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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76화 (176/229)

176화 신멸의 구도자(5)

하늘거리는 비단옷을 입은 시오가 명상에 잠긴 듯이 그윽하게 눈을 감았다.

그녀는 평소에도 사색을 즐기며 심상 수련을 하곤 했다.

“세 명의 아이들이 잘 만났어.”

세 아이들을 다시 만난 날이라 그런지, 모처럼 어머니의 마음이 되었다.

배후에 보름달처럼 떠오른 행성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오기를 기다리던 마음으로 찻잔을 한 모금 마셨다.

“당신의 뜻대로 된 것인가?”

평상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시오를 하얀 날개를 펼친 심판관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 나긋한 목소리를 내자, 눈을 감았던 시오가 눈매를 번뜩였다.

“내가 생각하는 건 아직 이뤄지지 않았어.”

듬직하게 버티던 버드나무가 불어오는 바람에 기다랗게 늘어뜨린 가지를 흔들었다.

동시에 분홍빛 꽃잎이 흩날렸다.

“너희 신좌들에게 내릴 종말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지.”

<정의와 신념의 여신>을 앞에 두고도 시오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강렬한 적의.

올림푸스 지혜의 여신이자 전쟁의 여신조차도, 그녀에겐 토벌 대상일 따름이었다.

“여기서 싸울 수는 없다.”

격렬한 기세를 발휘하는 시오를 지켜봤음에도 여신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여유로웠다.

“3회전의 감독관은 나다. 이번 규칙에서 감독관은 참가자들에게 아무런 관여도 할 수 없어.”

활짝 펼친 여신의 날개에서 하얀 깃털이 나부끼듯이 내려왔다.

“물론 참가자들도 감독관인 나에게 관여할 수 없지. 그것이 이번 규칙이기 때문이야.”

성운전의 감독관을 맡은 신좌는 각자 고유의 규칙을 제시할 수 있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은 절대적인 보호권을 설정했는데 감독관과 참가자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

“나를 공격하면 상대도 같은 타격을 받는다. 반대로 내가 너희를 공격해도 같은 대가를 받지.”

상호 작용의 법칙.

올림푸스의 아테나는 지혜의 여신답게 공평하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방법을 적용했다.

“누구도 여기서는 나와 결판을 낼 수 없어.”

이 규칙을 적용할 수 없었던 헤르메스는 유성하에게 기습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는 달랐다.

결국 3회전의 모든 참가자와 감독관은 같은 제한에 걸리게 되었다.

“당신을 죽이면 나도 죽는다는 얘기와 같네… 지혜를 그런 데다 쓰는 건가?”

시오는 짧게 중얼거렸다.

아테나에게 그런 그녀의 모습은 한탄보다는, 자신을 경멸하고 있는 것이라 느껴졌다.

초월격.

<신멸의 구도자>

이 수식언은 쉽게 달성할 수 없는 특성이었다.

수많은 세계와 공간을 무너뜨리고, 신적인 존재들조차 소멸시킨 자만이 얻을 수 있었다.

“당신과의 승부는 지금이 아니야. 언젠가 그날이 올 것이다.”

“예언이라도 하는 거냐?”

아테나의 말에 시오는 헛웃음을 지었다.

여신의 미소는 단호하면서도 차가웠고, 등 뒤에 달린 양 날개에서는 깃털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예언은 하는 게 아니라 이뤄 내는 거다.”

신좌의 하얀 깃털.

그 깃털 중 하나를 잡은 시오가 잠시 바라봤다.

“너희들의 예언이 실현되게 놔두지는 않을 거야.”

“원하는 대로 해라. 벗어날 수 없는 흐름에 저항하는 것도 자유니까…….”

추구하는 신념이 달랐다.

신들의 세계와 신들이 없는 세계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듯이.

“이제 당신의 아이들이 오는군요.”

멀리서 레다와 에어리스가 다가왔다.

다시 영혼체가 된 유나는 허공을 유영하듯이 두 언니의 사이를 맴돌았다.

“너희가 모인 걸 보니 그래도 마음이 놓이는구나.”

시오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어머니와 세 아이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랜만의 재회였다.

“어머니에게서 벗어나려고 나간 거였어요.”

가장 먼저 레다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끝에서 살짝 떨리는 느낌을 주었다.

“그건 너희의 선택이겠지.”

