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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80화 (180/229)
  • 180화 신멸의 구도자(9)

    <정의와 신념의 여신>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훌륭하나 그대들의 뜻대로는 흘러가지 않는다.”

    여신의 복부에 꽂힌 대검과 생환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어리스는 물론 레다의 육체를 빌린 유나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이거?”

    “몸이 휩쓸리고 있어요.”

    여신 아테나의 육체에서 소용돌이 같은 흐름이 발생했다.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기세였다.

    “저건……?!”

    밑에 있던 유진하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켜보던 이소민도 시공간의 뒤틀리는 흐름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유진하, 어떻게 된 거지?”

    “아테나가 뭔가를 하고 있어요.”

    두 자루의 검이 복부에 꽂혔는데도 여신의 기백은 대단했다.

    “관문이 열리고 있어요.”

    소용돌이처럼 휘감기던 아우라는 서서히 지옥의 형체와 같은 문으로 바뀌었다.

    그제야 아테나의 속셈을 깨달았다.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건가?!”

    큰 타격을 입은 아테나는 관문을 생성해서 에어리스와 유나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지혜의 여신은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아야 했다.

    그녀는 저주의 힘이 없기에.

    하지만…….

    지금 아테나는 왼팔을 잃었기에 이성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둘 순 없지.”

    마찬가지로 왼팔을 잃은 시오가 중얼거렸다.

    ‘시오의 죽음이 성운전 3회전의 클리어 조건.’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판관 아테나에 의해서 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목표가 되었다.

    관문의 흐름에 휘말리는 아이들이 있었고, 구해 내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신을 희생하면 3회전은 즉시 통과되고 아이들을 모두 구할 수 있었다.

    “결국 내가 죽으면… 해결되는 일인가.”

    최선을 다한 전투였다.

    <신멸의 구도자>가 되어 신좌들을 하나하나 멸망으로 몰아넣기를 갈망했다.

    아이들…….

    세 명의 쌍둥이 자매들에게 자신의 목표를 세뇌했고, 그걸 위한 도구로 키워 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3회전이 끝난다.

    게임을 끝내면 아테나도 심판관 역할에서 벗어난다.

    이미 발동한 아테나의 관문을 막으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모두를 구할 수 있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차례가 왔을 뿐이라고 덤덤히 받아들였다.

    귀혼검의 서슬 퍼런 칼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을 노려야 한다.

    주인을 죽이는 검.

    그것이 이 죽은 자의 검이 바라던 운명일 수 있었다.

    “그럼…….”

    유언조차 남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잊혀질 존재가 될 것이기에.

    <신멸의 구도자>는 과거의 재앙처럼 허공을 맴도는 소문처럼 잠시 사람들의 입가에서 떠들다가 사라질 것이기에.

    파앗!

    귀혼검의 칼끝이 향했다.

    그곳은 원하던 목표가 아니었다.

    “아직이에요.”

    유진하였다.

    그의 손이 귀혼검을 가까스로 잡았다.

    “너는?”

    “아직 모르셨나요?”

    유진하는 차분하게 얘기했다.

    “저 관문에 당신이 그대로 넘어가면 그것으로도 3회전은 끝납니다.”

    “뭐라고?”

    시오의 낯빛이 바뀌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저 관문에 들어가서 이곳에서 사라지면 3회전은 어떻게 될까요?”

    “아…….”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을 죽여야 끝나는 것이 3회전의 룰인데, 목표 대상인 자신이 만약 관문을 통해 다른 공간으로 넘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목표물 행방 묘연.

    3회전 통과 조건 자체가 사라진다.

    “당신이 사라지면 3회전은 어떻게 될까요? 자동 종료가 될 겁니다.”

    “…….”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으나, 아테나의 최후의 수는 결과적으로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상대의 수를 역으로 이용한다.’

    그것은 <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임기응변으로 적혀 있었다.

    “…그랬구나.”

