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신멸의 구도자(4)
“나는 지하에 세 번째 아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레다의 말은 작은 파장을 불렀다.
명랑하게 웃던 유나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내가 지하에 있는 걸 알았다고?”
“…그래.”
레다는 순순히 인정했다.
어쩌면 먼 옛날의 일이라고 여겼던 사건일 터였다.
“처음에는 몰랐어. 어느 날 우연히 정원사의 뒤를 따라갔다가 지하의 길을 발견기 전까지는.”
“그래서?”
“거기서 세 번째 아이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 네가 영혼체라는 것도 알았고.”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유나는 명랑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무표정으로 바뀌었는데, 순간 감정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럼… 레다 언니는 알면서도 날 안 찾아온 거구나?”
원망과 분노가 뒤섞인 유나의 말을 듣자 에어리스는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레다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하지만 이미 유나의 심장은 얼어 버린 뒤였다.
“언니가 버림받은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고?”
유나의 외침에 거대한 정원사 인형 소환체가 반응했다.
원래는 유나의 인형이었으나 개량하여 정원사의 인형이 되었고, 지금은 거대한 소환체가 되어 커다란 가위를 움켜쥐었다.
이에 맞선 <별자리에서 태어난 자> 특성으로 발현된 황도 12궁 이외의 숨겨진 별자리도 힘을 발휘했다.
<뱀주인 별자리>는 구렁이처럼 거대한 뱀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정원사 인형과 격렬하게 부딪쳤다.
그 아래에는 레다와 유나가 서로 검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너의 존재를 비밀로 했어. 나는 널 영혼이라고만 알았고 쌍둥이 동생인 줄 몰랐어.”
두 거대한 소환체가 공격을 한 차례 주고받을 때마다 충격파가 튀어 나와서 사방을 뒤흔들었다.
레다는 귓가에 강한 이명이 느껴질 정도의 충격파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언니가 있는 걸 알았어. 하지만 날 찾아온 사람은 어머니뿐이야.”
레다의 하얀빛 생환검에는 유나의 얼굴이 반사되어 비쳤다.
크게 소리치던 레다와 달리 유나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어머니를 욕하는 사람이라면 언니라도 가만히 두지 않아.”
레다와 유나.
첫째 아이와 셋째 아이의 승부는 격렬하게 맞붙고 있었다.
“나는 지켜 내겠어. 정원사 아저씨가 어머니를 지키려고 했듯이.”
정원사 인형체의 무수한 가위질은 원래 주인의 실력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뱀주인 자리가 받아 내기 어려운 궤도로 가위가 날아왔다.
“지키는 싸움…….”
지켜보던 에어리스는 가만히 그 말을 되뇌었다.
사람마다 싸우는 이유가 달랐다.
돈과 명예, 소유욕, 생명.
그리고…….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
“나는…….”
에어리스가 생각했다.
“나에 대해 알고 싶어서 싸웠고.”
더 깊이 고민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고.”
유진하와 이소민.
함께 싸운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이제는… 새로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단호한 눈빛을 머금은 에어리스가 외쳤다.
“싸워 나가겠어.”
에어리스의 영혼체에서 푸른빛의 아우라가 발산됐다.
레다도 노란빛의 아우라를 발산했고, 마치 공명하듯이 쌍둥이 자매의 아우라가 동시에 빛을 발했다.
“어?”
자신만만하던 유나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생환검을 든 레다의 아우라에 밀려 유나는 뒤로 물러섰다.
“우리는 모두 함께 태어났으니까 서로의 감정을 알 수 있어.”
레다가 하얀빛의 생환검을 높이 들었다.
검 끝으로 모여드는 기세가 무섭게 타고 올라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렇기에 너에 대해서도 느껴져. 지금 어떤 마음인지.”
솟구친 검기의 힘이 별자리 소환체에 감돌았다.
레다는 천천히 정면을 바라봤다.
유나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의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결말을 지을 거야.”
