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신멸의 구도자(2)
지면이 흔들리는 와중에 에어리스는 생각했다.
‘자신은 영혼으로 남았고 원래 육체는 빼앗겼다.’
그것도 자신의 동생이라는 세 번째 아이 유나가 나타나서 차지했다.
‘그렇다면 나는… 사라져도 된다는 걸까.’
레다, 에어리스, 유나.
어머니는 세 아이 중 누구 하나쯤은 없어져도 괜찮다는 걸까.
그런 생각이 가시처럼 파고들자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버림받은 거라는 생각이 들자 에어리스는 영혼이 스르륵 약해지고 있었다.
“지금 안 좋은 생각하는가 보네.”
멀리 있던 세 번째 아이, 유나가 중얼거렸다.
“아델리카, 아니, 에어리스 언니 영혼으로 있으면 절대 자기 존재를 의심하면 안 된다고 그랬어.”
“의심하지 말라고?”
“응, 자기 스스로 존재를 의심하는 순간 영혼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 그랬거든.”
유나는 약간은 웃으면서도 조금은 서글퍼진 눈매를 머금었다.
“엄마가 그랬어. 내가 지하에 혼자 있을 때마다 그렇게 얘기해 줬거든.”
“어머니가?”
“영혼이어도 항상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라셨어.”
어머니 시오는 조용히 평상에 앉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작은 차를 손에 들어 한 모금 마실 뿐.
세 아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영혼으로 있었잖아. 그래서 그런 걸 많이 알아.”
에어리스와 레다는 자신이 몰랐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세 번째 아이, 유나가 영혼인 채로 지하에 홀로 있었다는 소리까지.
“혼자였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정원사 벨다가 자주 지하로 내려와서 나와 자주 놀아 줬거든.”
천진난만하게 웃던 유나는 마치 손가락으로 장난감을 만지듯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손짓은 정원사가 인형극에서 보여 주던 조종술과 비슷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슬픈 인형극이었다.
“벨다도 밖에 있지? 다음에 또 인형극을 해 주겠다고 그랬는데.”
“…….”
대답할 수 없었다.
유나의 유일한 친구가 이제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에는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언니들, 왜 그래?”
유나는 미심쩍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 반응도 없자 느낌이 이상해져서 정원사를 부르기 시작했다.
“벨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원사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고 철문 바깥에서는 치열한 전쟁의 소음만이 가득했다.
“저것들 정말 시끄럽네.”
기분이 언짢아진 유나가 대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엄마, 잠깐 나갔다 올게.”
“그러거라. 거기에는 이 어머니를 죽이려는 녀석들이 있으니까 몸조심하고…….”
“걱정하지 마. 엄마는 아무도 못 건드리게 내가 막을 거야.”
허락을 받은 유나가 움직였다.
쏜살같이 나아가 에어리스와 레다를 지나치고 철문 밖으로 나갔다.
“와아!”
처음으로 나온 바깥세상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죽은 탓에 영혼이 되었고, 혼자서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지냈던 아이.
유일한 친구는 정원사.
마침내 올라온 지상에서 아름답게 흩어지는 꽃잎을 보았고, 커다란 행성과 지평선을 보았으며, 처음으로 쌍둥이 언니들과 만났다.
그리고 이제 철문 너머의 새로운 세계와도 마주했다.
“드디어 밖으로 나왔어.”
처음으로 나온 지금.
반가운 광경은 아니었다.
매캐한 포격의 연기와 피가 진동하는 냄새, 격렬한 함성과 죽어 가는 신음이 뒤섞인 곳.
“여기가… 세상이구나.”
기대했던 곳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이 뒤얽히고 비틀리는 세계였다.
어머니가 항상 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성운전은 끝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세계야. 결코 낭만적이지도 않고 자유롭지도 않단다.”
어두운 지하에서 어머니의 말은 마치 하나의 복음과도 같았다.
유일한 음성.
유일무이한 사랑.
어머니 말은 언제나 진실이었다.
“이렇게 불편한 세계였구나. 역시 어머니 말씀이 옳았어.”
