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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81화 (181/229)
  • 181화 아비규환(1)

    공간과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그런 의문이 든 때가 있었다.

    고대에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신이 존재해서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지만…….

    왜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을 때는 답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 그런 질문을 마스터에게도 한 적이 있었다.

    지구가 속한 성운.

    우리 공간을 만든 마스터는,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옅게 웃었다.

    ‘살기 위해서 만든 거야.’

    창조자가 살기 위해서 만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말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씩 이해가 갔다.

    ‘세상에 전쟁이 벌어지듯이 수많은 공간과 신좌들도 싸우고 있으니까.’

    이것이 어쩌면 해답이 될 수도 있을까.

    “…….”

    지금 유진하의 육체는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아테나의 관문에 들어온 후로 정처 없이 헤매는 느낌으로 남아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숨결조차 사라진 곳에 홀로 남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는데, 그 속에는 따스함이 녹아 있었다.

    ‘눈물?’

    감촉을 느끼기 시작하자 조금씩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눈을 떠 얼굴의 형태만 흐릿하게 보였는데, 그 형태만으로도 아름답다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누구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여서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곁에 있는 덕분에 마치 온몸에 생기를 새로 받는 느낌을 받었다.

    ‘죽었다가 살아나듯이.’

    정신이 점점 또렷해지는 동안.

    흐릿한 형체의 여자는 안개처럼 흩어졌다.

    “당신은……?”

    대답은 없었다.

    모든 것이 어두웠던 이곳.

    그녀의 존재가 사라짐과 동시에 하얀빛으로 변해 갔다.

    ‘눈부신 그림자.’

    유진하는 서서히 온몸을 일으켰다.

    아까부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 * *

    “유진하, 일어나!!”

    귀청을 뒤흔드는 고함이 생생하게 들렸다.

    이 커다란 목소리는 집에 있을 적, 아침마다 자주 듣던 소리였다.

    “이소민 누나?!”

    상체를 일으킨 유진하는 멍한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에어리스와 이소민이 같이 있었다.

    “둘 다 무사했구나.”

    심통을 부리듯이 이소민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네가 제일 늦게 깨어났거든?”

    유진하가 못 일어날까 봐.

    걱정한 기색이 역력한 이소민이 살짝 유진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에어리스도 같은 마음인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일어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다들 많이 걱정했거든요.”

    잠을 자다가 일어난 듯해서 별 체감이 없었는데, 두 사람이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잠든 시간이 꽤나 길었던 것 같다.

    ‘꿈이었나?’

    아까 장면이 뇌리에 남아 계속 맴돌고 있었다.

    허공에 맴돌던 자신이 어떤 미지의 존재와 함께 있었다.

    불안함과 경계심은 없었고, 어쩐지 그리움이 느껴졌다.

    알싸한 향기가 몸에 남은 듯이, 그런 감정이 진한 향수처럼 남았다.

    대체 누구였는지 궁금했으나 지금은 에어리스와 재회가 더 반가웠고, 앞으로 해낼 난관이 훨씬 중요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깨어난 곳은 동굴처럼 어두운 곳이었다.

    벽을 매만지니 습습하고 끈적한 느낌이 손에 남았다.

    “땅속인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명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내가 있던 지하하고 비슷한 곳이야!”

    갑자기 툭 튀어나온 영혼체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유나인데?”

    에어리스의 쌍둥이 동생.

    유나가 같이 있었다.

    “아, 에어리스의 동생이구나.”

    유나는 방긋거리면서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쪽은 에어리스 언니의 남자 친구 맞지?”

    “어?”

    에어리스가 화들짝 놀라 당황한 듯이 두 손을 흔들었다.

    “유나, 내가 그렇게 소개 안 했잖아.”

    “언니가 그랬는데. 같이 집에서 살고 가장 먼저 깨워 주고. 그게 남자 친구 아니면 뭐야.”

    유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핵심을 찌르는 지적에 에어리스는 더 대답을 못 하고 얼굴이 붉어지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하, 그런 건 아니야. 집에는 이소민 누나도 같이 살거든.”

    유진하도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알았다는 듯이 유나가 말을 수정했다.