레다가 외쳤다.
동시에 생환검을 내려쳤고, 동시에 별자리 소환체도 광활한 아우라를 발산했다.
유나도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정원사 소환체에 힘을 보내고, 스스로 영류검의 보랏빛 검기를 발휘해서 맞받아쳤다.
콰아아아!
격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전력을 다한 일격이 서로의 피부에 닿았고 이내 승부의 결말이 났다.
레다가 내뿜는 위력이 유나와 정원사 소환체를 압도했고 서서히 무너뜨렸다.
“아…….”
지하의 힘으로 이뤄진 정령사 인형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이윽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파편이 되어가더니 서서히 최후를 맞이했다.
지켜보던 유나가 경악했다.
“아아…….”
짧지만 진하게 온몸으로 전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 슬픔은 혼자 지하에 갇혀 있던 때에 비할 만큼 격렬한 고통이었다.
“아아아아.”
레다가 내려친 일격은 유나에게도 작렬했다.
벼락같은 일격이었다.
“유나!”
그때였다.
대지로 퍼져 나가는 기운이 유나를 휘감듯이 한 차례 훑고 지나갈 적에, 에어리스의 영혼체가 그 기운의 후폭풍으로 나아갔다.
휘말리는 위력에 갇힌 유나의 앞.
투명한 에어리스의 영혼이 서서히 다가갔다.
“언니?”
“이제 됐어.”
에어리스는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기려는 게 아니야. 결국 하나의 마음이 되리라고 믿어.”
“…….”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어. 언니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유나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작아졌다.
어쩌면 에어리스의 말.
아니, 쌍둥이가 모두 모인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원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제부터 널 혼자 두지 않을게. 어머니가 보살피듯이 함께 할 거야.”
에어리스의 목소리는 자애로웠다.
처음 만난 쌍둥이 동생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은은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언니…….”
그렇게 유나는 손에 든 검을 내려놓았다.
에어리스는 천천히 다가가 유나를 포근하게 안아 줬다.
잠시 후.
레나도 두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 주었다.
세 자매는 그렇게 한동안 부둥키고 안았다.
어쩌면…….
어렸을 때도 이렇게 세 사람이 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셋은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다시 재회했다.
“유나도 진짜 몸을 갖게 될 거야. 반드시 그렇게 해 줄게.”
에어리스는 약속했다.
새로 만난 동생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유나는 희미한 미소로 웃었다.
“응.”
짧은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유나의 미소는 점점 더 커졌다.
“언니들을 믿을게.”
에어리스의 육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유나의 영혼이 서서히 몸에서 빠져나왔다.
지하의 영혼이 되어 간절하게 원했던 몸이었을 테지만, 그것은 자신의 몸이 아니었기에.
“여기… 언니에게 몸을 돌려줄게.”
유나는 다시 영혼체가 되었고, 육체는 원래 주인에게 귀속됐다.
에어리스는 자신의 육체를 마침내 돌려받았다.
“고마워,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줘.”
에어리스의 영혼은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다.
온몸에 감도는 원기부터 느꼈다.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이 들어와 안정된 마음을 받았다.
“이제 언니들만 믿을게.”
반대로 영혼체가 된 유나는 다시 명랑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지키겠다는 사명에서 이제는 쌍둥이 언니들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을 가지자,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언니들이랑 함께니까.”
영혼이 되어 이리저리 자유롭게 하늘을 움직이면서 레다와 에어리스, 두 언니의 주변을 맴돌았다.
“너무 옆에 돌아다니니까 정신이 없어.”
“아, 그럼 조용히 있을게.”
레다가 자중하라고 슬쩍 눈치를 주자 유나는 이내 스르륵 자리에 멈췄다.
언니들과 함께한다는 반가운 마음이 컸는지 기쁨의 몸놀림을 쉬이 억누르지 못했다.
“이제 돌아왔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에어리스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손을 올려 가슴에 대 보니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고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셋이에요.”