    시오는 탄식하듯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아이들에게만 집중하느라 옆에 있는 동료들은 잘 몰랐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에어리스가 저토록 성장하게 된 계기는 이 사람 덕분이라고.’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관문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유일한 선택지예요.”

    “너도… 같이 갈 생각인가?”

    “끝까지 갈 생각이에요.”

    가벼운 미소.

    그것은 결심을 굳히고 덤덤히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래, 알겠어.”

    시오가 처음으로 인정했다.

    왼팔을 잃은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려는 사람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어머니가 아닌 동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사람으로.

    “에어리스라고 이름을 붙여 줬다고 그랬지. 그 아이를 꼭 지켜다오.”

    무거운 목소리였으나 동시에 다정한 감정이 전해졌다.

    유진하와 시오.

    둘은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았다.

    그리고…….

    소용돌이처럼 빨아들이는 관문의 흐름 속으로 함께 몸을 맡겼다.

    “진하……?!”

    관문의 소용돌이에 빨려 가던 에어리스가 당황한 얼굴로 유진하를 불렀다.

    “괜찮을 거야.”

    이미 결심을 굳혔는지 유진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어디든 같이 갈 테니까.”

    든든한 말이었다.

    믿음을 주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에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다의 육체를 빌린 유나 역시 관문의 소용돌이의 흐름에 휘말린 상황이었다.

    “레다 언니한테 미안하게 되었어. 몸을 돌려줄 수가 없으니까.”

    “상관없어.”

    어느새 레다의 영혼이 나타났다.

    “레다 언니?”

    “나도 갈 거니까.”

    이미 결심을 굳힌 모습이었다.

    어머니와 세쌍둥이 자매는 하나의 운명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테나의 관문.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서 모두가 함께 난관을 헤쳐 나가겠다고 결의했다.

    콰과과.

    하늘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아테나가 소환한 관문의 소용돌이가 차츰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완전히 열린 관문은 곧 다시 닫힐 터였다.

    “유진하! 이 녀석아!!”

    한 사람이 목소리가 밑에서 크게 들렸다.

    지상에서 이 싸움의 결말을 기다리던 이소민이었다.

    그녀는 이 여정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큰 활약은 없어도 소소한 지원을 하며 항상 제 몫을 해내던 참가자였다.

    “나만 두고 가지 마!!”

    이소민이 두 팔을 들며 소리쳤다.

    유진하와 에어리스.

    두 사람과 처음부터 함께 했던 이소민은 혼자 남겨지기를 거부했다.

    “내 마지막 종착지는 여기가 아니야. 나도 끝까지 함께 간다.”

    무한의 코어에서 전신에 에너지를 발휘했다.

    온몸에 가득 찬 오오라가 땅을 박차며 강하게 튀어 올라가게 해 주었다.

    그녀는 관문의 흐름에 휘말린 일행과 합류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아아압!”

    임계점을 넘어선 관문이 빠르게 축소하고 있었다.

    이소민은 가까스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낯선 감각이 스치고 지나가며, 누군가가 자신처럼 동시에 이곳으로 뛰어들었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누구……?”

    자세히 볼 틈이 없었다.

    단지 누군가 자신과 함께 하는 것만 느꼈을 뿐.

    * * *

    모든 것을 빨아들일 소용돌이 같은 기세를 내뿜던 관문이 닫혔다.

    이리저리 뒤틀렸던 하늘은 아테나의 관문이 폐쇄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유진하.

    에어리스, 레다, 유나.

    어머니 시오.

    이소민.

    여신 아테나.

    마지막으로 들어온 그 사람까지.

    이들이 전부 관문 속으로 사라졌다.

    정적만이 남은 공간에는 산들바람이 불어올 뿐이었다.

    남아 있는 참가자들은 전투가 끝나자 멍하니 자리에 남았다.

    “끝난 건가?”

    3회전의 목표인 시오가 사라졌고, 심판관 아테나마저 자리를 이탈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곳은 이제 전장이 아니었다.

    원정대와 참가자 간의 대결이 멈추자 정적만이 감돌았다.

