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신멸의 구도자(6)
정원사와의 전투가 끝났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가위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하지만…….
인형극의 마리오네트 인형은 다시 유나의 품에 돌아왔다.
“…벨다.”
유나는 정원사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떨군 채 흐느꼈다.
짙게 흐르는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으나 영혼의 눈물은 허공에서 바람에 휩쓸려 사라질 따름이었다.
“…모르겠어.”
레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귀혼검에 종속된 정원사.
어머니는 정원사를 죽여서 자기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었다.
“저희도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 할 건가요?”
레다가 어머니를 향해서 소리쳤다.
울부짖는 듯한 외침이었으나 어머니는 고요하게 있었다.
“너희를 죽여서 귀혼검에 종속시킨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
귀혼검의 아우라가 검은빛으로 빛났다.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검처럼 피를 갈구하는 듯했다.
“하지만 너희에게 그럴 생각은 없어. 죽은 자는 성장할 수 없거든.”
그럴 의사는 없다고 했다.
물론 생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었다.
“아직 잘 모를 거야. 나에게서 태어난 너희들이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가졌는지…….”
어머니 시오가 한 걸음 내디뎠다.
강렬한 기세를 머금은 그녀는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기억을 지우고 다시 키우면 돼. 나는 너희의 어머니니까.”
<검기의 화신>을 발현시키자 무시무시한 아우라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강렬한 적의를 포함한 힘.
어머니에게 싸움은 대체 무엇을 위한 길일까.
“저는…….”
정원사를 쓰러뜨린 후에, 에어리스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결심한 듯 자신의 다짐을 밝혔다.
“어머니를 막아 내겠어요.”
이 싸움.
정원사는 자신을 막아 달라고 했다.
그건 어머니를 막아 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였다.
어쩌면 정원사의 ‘유언’이었고.
세 자매가 함께 이곳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었다.
“네 힘으로 가능하겠어?”
시오는 지긋이 웃었다.
검기로 이루어진 화신체를 소환한 어머니 시오는 에어리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의 너는 여기서 떠날 때보다도 약해졌어. 저번에 알려줬잖니.”
“알고 있어요.”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전부 죽이려고 할 것이기에…….
반드시 막아 내야 한다.
<뇌명의 참격>
푸른 번개의 아우라가 에어리스의 전신에 휘감겼다.
에어리스가 힘을 발휘하자 레다도 아우라를 발산했다.
<별자리에서 태어난 자>
황도 12궁의 별자리 힘을 받는다.
레다는 전갈자리를 소환했다.
집게발을 가진 전갈자리가 레다의 전신에 감돌았고, 빛나는 별빛의 아우라처럼 치솟았다.
“너희 둘이 함께라…….”
자매의 연합을 바라보는 시오의 마음 한편에 어머니의 마음이 떠올랐다.
자신을 떠나더라도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얼마든지 해 보거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어리스와 레다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전광석화>
번개의 기운을 전신에 감싸서 전속으로 움직인다.
푸른 번개의 기운을 머금고 달려드는 대검의 에어리스.
별의 기운를 머금고 덤벼드는 생환검의 레다.
유나의 영혼체만 자리에 남아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로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아아아압!”
에어리스가 기합을 내지르며 푸른 번개의 아우라를 내려쳤다.
격렬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
레다도 별자리의 힘을 이용하여 강하게 베었다.
어머니가 발휘한 <검기의 화신>에 맞서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노력은 했구나. 특히 레다는 예전보다 발전한 모습이 있어.”
시오는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을 받아 내면서, 차분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진동하는 대지와 부서지는 파편.
크게 흔들리는 느티나무 가지와 세찬 바람에 휩싸인 꽃잎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좋아.”
시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여기서 연습할 적에는 실전처럼 했지. 지금도 같은 거야.”
귀혼검을 든 시오의 전신에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너희들에게 기대하는 걸 보여 주지 않으면 위험할 거야.”
요기에 가까운 기운이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아우라가, 마치 감정의 급격한 변화처럼 잔잔하다가 거세게 휘몰아쳤다.
초월격 <신멸의 구도자>
검은빛 노을 같은 어두운 아우라가 강하게 뻗어 나가 대지를 순식간에 잠식했다.
“싸우거나 죽거나… 그것은 선택이 되겠지.”
귀혼검을 옆으로 뻗자, 대지를 휘감은 아우라가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마치 우물에서 솟아나듯 무수한 기운이 <검기의 화신>에게 주입되었고, 이어서 시오의 전신에도 흡수됐다.
검은빛의 아우라가 마치 기둥처럼 하늘 높이 치솟았고, 대지는 그녀 혼자만 남은 독무대처럼 바뀌고 있었다.
“참살.”
시오가 귀혼검을 내려치는 순간.
공중에서 거대한 일격이 하늘과 땅을 갈라 버리듯 작렬했고, 동시에 공간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단 한 번.
그 일격에 <별에서 태어난 자> 레다의 고유 특성인 전갈자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아악!”
피할 수 없는 쾌속의 검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별은 부스러기만 남아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레다는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별자리마저 분쇄한 첫 검기.
초월격의 일격은 별 자체를 부술 정도로 강력했다.
“아…….”
간담이 서늘해진 에어리스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하늘과 땅을 가른 위엄.
초월격에 도달하면 신좌들을 죽이는 힘을 얻는다는 그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막강한 충격파가 연속으로 퍼져 나갔다.
“아…….”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친 느낌이었다.
기운에 휩쓸려 온몸이 부서질 듯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죽음.
찰나의 공포가 머릿속을 지나갈 때였다.
“에어리스?”
절망적인 충격파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아우라 속에서 유일한 빛이 섬광처럼 나타났다.
“진하…….”
빛의 아우라를 발휘한 유진하였다.