실망한 기색이 된 유나는 사방을 훑어보다가 문득 한 사람을 발견했다.
“벨다?”
죽은 정원사였다.
“왜?”
다가서는 유나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정원사가 반갑게 맞아 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왜 죽은 거지?”
정원사는 이미 쓰러진 상태였다.
그의 영혼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아 어쩌면 이미 소멸되었을 수도 있었다.
“왜 안 보이는 거야?”
유나의 목소리에 울음이 뒤섞이고 있었다.
저 깊은 지하에서 유일한 친구였고, 장난감 인형을 선물로 준 사람이었다.
“너희들 짓이지?”
유나의 신체가 떨리고 있었다.
분노한 감정은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전부 죽이겠어.”
엄청난 기세의 아우라가 치솟았다.
전신을 휘감은 무시무시한 기운이 발동하자 대지가 뒤흔들리고 균열이 생겼다.
모두의 시선이 그 강대한 기운에 집중됐다.
“에어리스?”
이소민이 외쳤다.
유진하는 섣불리 다가가려는 이소민을 제지했다.
“에어리스가 아니에요.”
분노한 얼굴.
절대로 에어리스가 보이던 모습이 아니었으며, 아우라의 기세도 완전히 달랐다.
살기였다.
“정원사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러 온 너희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겠어.”
강렬하게 치솟은 감정이 섞인 아우라가 미친 듯이 사방에 휘몰아쳤다.
살벌한 유나의 기세에 누구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에어리스가 아니면 대체 누구야?”
유진하도 대답하지 못했다.
에어리스의 육체에 들어간 영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였고, 사방을 뒤덮은 긴장감이 팽배했다.
“전부 끝내겠어.”
<지하에 침식된 자>
고유 특성이 발현되었다.
지면은 마치 거대한 지진처럼 뒤틀렸고, 거기서 파생된 바위와 파편들이 유나 근처를 맴돌았다.
거대한 지면의 파편을 머금은 유나가 단숨에 날아올라 성채 아래에 있는 적들의 한복판에 전력으로 내리쳤다.
“우아아악!”
엄청난 파열음과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단 한 번의 일격.
그것으로 참가자들의 중앙 진형이 완벽하게 뚫렸고 여진이 계속 남았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어.”
유나의 눈빛은 살의를 머금어 붉어졌다.
몇몇 참가자들이 덤벼들었으나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대검의 궤적에 갈라졌다.
“여기는 나와 어머니가 같이 살아가는 터전이야. 너희들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어.”
유나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표면이 울렸다.
<지하에 침식된 자>
지하에 있는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는 특성이었다.
땅이 진동하는 바람에 대부분 참가자들은 제대로 균형을 잡고 서기도 힘들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참가자는 순식간에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엄청나잖아.”
놀란 이소민이 경악했다.
유나는 에어리스의 육체를 가졌지만 발휘하는 힘과 기세는 완전히 달랐다.
격렬한 증오를 자양분으로 삼듯이 장난감처럼 사람을 베어 넘겼다.
살육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일대를 제압했다.
천년 제국의 성벽에 있던 제갈공명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에어리스 양의 육체를 누군가에게 빼앗긴 데다가, 지금은 학살자와 다름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군요.”
백우선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제갈공명의 눈빛은 일그러졌다.
드넓은 대지에서 홀로 대검을 거침없이 휘두르는 유나의 전투가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외로우면서도 고독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쳐져 일그러진 상태이니 제압하기는 어렵겠군요.”
차분히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든 듯했다.
유진하 역시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공명 선생님, 저희가 상대한다면 승산은요?”
“이미 알고 있지 않으신가요.”
제갈공명이 침착한 어투로 답변했다.
“최선이 절반. 최악은 전멸입니다.”
충격적인 분석이었다.
정면에서 부딪친다면 원정대 절반은 희생할 전투였다.
그런 싸움은 할 수 없었다.
에어리스의 육체를 빼앗은 영혼은 그만큼 강했기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먼저 움직인 쪽이 있었다.
“언니들이 왜……?”
