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신멸의 구도자(1)
수문장이었던 정원사 벨다가 죽자 철옹성 요새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대신 막겠습니다.”
유진하는 리더로서 모든 일행에게 지시를 내렸다.
3회전의 목표는 에어리스와 레다의 어머니인 시오의 토벌이었지만, 유진하는 그녀가 쌍둥이 자매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혁명의 황제>는 포신을 돌려 밀려드는 참가자들을 조준했다.
“포격하겠다.”
잠잠했던 포격이 다시 시작됐다.
그들은 족히 9천 명이 넘었고, 이쪽은 겨우 20명 안팎이었다.
“…가라.”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미 참가자들은 몰래 근접한 상태로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포격으로는 적을 상대하기에 효과적이지 않았다.
이제 근접전이 벌어질 차례였다.
“우리도 나설 기회가 왔군.”
난전에 익숙한 <십자군의 사자왕>이 도끼를 빼내 들었다.
거인 타가르는 이미 성벽 앞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천하대장군>, <애꾸눈의 장군>, <푸른 늑대의 정복자>를 비롯한 영웅 전원이 무기를 꺼내어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저도 능력을 발휘해야겠군요.”
백우선을 흔들던 <천재지변의 책략가>는 부드럽게 얘기했다.
서서히 주변에 불어오는 바람이 동남풍처럼 제갈공명의 주위에 휘감겼다.
9천 명의 상대로 맞서기에 20명은 부족한 전력이기에 유진하도 이곳에 남았다.
“둘은 어서 안으로 가요.”
빛의 아우라를 발휘하여 무수히 쏟아지는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
그 힘으로 순식간에 상대를 밀어냈다.
“진하…….”
에어리스 영혼이 머뭇거렸다.
원정대 동료들을 남겨 놓고 가야만 하는 걸까.
고민에 빠진 에어리스와 달리 레다는 단호하게 결정했다.
“가자, 모두가 만들어 준 기회니까.”
레다가 검을 챙기고 달렸다.
손에는 정원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열쇠를 들었다.
둘은 천년 제국의 성벽에서 버티는 영웅들을 뒤로하고 함께 나아갔다.
“저는…….”
에어리스 영혼은 공중을 유영하듯이 따라왔다.
쓰러진 정원사를 뒤에 두고 가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으나 레다는 그런 에어리스를 다독였다.
“정원사는 잠시 쉬게 두어도 괜찮을 거야. 다시 돌아올 거잖아.”
“네…….”
이제는 머뭇거리는 감정을 떨쳐 내야 했다.
3회전에 들어선 이상.
철문을 열어 마지막으로 진정 맞서야 할 사람과 마주해야 했다.
“이제 들어가겠어.”
열쇠가 매끄럽게 돌아갔다.
육중한 철문이 스스로 열리자 그 사이에서 무수한 빛이 쏟아졌다.
‘관문처럼 빛나는 강철의 문.’
정원사가 목숨 걸고 지켰던 그 문이 마침내 열렸다.
“여기는…….”
에어리스는 처음으로 철문 안의 세상을 바라봤다.
초가집과 넓은 마당.
언뜻 되살아난 기억 속에서 봤던 그 광경이 그대로 있었다.
밭에는 채소가 심어져 있었고, 그 근처에는 각종 과일나무가 있었다.
마당 중간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축 늘어진 가지가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제 왔니?”
연분홍 꽃잎이 흩날리는 그곳에는 한 사람이 평상에 앉아 있었는데, 동그란 달처럼 떠오른 밝은 행성을 배후에 둔 상태였다.
“어머니…….”
레다가 대답했다.
어떤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이 말을 쉽게 이어 가지는 못했다.
“집을 떠나 헤매고 돌아다녔겠구나. 어땠니?”
어머니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너희들이 돌아올 때까지 내가 기다리고 있었잖니.”
“…….”
다시 모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세 모녀는 오랜만의 만남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바닥에 흐르는 듯했다.
항상 만나고 싶었으나 어느새 거리가 멀어진 느낌이 가득했다.