에어리스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최적의 순간에 나와서 에어리스를 충격파의 흐름 속에서 구해 냈다.
만약 유진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에어리스도 저 검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나?”
시오의 눈빛이 번뜩였다.
낯선 사람을 주목했지만, 특별히 경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당신은 에어리스의 어머니라고 들었어요.”
“맞아. 내가 지어 준 이름은 아델리카지만…….”
빛의 아우라를 발휘한 유진하는 차분한 눈빛으로 시오를 바라봤다.
초월격.
<신멸의 구도자>
저 참격을 정상적으로 피하는 것은 빛의 속도로도 불가능했다.
시오가 검을 휘두르기 전에 먼저 타이밍을 예측해서 에어리스를 구하러 간 것이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내 아이가 그쪽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들었지.”
시오가 어머니의 마음으로 걱정하듯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말투 속에는 가시 같은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에어리스는 과거를 알고 싶어 했어요.”
“기억을 잃었다고는 들었어.”
“이제는 알게 되었다고 그랬죠. 이곳의 기억과 정원사, 그리고 당신에 대한 것도…….”
어둠 속의 하나의 빛처럼.
유진하는 최후의 희망처럼 남았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지금은 궁금해졌어요. 기억을 되찾은 지금이 좋은지 아니면 아무것도 몰랐던 때가 좋은지.”
시오는 침묵했다.
“오래전 헤어진 어머니와 자매가 만났는데… 반가운 모습이 아니었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기에 에어리스는 묵묵히 있었다.
그동안 스스로에게도 묻고 있었다.
‘나는 반드시 찾아야 할 기억과 마주한 걸까. 아니면 잊고 싶었던 기억과 마주한 걸까.’
어머니 시오는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게 왜 중요하지?”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그 아이들은 내가 키웠고 내가 가르쳤어. 누구도 내가 키운 내 딸들에게 간섭할 권한은 없어.”
말을 마친 시오는 움켜쥔 귀혼검에 아우라를 주입하며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더는 대화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방해하는 자는 베어 버리겠어.”
초월격 <신멸의 구도자>는 <검기의 화신>에서 이어진 기술이었다.
검기의 화신.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신멸의 구도자>였다.
초월격에 도달한 그녀의 힘은 일격에 만물을 가르고, 그 강력한 신좌마저 단칼에 베어 버릴 정도였다.
“진하… 이건 피해야 해요.”
에어리스조차 아까의 충격을 떠올리고, 전의를 잃어버릴 만큼 그녀의 공격은 공포스러웠다.
대지를 물들인 검은 아우라는 그 공포를 전염시키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유진하는 작게 속삭였다.
그 말은 어둡게 침식됐던 마음에 묘한 울림을 주었다.
“반드시 구해 내겠어.”
그의 떨리는 음성을 듣자 아늑한 마음이 들었다.
유진하는 항상 그랬다.
언제나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
하얀빛의 아우라, 빛의 창살처럼 치솟은 아우라를 배후에 발현한 채로 은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잘 들어.’
에어리스의 머릿속에 유진하가 보내는 말이 전해졌다.
중요한 얘기를 몰래 전달하고 있는 것이었다.
“…알겠어요, 진하.”
다시 기운을 차린 에어리스는 푸른 번개를 발현시켜 전신에 휘감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모아 <뇌명의 참격>을 다시 발동시켰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오는 냉정한 마음으로 검기를 모으고 있었다.
“다시 해보겠다는 거니?”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초월격의 힘을 더 강하게 발산했다.
대지를 뒤덮었던 검은 기세가 하늘까지 넘보기 시작했고, 이내 배후에 떠오른 밝은 행성마저 검게 물들였다.
밝았던 달은 이제 검은 달이 되었다.
“다음 참격으로 끝내 주마.”
무시무시하게 치솟은 기운은 비명을 지르는 원혼처럼 괴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후우욱.
귀혼검을 높이 든 시오를 향해서 모든 아우라의 기운이 집중되었다.
그 막강한 위력 앞에 유진하의 하얀빛과 에어리스의 푸른 번개는 미약한 반딧불에 불과했다.
“진하…….”
에어리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절대 직격으로 받아 낼 수 없는 검기였고 베기 속도 역시 쾌속이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
빛의 아우라를 머금은 유진하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소리에도, 어떤 기색에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초월격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참격.”
두 번째로 내려지는 검기.
하늘도 갈라 버리는 그 위력이 대지에 작렬했다.
검이 닿은 곳마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지진을 일으키며 완전히 무너졌다.
충격파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숱한 먼지와 파편 속에 누구도 남지 않았다.
“에어리스?!”
부상을 당해 지켜보던 레다는 다친 상체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영혼체로 있던 유나도 덜덜거리며 레다의 뒤에 숨어 버렸다.
“언니들…….”
자신의 아우라로 세상을 뒤덮을 만한 기세를 가진 자.
<신멸의 구도자>라는 수식언을 가진 자.
이것이 어머니가 가진 힘이었다.
흐트러지지 않은 검기.
광활한 대지에는 이제 푸른 번개도 하얀빛의 아우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귀혼검의 시오만이 전신을 에워싼 아우라를 머금은 채로 유일하게 자리했다.
“죽은 별의 부스러기처럼… 쓸모없는 것은 버려야 해.”
그녀에게는 나를 따르는 아이만이 유일한 혈육이었다.
초월격이 아이를 소유하는 방식이었다.
짧은 순간.
시오는 뇌리에 스치는 낯선 감정을 받았다.
아주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서늘함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있을 수 없어.’
전투에서 배후를 내준다는 건 죽음이자 패배를 뜻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던 시오는 등 뒤에서 낯선 존재를 느꼈다.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뒤에 분명히 있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등 뒤에 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