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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79화 (179/229)
  • 179화 신멸의 구도자(8)

    서슬 퍼런 귀혼검의 칼날은, 주인의 뜻에 따라 주인의 목을 노렸다.

    시오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 했다.

    “신좌들은 관음증 걸린 괴물 같지. 지켜보고 즐기는 거란다.”

    성운전에는 죽음이 승리를 결정하는 룰이 많았다.

    마치 피를 갈망하는 것처럼 게임의 법칙을 만들곤 했으니까.

    신좌들에게 성운전은 콜로세움에서 노예 검투사들의 목숨 건 시합을 보는 느낌일 터였다.

    “그런 운명이 될 수는 없지. 그 녀석들의 어리석은 장난감이 되지 않겠어.”

    시오가 신좌들을 크게 비웃었다.

    거침없는 목소리였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 여전히 하늘 어귀에서 지켜보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판관을 몰아내야… 3회전의 빈틈을 만들 수 있어.”

    하지만 그것은 이 게임에 걸린 법칙상 불가능했다.

    <절대 방어의 규칙>

    참가자는 심판관 아테나를 공격할 수 없다.

    반대로 심판관도 참가자를 공격할 수 없다.

    ‘아테나는 참가자들이 자신을 절대 공격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올림푸스의 여신이자 3회전의 심판관을 맡은 아테나는 게임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시오를 제압하는 것.’

    3회전의 목표인 그녀의 죽음만이 유일한 승리 조건이었고,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너희가 살아남으려면 내가 죽어야 해.”

    그녀가 쥔 귀혼검이 자신의 목을 노렸다.

    찰나의 순간.

    촤아악!

    귀혼검의 칼날에 피가 묻었다.

    “어머니…….”

    귀혼검의 칼날은 시오의 목을 가르지 않았다.

    그 검을 맨손으로 잡아낸 사람은 레다였다.

    가까스로 칼날을 잡아, 베인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레다가 대답했다.

    누구도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은 없기에.

    레다와 에어리스.

    그리고 유나의 영혼체까지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저와 함께하던 유성하는 2회전에서 헤르메스를 물리쳤어요.”

    레다의 말에 에어리스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안내 메시지가 나온 것을 저도 봤어요. 심판관을 맡았던 신좌가 당해서 쫓겨났다니 정말 놀랐어요.”

    헤르메스와 아테나는 올림푸스의 12신좌였다.

    일행이 진행하는 성운전에 계속 올림푸스가 심판관으로 참가한다는 소리는, 그만큼 저들의 관심이 집중됐다는 소리였다.

    “심판관을 물리친다면 규칙을 비틀어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헤르메스와 아테나는 차원이 다른 상대다.”

    보름달처럼 떠오른 행성의 저편.

    하얀 날개를 펼치며 지켜보는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 보였다.

    고혹하면서도 당당한 자세.

    ‘전쟁의 여신’이라고도 불리는 아테나는 올림푸스 최고 수준의 신좌였다.

    “…….”

    유진하는 고민에 잠겼다.

    3회전의 클리어 조건을 이루려면 결국 에어리스의 어머니 시오를 희생시켜야 했다.

    하지만…….

    에어리스가 그렇게 소원하던 가족을 이제야 만났는데, 그런 잔혹한 운명을 줄 수는 없었다.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면…….”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희생이라는 말이 주는 압박감은 무거운 추를 달고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할 수 없는 운명처럼.

    가혹한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다.

    원정대는 이미 항우에 이어 괴도까지 희생한 터였다.

    더는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유진하는 문득 회귀자인 형을 떠올렸다.

    ‘무수한 시간 속을 배회하던 형은 회귀자로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수많은 회귀의 잔재에 쫓기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하…….”

    축 내려앉은 에어리스의 눈빛이 오롯하게 유진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시오.

    레다, 에어리스, 유나.

    세 자매와 어머니에게 강요된 잔혹한 운명.

    선택은 결국 하나였다.

    “방법은… 있어요.”

    긴장감이 사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유진하는 하나의 답안을 제시했다.

    “절대 방어의 법칙을 뒤집는 방법. 이 완벽해 보이는 것에도 빈틈은 있습니다.”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투였다.

    이 싸움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아야 했다.

    유진하는 고개를 들어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진하……?”

    에어리스가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잘 들어.”

    유진하의 눈빛은 진지했다.

    “저 3회전의 규칙은 심판관을 공격할 수 없다는 거야. 하지만 절대 방어 같은 이 규칙에도 한 가지 틈이 있어.”