“여기서 떠나고 원하는 걸 얻었니? 망망대해의 흐름에 떠밀려 알 수 없는 곳을 헤매고 다녔을 거야.”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 어귀 어딘가에는 3회전의 심판관을 맡은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어디로 가도 피할 수 없어. 그들은 이 세계의 지배자니까. 하늘에서 고고히 내려다보고 있거든.”
신좌들의 위명은 모든 성운을 뒤덮었고 검은 구름처럼 퍼져 나갔다.
그들의 위세는 전염병과도 같아서 그 위세에 누군가는 죽어 가고 있었다.
“맞아요.”
레다는 순순히 대답했다.
에어리스 영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동의했다.
신좌들의 게임. 성운전.
모든 성운들은 최상위 신좌들이 만든 법칙에 굴종해야 했다.
“그들에게 대항하려면 법칙을 무너뜨릴 힘이 있어야겠지.”
어머니 시오는 손에 가벼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다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은 시야를 돌려 에어리스 영혼에 주목했다.
“아델리카…….”
에어리스는 어머니가 지어 준 이름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는 이제 그 이름이 없었다.
“이제는 에어리스가 되어 살아가고 있어요.”
“…그 이름이 좋은가 보구나.”
어머니는 씁쓸한 눈빛을 머금더니 이내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 어차피 이제 내 곁으로 돌아온 거잖니.”
“…아니에요.”
에어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가 지어 준 이름 아델리카.
유진하가 지어 준 이름 에어리스.
두 개의 이름이 서로 복잡한 실타래처럼 뒤엉켜 매듭이 지어졌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고 응어리가 진 느낌이었다.
“저는 어머니에게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제 몸도 되찾겠어요.”
에어리스는 흐릿한 자신의 영혼체에서 빛을 번뜩였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네가 나에게 돌아오면 몸을 돌려줄게.”
그녀가 여유롭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흩날리는 연분홍 꽃잎 하나가 손바닥에 톡 내려왔다.
“너희를 낳아 준 어머니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올바른 길을 알려 주고 싶어서 그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의 기세가 무섭게 뻗어나갔다.
선선히 내려오던 꽃잎들이 순식간에 아우라의 기운에 밀려 날아갔다.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의사였다.
“뒤로 물러나.”
레다는 검을 뽑아 다가오는 위압감을 막아 냈다.
아직 영혼체에 불과한 에어리스가 격렬한 기운에 휩싸여 다칠까 봐 대신 막아준 것이다.
“내가 어머니를 막아 낼게.”
흩날리는 연분홍 꽃잎 속 평상에 앉아 기다리는 어머니가 보였다.
검을 뽑은 레다는 호흡을 내쉬며 전투 의지를 가다듬었다.
‘이 싸움…….’
어머니와 동생의 운명이 뒤얽힌 이곳에서 바람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쳤다.
“3회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음성이 가슴에 꽂히듯이 날아왔다.
“원래라면 나는 저 위에 있는 여신과 결착을 지었을 거야.”
어머니는 초월격의 힘을 발휘했다.
<신멸의 구도자>라 불리는 초월좌라서, 올림푸스의 <정의와 신념의 여신>을 상대로도 결착을 지을 자격과 능력이 있었다.
“그런 내가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사실은 너희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거야.”
어머니의 눈빛은 차갑게 변했다.
단호하면서도 결의에 찬 투사처럼 되어 서서히 아우라를 가다듬고 있었다.
“잘 돌아왔어. 이제 다시는 너희들을 놓치지 않을 거란다.”
그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초월격의 아우라가 살벌하게 치솟기 시작했다.
“너희에게 줄 선물이 있어.”
바람이 일순간 멎었다.
고고해진 분위기 속에서 연분홍 꽃잎이 다시 날아들었고, 누군가 그 사이에서 나타났다.
“당신은……?”
에어리스는 갑자기 나타난 자와 마주하고 크게 놀랐다.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의 머릿결과 새하얀 피부.
매끄럽게 빗겨진 콧날과 푸른 바다 같은 눈동자.
그 사람은 ‘에어리스’였다.
“내가 왜 저기에?”