평상에 앉은 어머니 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돌아온 아이들을 반기는 듯했다.

“내게는 너희가 가출한 느낌이었단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지.”

레다는 어머니의 말에 부정했다.

“저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어요. 어머니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생각이었으니까.”

에어리스가 잃어버린 기억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었을 터였다.

여기서 레다와 에어리스 자매는 무엇을 했을까.

“어머니의 가혹한 가르침, 그보다 더 심했던 요구. 끝없이 싸우려는 그 생각에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이해한다.”

시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이 느꼈을 고통은 알고 있어. 내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다는 것도 안단다.”

“…….”

에어리스의 머릿속에 과거의 광경이 조금씩 떠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자매는 어머니에게 검술을 시작으로 모든 전투 기술을 배웠다.

살아남는 법과 이기는 법.

그것만을 터득하기 위해서, 어린 자매는 달빛 아래에서도 검을 휘둘러야 했다.

“허억, 허억.”

어린 자매가 거친 숨소리를 토해 냈다.

서로를 의지하면서 고된 수련을 버텼던 나날.

어머니의 엄격한 훈육을 받던 나날을 회상한, 에어리스의 눈빛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왜 그래야 했던 건가요?”

에어리스의 첫 질문이었다.

과거를 떠올리자마자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란다.”

“네?”

“내가 그들의 적이 된 순간부터 너희들은 나와 같은 신세가 되었어.”

핏줄.

피로 이어진 혈육.

운명의 다른 말이었다.

“너희에게 물려주는 건 내 피와 땀만이 아니란다. 내가 받은 절망도 어쩔 수 없이 이어받아야 하지.”

혈육이란 발목에 채워진 피의 족쇄를 의미했다.

어머니의 의지였을까.

아니면 그것은 정말로 피로 이어진 운명이었을까.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에어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곁에서 끝없는 싸움을 반복하는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지?”

“저는 어머니와 생각이 달라요.”

“너희 모두 같은 생각이니?”

“…….”

레다와 유나는 잠시 침묵했다.

지금 그들 사이에는 거대한 강물이 가로막은 듯이 있었고, 그 강은 올림푸스의 스틱스 강처럼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과 비슷했다.

“…너희들은 그렇다는 거구나.”

어머니의 눈빛이 짙게 내려앉았다.

곧이어 정곡을 찌르는 말을 뱉어냈다.

“너희들 모두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는 모양이구나.”

에어리는 유진하.

레다는 유성하.

유나는 두 언니.

셋은 각자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머니는 거기에 없었다.

“성장해 가는 아이들은 항상 그래. 하지만 너희에게는 선택할 권한이 없어.”

평상에 앉은 시오가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검은빛으로 발하는 귀혼검이 들려 있었다.

“모두 조심해.”

레다는 하얀빛의 생환검을 꺼내어 전투 자세를 취했다.

모든 기억을 가졌기에 어머니의 검술이 얼머나 강하고 무서운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네크로맨서의 검, 저 검은 죽은 자를 소환할 수 있어.”

귀혼검의 검은 아우라가 맹렬하게 치솟았다.

어머니의 눈매는 점점 날카롭게 빛났다.

“너희가 아는 사람을 소환하겠어.”

그때, 죽음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찰캉찰캉.

귓가에 익숙한 가위 소리.

“설마…….”

영혼이 된 유나가 소름이 끼치는지 부르르 떨었다.

그러곤 손에 쥐고 있는 인형을 자기도 모르게 움켜쥐었다.

세 명의 자매들에게 같은 인형을 선물한 장본인.

죽은 정원사가 검은 연기와 함께 그곳에 나타났다.

“정원사 벨다?”

모두의 입가에서 짧은 비명이 흘러 나왔다.

이 상황을 침착하게 지켜보는 사람은 어머니가 유일했다.

“이곳은 나와 너희들만의 세계야. 설마 이곳에 다른 사람을 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니?”

정원사 벨다는 ‘이미 죽은 자’였다.

지금까지 귀혼검의 힘으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소환된 거였다.

“정원사가 원래 죽은 사람이었다니… 그것도 어머니한테…….”

정신적인 충격이 가해졌다.

정원사는 어머니에게 죽었고, 이후 검에 의해 소환되어 어머니의 뜻에 따라 세 자매를 돌봐왔던 것이었다.