    “그게 뭔가요?”

    “이 규칙은 심판관과 참가자에게만 걸린 규칙이라는 거야.”

    짧은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눈동자가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심판관과 참가자가 아닌 사람은 저 규칙에 제약을 받지 않아. 그렇다면…….”

    에어리스는 영혼체로 들어왔다.

    다시 말해, 3회전의 참가자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에어리스는 3회전의 법칙에 적용받지 않아.”

    참가자가 아니었던 에어리스는 심판관 아테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저는… 괜찮다는 거군요.”

    에어리스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가슴에 손을 댔다.

    쿵쾅 뛰는 심장을 느끼며 하늘에 떠오른 여신 아테나를 바라봤다.

    초월격에 준하는 신격의 존재를 상대로 에어리스 혼자 이곳에 남은 기분이었다.

    “승산이… 없는 일이야.”

    부상당한 복부를 부여잡고 있던 레다가 만류했다.

    희미한 지평선 언저리에서 가까스로 가능성을 봤지만 끝이 막힌 길이었다.

    그 끝은 절망이었다.

    “에어리스, 혼자서는 절대 신좌를 이길 수 없어.”

    신좌에게는 차원이 다른 격이 있었다.

    신격을 상대로 에어리스의 아우라는 무력했다.

    초월격을 발휘하는 어머니 시오에게도 일대일이 불가능했는데, 하물며 올림푸스의 최고 신좌 중 하나인 아테나라면…….

    “최선을… 다해 볼게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었기에.

    에어리스는 자신을 희생할 각오로 이 불가능한 싸움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누군가를 지키다가 희생한 사람들처럼.’

    자신에게도 그 차례가 온다면 온 힘을 다할 각오였다.

    “그냥은 아니야.”

    에어리스의 전신에는 아까 모았던 세 개의 빛줄기가 감돌고 있었다.

    유진하의 하얀빛.

    에어리스의 푸른 번개.

    레다의 천둥 번개 별자리.

    <세 개의 빛>이 잔존해 있었다.

    “저기… 하늘 위에…….”

    저 높은 하늘에는 고고한 신격을 발휘하고 있는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 있었다.

    그녀는 커다랗고 하얀 날개를 두르며 전장의 천사처럼 군림했다.

    마치 하늘에서 강림한 신좌처럼 이 전투의 결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겠어요.”

    에어리스가 하늘로 치솟았다.

    대검을 움켜쥐고 번개와 빛의 아우라를 머금으며 여신 아테나를 향해 돌격했다.

    콰아앙!

    대검으로 힘차게 갈랐으나 아테나에게는 닿지 않았다.

    아테나 주변에는 기본적인 보호막이 있었다.

    3회전 <절대 방어의 규칙>이 아니어도 본래 그녀가 가진 신격의 아우라였다.

    “너는 참가자가 아니구나. 날 공격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어.”

    에어리스는 영혼체로 들어왔기에 참가자의 자격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너에게는 심판관 자격이 아니겠지. 그럼 널 공격할 수 있어.”

    신격의 아우라가 발현됐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은 하얀 날개를 활짝 펼치며 아우라를 퍼트렸다.

    초월격에 버금가는 신격.

    올림푸스 신좌의 아우라가 순식간에 하늘을 가득 채웠다.

    “세 개의 빛을 모았으나, 그것은 신격에 비할 바가 아니야.”

    아테나의 기세는 충격파를 끊임없이 발생시켰다.

    충격파가 꿀렁이듯이 하늘을 일렁거렸고, 그 흐름에 휩싸여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하늘에 도전하듯이 나아갔으나, 에어리스는 여신의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아…….”

    점점 에어리스의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저 높은 하늘에 홀로 뜬 태양처럼 아테나는 빛났고,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한계에 달하고 말았다.

    빛과 번개는 줄어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또 한 명이 나아갔다.

    유진하가 따로 준비한 히든카드가 또 있었다.

    ‘숨겨 둔 카드.’

    비장의 무기는 결정적인 순간에 꺼내야 완벽한 기회를 잡는다.

    지금이 유일한 찬스였다.

    “저도 왔어요.”

    에어리스는 자신의 옆에 나타난 사람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레다 언니였다.

    하지만 레다의 차분한 말투와는 완전히 다르게 꽤 밝으면서 명랑한 느낌이었다.

    “레다 언니?”

    “저 레다 언니 아니에요.”

    목소리와 외모는 분명히 레다인데 말투가 더 천진난만했고 밝았다.

    이상했다.

