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토벌령(4)
엄청난 무리들이 일대를 뒤덮었다.
그들이 모두 집결한 모습은 마치 군중들의 바다처럼 거대한 느낌을 주었다.
-참가 성운은 543개.
-총인원은 1만 3213명입니다.
“엄청 대규모잖아.”
놀라운 인파를 목격한 이소민은 입을 떡 벌렸다.
에어리스는 그들을 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한탄했다.
“저 사람들이 모두 어머니를 노리는 건가요.”
어머니의 성운에 도착한 지금.
어두운 밤 가까이.
동그랗게 떠오른 달이 보였다.
에어리스는 착잡한 감정이 몰아치는 그곳에서 주변의 모든 것을 바라봤다.
“에어리스…….”
에어리스에게 다가온 유진하가 살포시 마음을 달랬다.
이곳은 에어리스가 태어난 곳이자 자라 온 세상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있는 곳.
이곳에서 있었던 추억이 에어리스의 감정 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에어리스의 어머니는 저들이 상대할 실력이 아니니까.”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는 직접 상대한 유진하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초월격 <신멸의 구도자>를 개방한 시오의 힘은 신좌와 맞서는 수준이었다.
“방어 태세도 되었어.”
먼 대지에는 거대한 방어벽이 존재했다.
철옹성처럼 거대한 요새가 철벽처럼 자리했다.
고요한 긴장감이 감돌 즈음.
쌍둥이 언니 레다가 에어리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 기억은 안 나는 거지?”
“어렴풋해요.”
기억을 잃은 에어리스.
기억을 가진 레다.
둘이 바라보는 풍경은 사뭇 달랐다.
“하나씩 눈동자에 담으면 예전의 모습이 떠오를 거야. 잊고 싶거나 그리운 기억이…….”
다시 돌아온 고향 별은 혼돈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달빛 아래.
레다와 에어리스가 함께 자리했고.
달빛 위에는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손님이 올 줄은 몰랐군요.
철옹성처럼 만들어진 요새 방어벽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모두가 초대받지 않았으니 손님이라기보다는 침입자가 더 맞는 표현이겠습니다.”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외눈 안경을 낀 그는 깔끔한 자세로 한 손을 앞에 두며 공손하게 있었다.
“정원사가 나왔어.”
레다가 그의 정체를 알려 줬다.
에어리스는 양복 입은 남자를 유심히 살펴봤다.
“정원사라면……?”
“이름은 벨다, 다재다능하고 실력이 뛰어나서 어머니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야.”
외눈 안경을 낀 남자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으며, 완벽하게 올백으로 넘긴 외모에서는 카리스마마저 느껴졌다.
그의 기세를 보면서 조커는 왠지 자신과 비슷한 기운을 느꼈고 마음에, 들어 했다.
“서로 비슷한 마인드인가? 단정한 느낌도 그렇고.”
옷은 패션이자 상징이었다.
저 깔끔한 태도를 보면서 조커는 왠지 모르게 동질감을 받았다.
기이잉.
철옹성 요새에서 장비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며, 무수한 대포들이 일제히 벽면에 등장했다.
“불청객에 대한 대접을 시작하겠습니다.”
포격이 시작됐다.
무수한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어냈고 수많은 포탄이 달려들었다.
콰아앙!!
대지를 진동시키는 포탄이 연이어 쏟아지며 참가자 무리에게 작렬했다.
“크아아악!”
포격에 맞아 찢긴 살점과 부서진 파편들이 뒤섞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었다.
“공격해라.”
참가자들도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들은 단숨에 달려들어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기어오르는 모습이 벌레처럼 보이는군요.”
정원사의 외눈 안경에는 성벽을 오르는 적들이 모두 비쳤다.
“잘라 내면 되겠습니다.”
그의 양손에서 번뜩이는 칼날이 나타났다.
찰나의 순간.
정원사 벨다는 툭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렸다.
순간적으로 낙하하면서 자신의 무기를 휘둘러 성벽에 기어오른 자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다.
촤악!
단숨에 참가자들을 무기로 그어 버린 정원사 벨다가, 성벽에서 튀어나온 대포 위에 착지했다.
그의 양손에는 작은 무기가 들렸다.
“가위?”
가위의 세례가 휘몰아치자 성벽에 붙었던 참가자들은 조각처럼 나뉘어 낙엽처럼 떨어졌다.
벨다는 정원사답게 자기 손에 가장 익숙한 장비를 무기로 택했다.
“…강해.”
이소민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빠른 속력의 자르기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재빨랐다.
무수히 많은 대포와 정원사 벨다. 이 둘이 지키는 성벽은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명도 보내지 않겠습니다.”
정원사 벨다는 다시 툭툭 뛰어올라 철옹성의 정상에 복귀했다.
포격은 쉴새 없이 이어졌다.
쾅! 콰광!
원거리는 대포. 근거리는 정원사.
완벽한 호흡을 발휘하면서 참가자 전원을 농락했다.
-총인원은 9843명입니다.
순식간에 참가자 30%가 탈락했다.