    “흐음, 그럼 여자 친구를 두 명이나 둔 거네?”

    …해명이 오히려 독이 된 것 같다.

    “에어리스 언니 두고, 한눈팔면 내가 대신 혼낼 거야.”

    “…하하.”

    언니를 아끼는 동생.

    유나가 유진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배회했다.

    그 곁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에어리스가 같이 있었다.

    어쩐지 신경 쓰이는 자매라고 할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레다 언니와 조커 아저씨는 주변 순찰을 갔어.”

    “조커?”

    조커가 이곳에 왔다.

    관문이 닫히기 직전에 합류해서 알지 못했던 것일 테다.

    “조커가 왔다니까 더 든든한 느낌이네…….”

    처음 적으로 만난 조커는 이제 원정대의 든든한 돌격대장이 되었다.

    속을 알 수 없었지만 같은 편이라면 큰 전력이 되는 든든한 일원이었다.

    “유나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에어리스, 유나, 레다의 어머니인 시오의 행방이 궁금했다.

    “…모르겠어.”

    유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가 아테나의 관문에 들어왔지만 도착한 지점이 같지는 않은 듯했다.

    아니면, 그녀 혼자서 먼저 가 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왼팔을 잃고 검 한 자루만 지닌 채 어디로 갔을까.

    “아테나도 없고.”

    여신도 사라졌다.

    시오와 결전을 벌이느라 아테나도 왼팔을 잃었지만, 불멸의 신좌이니 큰 타격은 아닐 터였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

    아테나는 대체 우리를 어디로 데려온 걸까.

    그게 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여기는… 정말 내가 있던 지하랑 너무 비슷하다.”

    공중을 유영하던 유나가 천장의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어머니와 있었던 지하 말이니?”

    에어리스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응, 천장 이곳저곳을 살펴봤는데 구조가 내가 있던 지하랑 거의 흡사해.”

    어두운 지하는 유나의 고향과 같았다.

    그렇다면 유나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너무 익숙한데… 도대체 여긴 어딜까?”

    모두가 궁금해하는 동안.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또박또박.

    작게 들리는 보폭의 걸음걸이.

    두 사람이 함께 돌아오고 있었다.

    양복을 빼입고 백가면을 쓴 남자와 긴 외투를 입은 금발의 여자가 함께 있었다.

    “조커? 레다?”

    춤추는 피에로 광대 문양이 새겨진 백가면을 쓴 조커가 여유롭게 걸어왔다.

    긴 외투를 휘날리는 레다도 차분한 눈매를 머금으며 돌아왔다.

    두 사람은 각자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그건 누군가의 머리였다.

    “주변 정찰을 갔다가 이 녀석들한테 정보를 들었다.”

    툭.

    조커가 머리통을 바닥에 던졌다.

    정체불명의 머리통을 보자 이소민은 섬뜩한 기분에 화들짝 놀랐다.

    “우와! 저게 뭐냐?”

    머리에 달린 뿔.

    기괴한 송곳니와 뾰족한 귀.

    마치 괴물처럼 괴기했다.

    “이 녀석들은 악마다.”

    조커가 가면을 벗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악마입니까?”

    유진하가 되묻자 이번에는 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가져온 악마의 머리를 바닥에 툭 내던졌다.

    “확실해. 이미 본 적이 있으니까. 이곳은 악마들의 소굴이야.”

    레다의 눈빛은 차분했다.

    “악마라…….”

    모든 세상에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존재한다.

    올림푸스의 아테나가 현존하듯이 천사와 악마 신화도 있을 터였다.

    “이곳이 신화급 세계라는 거네요. 어쩌면 악마들이 사는 지옥일 수도 있고.”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에어리스와 유나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는지 말을 멈췄다.

    악마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레다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지옥이었으면 차라리 괜찮겠지. 여기는 그보다 더한 곳이야.”

    “네?”

    “이곳엔 지옥과 명계가 있어. 그리고 명부와 헬헤임도 있지. 전부 하나의 공간에 모여 있는 거야.”

    지옥, 명계, 명부, 헬헤임?

    전부 하나의 세계에 모여 있다?

    “악마는 지옥의 생명체야. 명부에는 염라대왕이 따로 있지.”