    “잠깐 몸을 빌렸어요.”

    “응?”

    “저 유나라고요.”

    세 번째 아이, 유나였다.

    쌍둥이 레다의 육체를 받아서 전투에 급히 참가한 듯했다.

    “…그랬구나.”

    에어리스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에어리스가 영혼이었듯이, 유나도 영혼이었기에.’

    같은 기준이면 유나도 심판관을 공격할 자격이 있었다.

    ‘에어리스와 유나가 이번 3회전의 룰을 깨는 핵심…….’

    유진하는 두 사람에게 마지막 기회를 맡겼다.

    세 쌍둥이 자매는 마치 하나의 운명을 타고나듯이 영혼으로 끈이 이어졌고.

    ‘육체와 영혼을 의지하며 움직일 수도 있었기에.’

    이번 승부에서도 함께 했다.

    서로 육체와 영혼을 교환하면서 하나의 목표로 나아갔다.

    “하아아아압!”

    에어리스와 유나는 아테나가 발휘하는 신격에 도전하려고 빛줄기처럼 나아갔다.

    최선을 다해서 치솟았으나, 충격파의 흐름 너머 아테나의 방어벽에 완벽하게 막히고 말았다.

    ‘아…….’

    두 사람은 온몸이 짓이기는 압력을 받았다.

    이대로는 무리였다.

    두 사람이 최선을 다했고 <세 개의 빛>으로 힘을 모았으나 아테나의 방어벽 돌파는 무리였다.

    “그대들에게 무리한 힘입니다. 초월격조차 없이 할 수 없는 일이죠.”

    아테나의 말투는 덤덤했다.

    “으으윽!”

    전신을 부숴 버릴 듯한 압력이 몸을 짓눌러도, 에어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계에 도달한다는 건.

    패배를 의미하기에.

    여기서 자신이 무너지면 누군가 죽으리라는 걸 알기에 물러설 수 없었다.

    온몸이 으스러져도.

    빛이 소멸하는 기분으로 나아갔다.

    찰나의 섬광처럼.

    하늘에서 사그라들고 있었다.

    “최후의 힘…….”

    에어리스도 유나도 아니었다.

    낯선 사람이 한 명 더 그들의 곁에 나타났다.

    “어머니?”

    시오가 귀혼검을 쥔 채로 어느새 두 사람의 옆에 나타났다.

    그녀의 자세는 담담했으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너희에게만 맡기지는 않아.”

    귀혼검에는 스산한 아우라가 감돌았고 광활한 기세로 뻗어 나갔다.

    “내 아이들이니까.”

    시오가 매섭게 돌격했다.

    하늘 위에 있는 아테나를 향해 치솟았고, 일격으로 방어막을 베어 냈다.

    “규칙을 어기면 패널티가 너에게 작용한다.”

    아테나의 경고에도 시오의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스스로 체감하고 있었다.

    “내가 널 베면 나도 같은 타격을 입는다. 그것 말인가?”

    시오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 아테나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결국 목숨을 거는 존재가 필요했기에.

    <신멸의 구도자>가 결사의 각오를 품고 나타났으니 주저함은 없었다.

    촤아악!

    강렬한 귀혼검의 베기가 아테나의 상체를 베었다.

    참격.

    그 한 번의 베기는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듯한 파괴력을 보였다.

    기이한 굉음과 함께 상처가 남은 공간에서 아테나의 날개 한쪽과 왼팔이 동시에 잘려 나갔다.

    “크윽!”

    그와 동시에 시오의 왼팔도 잘렸다.

    <절대 방어의 법칙>

    이 규칙을 깨면 공격자도 같은 충격을 받는다.

    “어머니!”

    에어리스가 크게 소리쳤다.

    왼팔을 잃은 시오와 아테나가 공중에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시오는 눈빛으로 신호를 주었다.

    ‘지금이다.’

    마지막 기회를 암시하는 듯한 눈짓이 전해지자 에어리스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유나도 같은 기분이었다.

    전율하는 아우라의 기운 속에 에어리스와 유나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최후의 일격이 작렬했다.

    아테나의 복부에 꽂힌 에어리스의 대검과 유나의 생환검.

    “쿨럭!”

    피를 흘리는 아테나의 입.

    날개와 팔이 잘린 여신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오히려 고고하게 들었다.

    “…훌륭한 자세야.”

    전쟁의 여신으로서 상대의 실력과 투지를 존중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본분은 다했다.

    “하지만… 심판관으로서 내 역할은 끝나지 않았어. 이 싸움은 너희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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