 있었다.
“동굴 밖으로…….”
이곳은 지옥이었고.
명계였으며.
명부였고.
헬헤임이었다.
네 개의 지하 세계가 모인 성운.
심연을 빠져나오면서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성운전의 네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심연에서 나오자마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네 번째 시험. 4회전.
-신생 성운에 불과했던 당신의 성운은 어느새 전설급 성운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전설급 성운의 참가자는 이제 하나의 공동체 운명에서 벗어나서, 각자 새로운 시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각자 새로운 시험?”
이소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메시지는 계속 흘러나왔다.
-전설급 성운의 참가자는 하나의 성운에 소속된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존재로서 인정됩니다. 각자의 생각대로 원하는 성운전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당신은 원하는 곳에 가서 성운전의 시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 뭔가 더 개성을 존중해 주는 느낌이네.”
자꾸 이소민이 추임새를 넣자, 옆에서 잠자코 듣던 조커가 신경이 쓰이는지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쉿 소리를 냈다.
“예이, 예이, 조용하겠습니다.”
눈치를 받자, 이소민은 어깨를 좁히고 쭈그러져 구석에 웅크리고 물러났다.
-당신이 있는 곳은 신화급 성운인 <아비규환의 지옥도>입니다. 이곳의 통과 조건을 클리어하여 당신의 능력과 자격을 증명하십시오.
-규칙.
<아비규환의 지옥도>에는 매년 한 명의 우승자를 가르는 ‘마경대전’이 열립니다.
이 대회의 우승자는 성운의 주인이 되어 1년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성공 목표.
마경대전의 최종 우승자가 되거나.
최종 우승자가 속한 세력의 일원이 되면 목표를 달성합니다.
“와, 대회가 열린다니.”
이소민은 그새를 못 참고 감탄사를 쏟아 내다가 조커의 눈치를 다시 받고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메시지를 들은 모두가 민감해지고 있었다.
-특수 룰.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제한 시간.
없습니다.
-보상.
생존자가 달성하는 기준에 따라 업적과 보상이 달라집니다.
-패배.
승리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이곳에 귀속됩니다.
“대회에서 우승하거나, 우승자의 세력권에 들어가라는 건데.”
팔짱을 낀 조커는 잠자코 성공 목표를 되뇌었다.
특별한 생각이 들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숱한 전투가 펼쳐지리라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상대는 무려 악마종, 아니면 지옥도의 신좌들인가.”
전투에 능숙한 조커조차 떨게 하는 상대들이었다.
신좌나 초월좌는 급이 다른 존재들이었다.
에어리스의 어머니, 초월좌 시오의 힘을 직접 상대해 보았기에, 그 위력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왼팔을 잃고서도 절대 굽히지 않았던 그녀의 아우라가 눈앞에 선명했다.
“쉽지 않겠네요.”
네 개의 성운이 집결된 공간.
지옥의 악마.
염부의 염라대왕.
올림푸스 명계의 하데스.
아스가르드 헬헤임의 헬라.
이들이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자들이었다.
“굳이 우승을 안 해도 우승자가 속한 곳에 소속되면 된다고 했잖아.”
이소민의 말에 유진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들이 우리를 받아 줄 이유가 없잖아요.”
“좀 그런가?”
“당연하죠.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길 테니까요.”
지켜보던 레다가 말을 보탰다.
“저들에게 우리는 미약한 수준의 존재일 뿐이야. 귀찮은 정도도 안 되겠지.”
신좌들에게 우리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먼지처럼 흩어질 부스러기에 불과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에어리스는 어쩔 줄 몰라 고개를 계속 흔들며 좌우를 살폈다.
레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귀자 유성하에게 자세히 듣지 못했고, 아테나 역시 알려 주지 않았다.
알면 이뤄지지 않는 미래.
몰라서 이룰 수 있는 ‘비밀’이라고만 했을 뿐.
“변수는 있어요.”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유진하가 상황을 하나씩 정리했다.
“아테나가 말했던 신좌가 있어요.”
“유성하의 동료가 된다는 그 신좌 말이구나.”
레다가 바로 이해했다.
다른 사람도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집중했다.
“아마 형은 동료가 된다는 그 신좌의 조력을 받아 이 성운전을 통과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걸 역으로 이용해 보려고 해요.”
유진하는 한 장의 카드를 꺼냈다.
<아비규환의 지옥도>에서 새로운 반전을 이뤄 나갈 방안이 유진하의 손에 있었다.
“다들 단단히 준비해야 해요.”
카드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4회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어두컴컴한 침묵.
거대한 로비.
높다란 의자에는 검은 아우라를 머금은 신좌 한 명이 팔걸이에 손을 올린 채로 누군가를 맞이했다.