레다, 에어리스. 유나.
운명의 끈처럼 셋의 운명은 이어지고 있는 걸까.
“우리 셋이 모이기를 어머니가 기다린 이유…….”
레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만히 듣던 유나가 이어서 대답했다.
“모든 해답은 어머니가 알고 있을 거야.”
이제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
세 자매의 어머니였던 시오에게 가야 했다.
“이제 만나러 가겠어요.”
에어리스는 유나의 영류검 대신 자신의 손에 익숙한 대검을 들었다.
서서히 감정을 추스르며 저편에서 기다리는 어머니를 향했다.
“아, 내 인형.”
대결이 끝나자 부서진 정원사 인형 앞에 레다의 영혼이 버둥거렸다.
“소중한 물건이었는데…….”
인형은 소모품이 되어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다가 문득 자신의 품에서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자, 내가 가졌던 인형이야.”
“레다 언니?”
정원사가 세 자매에게 준 똑같은 인형이었다.
레다도 그 인형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거였다.
“내가 가져도 돼?”
“응.”
표정이 밝아진 유나가 새로운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세 자매가 자리했다.
그들을 지켜보던 멤버들이 있었다.
“에어리스가 몸을 되찾아서 정말 다행이다.”
긴장감을 애써 참던 유진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까 레다와 유나의 대결이 벌어질 적에 숨을 참아 가며 지켜보느라 꽤 힘들었던 탓이었다.
어쩌면 이 만남이 예정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레다와 에어리스는 원래 형과 함께했다.’
회귀자였던 형.
유성하는 레다와 에어리스를 동료로 옆에 두었다.
1000번이 넘는 회귀.
그 과정을 통해 끝없이 성운전에 도전했던 형은 왜 에어리스를 보냈을까.
‘어쩌면 형도 지금 자매의 재회를 염두에 둔 것 아닐까.’
쌍둥이 자매의 오해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그녀들의 어머니만 남았을 따름이었다.
“3회전 통과 조건은 에어리스 양의 어머니, 시오라는 분을 제압하는 것입니다.”
천재 전략가 제갈공명이 유진하의 옆에서 중얼거렸다.
3회전의 승패는 결국 자매들의 어머니와 어떤 결착을 짓느냐에 달려 있었다.
“무엇이든 해 봐야겠죠.”
특별한 것이 없는 장소.
넓은 평야에 느티나무 한 그루.
나무로 만든 평상과 따뜻한 차를 담은 찻잔만이 있는 곳이었다.
“…….”
그곳엔 오래도록 이곳에 살았던 그녀가 홀로 남아 있었다.
“전력으로 갈 겁니까?”
제갈공명이 전략을 물어봤다.
시오는 초월격의 힘을 발휘하는 자이기에, 원정대의 영웅들이 모두 달려든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지나친 희생이 발생된다면……
승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모든 힘을 소모해선 안 돼요. 전력이 여기 있으니까요.”
성운전에 참가한 원정대가 전부였다.
우리가 전멸하면 그걸로 끝인 상황이었기에 무리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강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최소한의 힘으로 맞서고 싶어요.”
유진하는 전략을 고민했다.
하얀 도복을 가다듬으며 제갈공명도 같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최소한입니까?”
“네, 아직 2만 명의 참가자들이 남아 있어요. 지금은 물러났지만 기회가 생기면 다시 쳐들어올 거예요. 방어선을 유지할 필요가 있어요.”
유진하는 이어서 얘기했다.
“남은 상대는 초월격의 사람이에요. 모두가 간다고 승산이 있는 게 아니에요.”
“…….”
“그래서 공명 선생님께 따로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백우선을 흔들던 제갈공명의 손이 멈췄다.
누군가 굳게 마음먹을 때.
분위기는 바뀌는 법이다.
“저까지 최소한으로 가겠습니다. 원정대의 지휘는 선생님께서 맡아 주세요.”
뒤를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유진하가 마지막 말을 남겼다.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제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