    “그들은 서로 다른 세력인가요?”

    유진하의 질문에 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독립된 세력을 이루고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어.”

    그제야 레다가 말한 최악의 공간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이곳은 단순한 지옥이 아니라, 모든 신화의 지옥 세계관이 모인 곳이었다.

    “명계는… 올림푸스의 하데스가 있겠군요.”

    “맞아. 헬헤임은 아스가르드의 지하 세계이고.”

    신화급 세계이자, 지하 세계의 세력이 집결한 성운.

    레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우리가 있는 곳을 알려 줬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여기는 지옥, 명계, 명부, 헬헤임이 모두 모여 있는 경계선이야.”

    우리는 지옥 신화의 집결지에 있었다.

    지옥의 악마.

    염부의 염라대왕

    올림푸스 명계의 하데스.

    아스가르드 헬헤임의 헬라.

    이들이 저마다 지하 세계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끝없이 싸우는 마경의 세계.

    죽음을 관장하는 신좌들이 한데 뒤얽혀 영원한 싸움을 벌이는 세상.

    끝나지 않는 전투의 향연과 죽음의 피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진짜 최악이네.”

    이소민과 유나가 얼떨결에 본심을 드러냈다.

    “신화급 세계인데 지옥과 명계가 죽어라 싸우는 곳이라니.”

    지옥의 신좌들이 벌이는 패권 경쟁.

    <아비규환의 지옥도>

    이 성운의 명칭이었다.

    “아테나는 지옥보다 더 심한 곳으로 우리를 보낸 거군요.”

    유진하는 생각에 잠겼다.

    일행은 언제 신좌들의 싸움에 휘말려 먼지처럼 사라질지 알 수 없는 곳에 버려졌다.

    3회전에서 왼팔을 잃은 아테나가 그 복수심에서 이런 걸까.

    하지만…….

    팔 하나를 잃은 아테나의 눈빛에 원한이 실려 있지 않았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쁜 결과는 아니야. 원래라면 3회전에서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야 했거든.”

    레다가 말한 그 사람은 어머니 시오를 가리켰다.

    ‘어머니가 죽지 않았다.’

    어머니는 3회전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걸까?

    레다는 유성하의 동료였다.

    에어리스도 원래는 그쪽과 같이 움직였다.

    회귀자 유성하.

    형은 미래를 알고 있다.

    “원래 3회전은 어떻게 되나요?”

    “…….”

    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반드시 한 명이 죽었어.”

    “네?”

    옆에서 듣던 에어리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올랐다.

    “어머니, 나, 에어리스. 이 셋 중 한 명은 반드시 죽는다고 했었어.”

    레다의 말은 진심이었다.

    “유성하는 그 운명을 바꾸려고 수없이 회귀했지만 결국 모두를 구하는 길을 찾지 못했어.”

    -레다와 에어리스를 구하면, 어머니 시오가 죽는다.

    -반대로 어머니 시오를 구하면, 레다와 에어리스 중 한 명이 죽는다.

    3회전은 운명의 전환점이었다.

    회귀자 유성하도 그것을 알았기에 최선을 다해서 죽도록 노력했을 터였다.

    “형이…….”

    유진하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시간을 거슬러.

    회귀하고 또 회귀해도.

    마치 정해진 법칙이자 벗어날 수 없는 운명처럼 결과는 똑같았다.

    살아남는 자.

    죽어야 하는 자.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길은 후회와 절망만이 남을 뿐이기에.

    ‘나한테 에어리스가 있어서… 운명이 바뀐 건가.’

    어머니 시오는 왼팔을 잃었으나 살아남았다.

    세 자매도 모두 무사했다.

    “형은 알고 있던 거군요. 그래서 저한테 에어리스를 맡긴 거고요.”

    “…그렇겠지.”

    레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회귀자.

    지금의 상황은 분명 최초로 도달한 ‘기적’일 수 있었다.

    “누가 오고 있어.”

    레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얀 날개를 머금은 여신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왼팔과 날개 하나를 잃은 여신.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자 3회전의 심판관을 맡았던 그녀.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지옥의 세계관으로 보낸 여신.

    아테나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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