“오랜만이다.”
“저도요.”
장발의 검은 머리와 긴 수염을 머금은 신좌는 매서운 눈매로 낯선 손님을 쳐다봤다.
“반갑지는 않군.”
“저도 마찬가지예요.”
찾아온 자는 신좌로 캄캄한 어둠에서 유일한 빛의 존재처럼 자리한 여신이었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 이 누추한 곳까지 어떤 일인가?”
자신의 수식언을 들은 아테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우두커니 섰다.
긴 수염의 남자는 경계하는 눈으로 아테나의 모습을 바라봤다.
“여신의 몰골이 말이 아니군.”
아테나는 날개 하나를 잃었고, 왼팔도 없는 상태였다.
올림푸스의 고고한 여신이라 불리던 아테나가 추레한 행색이 되어 명계에 찾아왔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3회전에서 꽤 당했다더니 사실이었나 보군.”
“소문이 빠르군요.”
신좌들 사이에서 소문이란 발 없는 말처럼 빠르게 퍼지곤 한다.
괜히 심연의 동굴에서 유진하 일행과 비밀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었다.
“원래 신좌들의 입이 좀 가볍죠.”
아테나는 신좌들의 이기심과 우월감을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듯이, 신좌들도 모두가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
‘역겨운 자들이 많죠.’
아테나의 눈앞에 있는 신좌도 마찬가지였다.
의자에 앉아 거들먹거리는 저 신좌도 그런 자들에 포함됐다.
저런 녀석들의 콧대를 날려 버릴 수 있다면, 팔 하나와 날개 하나를 잃었어도 아깝지 않았다.
“<명계의 마왕>에게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에게 부탁?”
<명계의 마왕>은 아테나의 추레한 모습을 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명계는 올림푸스와 호의적인 관계가 아니다. 내가 거기 소속인 너를 도와줄 이유가 있나?”
“…….”
아테나는 가만히 <명계의 마왕>을 바라봤다.
검은 눈빛과 긴 머리.
외롭게 남은 그는 지하 세계의 왕이라고 불렸으나 영광스런 자리는 아니었다.
“당신이 올림푸스의 주인이 아니라 명계의 주인이 되어서 그런 겁니까.”
아테나가 아픈 곳을 꼬집었다.
“아직도 과거의 원망이 남았나요?”
신좌 중 누구도 지하 세계의 관리자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아 했다.
<명계의 마왕>이란 허울뿐인 자리였다.
어두운 지옥의 명계 구석에 영원히 처박혀 있으라는 소리였으니까.
“후후, 아테나. 그게 원망 정도로 끝날 거 같은가?”
아테나가 낙인처럼 상처를 후벼 파자 분위기는 심각하게 바뀌었다.
올림푸스를 가지지 못한 증오는 하데스에게 영원한 숙명처럼 남아 있었다.
“하데스, 아직도 올림푸스의 주인 자리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않았나요?”
진명이 불리자 하데스의 눈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분노처럼 치솟은 검은 불꽃이 전신을 매섭게 휘감았다.
“격의를 갖추라.”
“실례했습니다.”
아테나는 공손하게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결례를 사과했다.
하데스의 도움을 받으려고 왔는데, 어째 적의만 만든 것 같았다.
“어려운 일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여기서 올림푸스로 돌아가는 길을 원하는 거죠.”
“후후, 그게 어려운 일이지.”
하데스는 긴 수염을 쓸어 담으며 전신에서 타오르던 불길을 도로 거두었다.
“이미 성운전은 시작됐어, 아테나.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성운전이 끝날 때까지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아테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곳의 성운전이라면 ‘마경대전’에서 펼쳐지는 지옥 같은 대결을 일컬을 터였다.
최후의 우승자를 가르는 승부가 이미 시작되었다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벗어날 수 없었다.
“너도 참가해라.”
“…….”
하데스는 명령을 내리듯이 다그쳤다.
이곳은 올림푸스가 아니기에 아테나 역시 하데스의 권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겨서 올라가라. 네가 진정한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라면 말이야.”
아테나의 눈동자가 하얀 불꽃처럼 이글거리듯이 타올랐다.
하데스의 검은 불꽃에 맞서려는 듯이 맹렬한 기세를 발산했다.
마경대전에 참가해서 목숨을 걸으라는 소리를 듣고 분노한 감정이 솟구친 거였다.
그때였다.
하나의 메시지가 <아비규환의 지옥도>에 있는 모두에게 전해졌다.
-난입자가 출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데 스스로 동의했습니다.
-<회귀의 굴레에 들어선 자>가 이곳에 난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