자신을 죽인 그녀의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죽은 자는 광대가 되어서 인형극도 해 주고,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 주었다.

“어머니…….”

레다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분노와 원망의 감정이 마음속에서 용솟음쳤다.

다시 소환된 정원사는 외눈 안경을 만지면서 첫인사를 던졌다.

“아가씨들을 또 뵙는군요.”

충격을 받은 유나는 손에 쥐었던 소중한 인형을 떨어뜨렸다.

틀림없는 정원사의 등장이었다.

“죽은 자는 다시 죽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어머니 뜻에 따르는 운명입니다.”

귀혼검이 울부짖듯이 광활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원사는 어머니의 귀혼검에 귀속된 자였고, 그의 의지도 마찬가지로 얽매였다.

그제야 세 자매는 깨달았다.

정원사는 아이들을 감시하는 자였다는 것을…….

“이곳은 우리만의 공간이야. 이곳에 들어와 더럽히는 자들은 살려 두지 않지.”

분명한 경고였다.

어머니는 이미 전투태세가 되었고, 정원사는 아까보다 더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너희가 이길 수 있을까?”

어머니 시오의 눈빛이 번뜩이자 정원사 벨다가 빠르게 나아갔다.

그가 휘두르는 가위를 에어리스가 대검을 들어 막아섰다.

“오랜만이군요. 세 자매가 모두 모인 것은 저도 처음 봅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레다 언니와 함께 떠나서 행복하셨는지 모르겠군요.”

“네?”

정원사의 말은 부드러웠다.

그와 동시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정원사는 죽은 자였고, 어머니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하지만 엄연히 자신만의 생각이 따로 존재했다.

‘귀혼검에 종속된 자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조종당한다.’

귀혼검에 묶인 운명.

그것이 정원사의 슬픈 운명이었다.

“세 아가씨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반드시 꼭 들어 주십시오.”

정원사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를 죽이셔야 합니다.”

대검으로 막아선 에어리스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정원사가 옆으로 움직이며 다시 가위를 휘두르고 잔상처럼 빠르게 지나쳤다.

촤악!

가위가 팔을 스치고 지나갔고, 부상을 입은 에어리스가 밀려났다.

“물러나!”

생환검에 아우라를 모은 레다가 에어리스의 앞을 막았다.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정원사는 모두를 없애야 했다.

그렇기에…….

명령을 거부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반드시… 해내셔야 합니다.”

정원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외눈 안경 속 그의 눈동자는 슬픈 눈빛으로 일그러졌다.

“저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를 죽인 그녀가 자신의 딸을 돌보라는 명령이었죠.”

자신을 죽인 사람의 아이들.

원수의 아이들을 길렀다.

“처음에는 원망과 분노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잘못 없는 아가씨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죠.”

레다, 에어리스, 유나.

세 사람은 정원사의 고백을 말없이 들었다.

“정말로 아가씨들을 지키고 싶어졌습니다.”

“…….”

“지상에 있는 두 아이와 지하에 갇힌 한 아이의 영혼을 보면서… 그 암울한 운명을 지켜보면서…….”

슬프고 원망스러운 마음은 영원하지 않았다.

“아가씨들의 행복한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지키려는 마음.

스스로 받아들인 사명이었다.

그리고 지금…….

어머니는 그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자기 스스로 마음먹은 사명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저는 아가씨들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를 죽이십시오.”

“정원사…….”

“괜찮습니다. 저는 이미 죽은 자이기에 또 죽지는 않을 겁니다…… 잠시 사라질 뿐이죠.”

정원사는 옅게 웃었다.

“그게 제 운명입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이들의 승부는 반드시 결말을 향해 가야만 했다.

누구도 검을 내밀기 어려운 상황.

유나는 영혼이 되어서도 울고 있었다.

세 아이 중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은 대검의 에어리스였다.

“알겠어요.”

결심을 굳힌 듯 에어리스는 슬프고도 차분한 눈빛으로 정원사를 바라봤다.

정원사 역시 에어리스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꼬마였던 모습을 떠올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원사와 에어리스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마침내 교차하는 대검과 가위.

그 일격은 정확히 정원사의 몸을 베어 버렸다.

“…고맙습니다. 다시 돌아와 주셔서…….”

마지막으로 최후의 한마디를 남겼다.

“다시 무사히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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