레다와 에어리스 영혼이 어느새 따라와 유나의 앞을 막아섰다.
“이 녀석들은 어머니를 죽이러 온 거잖아. 언니들은 뭘 하는 거야?”
유나는 미심쩍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소리쳤다.
“비켜. 언니들을 베고 싶지 않아.”
“그럴 수 없어.”
에어리스가 대답했다.
영혼체가 되었어도 어디까지나 유나는 자신의 육체를 가져간 동생이었다.
에어리스에게는 자기 몸을 돌려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 몸은 내 것이야.”
“어머니는 내가 가져도 된다고 했어.”
“그 몸의 주인은 너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야. 바로 나라고.”
단호한 외침이었다.
이제 더는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이 에어리스가 소리쳤다.
유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언니의 몸, 이제는 내 거라고 그랬어.”
오랜만에 마주한 언니였으나 지금은 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지하에서, 언니들은 지상에서 살았어. 나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었고, 영혼이 되어 어두운 땅속에 있었거든.”
“유나…….”
안타까운 감정이 들었다.
어둡고 으슥한 지하에서 혼자 영혼으로 굳건하게 살아온 나날이 계속되었으리라.
어린아이에게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었을 터였다.
안타까움과 회한.
몰랐던 미안함이 뒤섞였다.
“너에 대해서 몰랐던 건 미안해. 알았으면 너도 같이 우리와 빠져나갔을 거야.”
“언니들은 어머니를 버리고 나갔어. 나는 이곳에 남았고.”
유나의 눈빛이 갑자기 변했다.
“어머니와 나를 버리고 갔어. 그런 거잖아.”
“…….”
레다와 에어리스.
그리고 세 번째 아이였던 유나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언니들은 왜 돌아온 거야? 혹시 저자들처럼 어머니를 죽이러 온 거야?”
죽은 정원사가 떠올랐다.
“정원사에 이어서 어머니마저 없애려고 돌아왔어?”
“그게 아니야. 우리는…….”
지켜보던 레다가 외쳤으나, 그 소리는 유나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갈 따름이었다.
폭발적인 감정은 더 격렬하게 유나의 마음을 뒤틀어 가고 있었다.
“반가운 언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들이랑 한패였어. 정원사를 죽인 것처럼 어머니도 죽이려는 거야.”
오해와 상처는 세 아이에게 깊은 절망감을 남겼다.
“어쩌면 언니랑 셋이서 같이 모여 앉아 정원사의 인형극을 관람했을 수도 있었는데…….”
이뤄지지 않은 소망은 계속됐다.
과거에 버려진 꿈이었다.
“다 함께 하하 호호 웃으면서 소꿉장난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믿을 수가 없어. 나는 어머니를 지키겠다는 마음만 남아 있을 뿐이야.”
유나는 쌍둥이 언니들을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둡고 추웠던 과거.
그 모든 것이 현재의 불안과 절망에 뒤섞여 분노로 타올랐다.
“누구도 어머니를 공격하게 놔두지 않을 거야.”
대지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지표면이 붕괴되어 지진파가 퍼져 나갔다.
<지하에 침식된 자>
지하의 힘을 흡수한 유나의 아우라가 거대한 폭포수처럼 치솟았다.
건너편에 있는 레다와 에어리스는 일순간 위협을 느꼈다.
“물러나 있어.”
“레다 언니?”
“저 아이에게는 대화가 통하지 않아. 이대로 물러났다가는 모두가 전멸할 거야.”
세 아이의 맏이였던 레다답게 각오를 다지고 검을 꺼내 들었다.
“…피하지 않겠어.”
에어리스가 항상 하던 ‘최선을 다하겠어요’라는 말처럼 스스로 레다가 되뇌이는 말이었다.
레다의 전신에서도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그 기운은 하늘 높이 치솟았고 무수한 별의 무리가 나타났다.
<별자리에서 태어난 자>
레다의 고유 특성이 발현됐다.
하늘에 떠오른 별.
지상에 치솟는 파편.
레다와 유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고 피할 수 없는 싸움을 준비했다.
세 아이의 전투가 임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