    -숨겨진 룰이 달성되었습니다. 해당 성운은 3회전을 통과했습니다.

    제갈공명은 안내 메시지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숨겨진 룰입니까?”

    성운전에는 간혹 숨겨진 룰이 존재하곤 했는데, 이번 3회전에도 숨겨진 룰이 있었던 모양이다.

    -목표 대상 시오를 공간에서 내보내는 것.

    숨겨진 룰을 달성하여 3회전을 통과하였습니다.

    “가까스로 해낸 거군.”

    <십자군의 사자왕>은 도끼를 어깨에 메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격전 속에서 무수한 참가자들에 맞서며 한계까지 부딪치던 원정대에게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리더가 자리를 비우게 되었어.”

    목표 대상을 추방하는 숨겨진 룰을 달성했으나 유진하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아테나의 관문 속에 함께 사라진 에어리스, 이소민도 같이 사라졌다.

    원정대는 생존했고 3회전을 통과했으나 리더 유진하를 잃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백우선을 흔들던 제갈공명의 생각은 달랐다.

    아테나의 관문에 들어간 그들은, 결코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될 겁니다.”

    -생존한 참가자 전원은 무사히 귀환합니다.

    -지구 성운은 3회전 숨겨진 룰을 달성하여 전설급 성운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새로운 호칭도 부여됩니다.

    <신멸의 구도자를 물리친 자>가 부여됩니다.

    싸움이 멈춘 전장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서, 모두가 단비를 맞이하듯이 잠시 고개를 들어 지친 얼굴을 씻었다.

    “후우.”

    끝없는 싸움과도 같았던 승부가 마무리되자 원정대는 목표를 이뤄 냈다는 환희와 동시에 새로운 목표를 인식했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우리 성운을 지키겠습니다.”

    여신 아테나와 싸우고 함께 사라진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할 생각이었다.

    전투에서 죽은 희생자를 지키고, 반드시 우리 성운도 지켜내겠다고 결의했다.

    -남은 시간 안에 본래의 성운으로 돌아가십시오. 빠져나가지 못한 존재는 소멸합니다.

    -3회전이 종료되었습니다.

    모두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관문이 열렸다.

    오랜만의 복귀였다.

    2회전과 3회전을 연이어 치른 원정대는 돌아가서 해 줄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남겨진 짐이 많아졌군요.”

    잠시 백우선을 들어 고개를 가리던 제갈공명은 바람에 실려 하늘거리듯이 내려오는 깃털 하나를 발견했다.

    새하얀 손으로 그 하얀 깃털을 잡았다.

    아테나 여신의 깃털이었다.

    “반드시 우리들의 길을 찾아내겠습니다.”

    제갈공명은 사라진 제자와 일행을 생각하며 의지를 다졌다.

    출사표를 쓸 때의 마음처럼 함께한 동료를 되찾고 모두를 지키겠다는 각오였다.

    ‘생전에 나라를 지키던 그때처럼.’

    3회전.

    <신멸의 구도자> 시오와 벌였던 결전은 그렇게 텅 빈 공간만 남겨 두고 종료됐다.

    세쌍둥이 자매와 어머니.

    그들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갈공명은 어쩌면 마지막 변수가 될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함께 갔는데 과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테나의 관문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한 사람은 사실 제갈공명이 서둘러 보낸 지원군이었다.

    “유진하, 당신을 위해서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원정대의 전투에서 당당히 한 축을 담당했던 실력파여서 지금 보내기는 아까웠으나 과감하게 선택했다.

    제멋대로이지만 실력은 확실한 돌격 대장이라 유진하의 곁에서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였다.

    전투를 갈망하는 자.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끝없이 싸우는 자.

    “유진하, 조커를 당신에게 보냈으니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그는 아군이 될 수도, 적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트럼프 카드처럼 조커는 정체를 이리저리 바꾸지만, 잘 활용한다면 전체 판을 뒤흔들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도박 같은 사람이지만 유진하를 믿고 보냈다.

    ‘승부처를 뒤흔들 비장의 카드가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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