에어리스는 저번 천공의 성에서 어머니에게 육체를 빼앗겼다.
괴도의 희생으로 간신히 영혼만 빠져나왔는데 지금 어떻게 자신의 육체가 살아서 움직이는 걸까.
“너희가 몰랐던 사실이 있단다.”
어머니, 시오의 목소리가 새파랗게 스며들었다.
마치 물에 젖어 가는 옷자락처럼.
그 차가운 냉기는 온몸의 피를 얼려 버릴 만큼 냉랭했다.
“쌍둥이 너희들만이 아니라 한 명이 더 있었단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레다와 에어리스 외에 한 사람이 더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단다. 안타까운 일이었지.”
“어떻게?”
“너희에게는 비밀로 해 두었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명이었단다. 정원사에게 부탁했지…….”
어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예전 기억이 떠올랐는지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이내 말을 다시 이어 갔다.
세 번째 아이의 영혼은 깊은 지하에서 쌍둥이 모르게 지내왔다.
“레다 그리고 아델리카. 그 아이도 너희와 쌍둥이이기에 너희 중 하나의 몸에 들어갈 수 있단다.”
레다와 에어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 시오의 고백은 계속됐다.
“아델리카의 육체에… 그 아이의 영혼을 넣었어.”
마치 주문처럼 읊조리는 그 말은 저주처럼 들렸다.
세 번째 아이.
“너희들의 동생, 피어나지 못한 아이. 그 아이 영혼은 나를 잘 따르고 있었으니까.”
에어리스의 육체를 차지한 세 번째 아이는 주로 사용하던 대검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쌍둥이 자매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던 어머니였다.
“너희가 돌아온 지금. 다시는 보내지 않을 거야.”
배후에 뜬 행성이 보름달처럼 빛났다.
연분홍 꽃잎이 내려오는 아래에는 세 번째 아이가 에어리스의 육체를 차지한 채로 걸어왔다.
그 아이의 입가에서 묘한 미소가 흘렀다.
“언니들, 반가워.”
소름이 끼치는 아이의 음성.
영혼 상태로 남은 에어리스는, 본 적도 없는 세 번째 동생에게 자신의 육체를 빼앗긴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되찾을게.”
쌍둥이 레다가 첫 번째 주자로 나섰다.
세 번째 아이의 존재를 처음 알고 자신도 당혹스러웠지만, 두 번째 아이 에어리스를 걱정하는 마음이 강했다.
“싸워 보겠어.”
레다는 결심을 굳히고 검을 들어 아우라를 발휘했다.
<별자리에서 태어난 자>
고유 특성을 발휘하자 레다의 배후에 수많은 별들이 생성됐다.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는 힘.
그 아우라의 기세를 발휘하여 맞서겠다고 결의했다.
“그게 레다 언니의 힘이구나.”
세 번째 아이는 대검을 어깨에 걸치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도 그렇게 멋지고 번쩍거리는 힘이 있는데…….”
에어리스의 육체에서 빛나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 아우라의 기운은 세 번째 아이가 발현시킨 힘이었다.
<지하에 침식된 자>
고유 특성이 발휘됐다.
바닥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대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지진파처럼 터져 나온 그 파동이 강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언니들, 어때? 내 힘도 제법 괜찮지?”
세 번째 아이는 용암 같은 아우라의 기운을 머금은 채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밝으면서도 어쩐지 행복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세 번째 아이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두 번째 언니의 몸이지만 정말 힘이 넘쳐흐르네요. 마음에 들어요.”
에어리스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 몸을 뺏긴 기분과 동시에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충격이 후폭풍처럼 몰려왔다.
흩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너는 누구지?”
“쌍둥이 언니들의 동생이야.”
“이름도 있어?”
“물론이지.”
세 번째 아이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몸짓은 마치 칭찬과 관심을 갈구하는 아이와 같았다.
어머니는 차분하게 세 번재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시선을 에어리스의 영혼에게 고정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유나.”
어머니, 시오의 눈빛은 독사처럼 변해 갔다.
“너희들의 동생이자 틀림없는 내 아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