모두가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며, 서로 밟고 뭉개지는 난장판 속에 죽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전멸한다.”
지켜보던 유진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어리스와 레다의 어머니는 여기서 모두를 베어 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실력이 있었다.
그녀를 따르는 정원사도 괴물에 가까운 수준이니, 2회전을 통과한 참가자라도 순식간에 조각이 나 버릴 수 있었다.
“이대로는 일방적인 학살극이 될 겁니다.”
지켜보던 제갈공명도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군중들은 더는 무리한 진격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압도적인 철옹성의 기세에 눌려 전의를 잃고 물러나는 군중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공포가 군중을 지배하기 시작했군요.”
밀물처럼 파고들던 파도가 이제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공포는 전염되니 이제 저들은 쉽게 싸울 수 없습니다.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패잔병처럼 물러난 참가자들은 축 처져 물러났다.
전의를 잃은 그들은 당분간 전장에 돌아오지 못할 터였다.
2회전에 참가한 성운은 이제 절반 가까이 줄었다.
하지만 포화가 자욱한 철옹성 성벽은 굳건하게 자리했다.
“우리가 가야겠습니다.”
유진하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철옹성 성벽으로 만든 방어진을 보고 공략할 방법을 생각했고, 백우선을 흔든 제갈공명과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작전의 시작을 알렸다.
“테오도시우스 2세께서 준비해 주셔야겠습니다.”
“오, 나인가?”
<천년을 지킨 성벽>이 나섰다.
유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옹성으로 막는다면… 우리도 철벽의 성채를 내세우면 되거든요.”
비잔틴 제국의 상징.
외적에게서 수도를 천년이나 지킨 3중 성벽이 발현됐다.
“<천년을 지킨 성벽>의 능력은 방어적이지만 역으로 공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제갈공명도 같은 의견을 밝혔다.
“저 포격에 버텨야 다가갈 수 있는데 천년 성벽이 가장 튼튼할 것입니다.”
철옹성 포대를 공략하는 법.
가장 먼저 천년 제국의 성벽으로 방어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도와 주실 분이 나오셔야겠네요.”
유진하는 손을 펼쳐 다음 영웅을 지목했다.
차분한 눈빛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영웅이 있었다.
근대 전장에서 유명한 황제였다.
“<혁명의 황제>께서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예의를 갖춘 제갈공명이 고개를 숙여 황제를 앞으로 모셨다.
자신의 수식언이 불린 <혁명의 황제>는 닭 벼슬처럼 높이 솟아오른 이각모를 쓰고 있었다.
“내 힘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그러겠네.”
프랑스 대혁명에서 집권한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자신의 품에 손을 집어 넣으며 걸어왔다.
그는 황제의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말을 편하게 해도 괜찮네.”
“정말 괜찮으신가요?”
유진하가 황제에게 다가와서 가볍게 인사했다.
나폴레옹은 영웅의 자격으로 참가했으나, 지금은 과거의 사라진 영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전장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과거의 황제일 뿐이고. 여기서는 원정대의 한 명일 따름이네.”
원정대에 참가한 모두가 과거의 명성과 위업을 미뤄 두고 본분을 따랐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유진하, 자네는 리더이고 지휘를 맡았네. 나는 그 말을 따르면 되는 거야.”
“고맙습니다. 그런데 말을 놓는 건 제가 더 불편하네요.”
“하하, 편한대로 하게나.”
나폴레옹은 총명한 눈빛으로 전장에서 솟구치는 열기를 읽고 있었다.
“전쟁터에는 흐름이 있어. 지금이 적기로군.”
그는 과거 수많은 전장에서 지휘한 경력이 있었다.
“포병 장교였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사관 학교에서 시작한 군인이었으니까.”
“그 힘이 필요합니다.”
상대는 철옹성과 대포의 포격으로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 힘에 맞서려면 이쪽도 동등한 파괴력을 가져야 했다.
“성벽을 만들었으니 포대를 설치해서 싸우자는 거군.”
“그렇습니다.”
<혁명의 황제> 나폴레옹은 자신의 역할을 이해했다.
‘포격전은 포격전으로 맞선다.’
철옹성 요새와 정원사의 포격.
천년 제국의 성벽과 황제의 포격.
둘 다 포격으로 승부를 건다.
“이 싸움의 승패가 걸렸습니다.”
유진하는 정면 싸움에 승부를 걸겠다고 밝혔다.
작전 입안을 받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와 나폴레옹이 선두에 나섰다.
“우리가 힘을 합치게 되었군요.”
테오도시우스 2세는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프랑스 제국의 황제가 힘을 합친다니. 생각도 하지 못한 조합이군요.”
두 황제는 덕담을 나누듯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다.
‘천년 제국의 성벽’의 웅장한 자태에 <혁명의 황제>가 발현한 무수한 포대가 성벽에 설치됐다.
<천년 제국의 성벽과 황제의 포대>
두 황제의 능력이 합쳐져 새로운 기술로 진화했다.
거대한 성벽과 포대가 나타나자, 철옹성의 정상에 있던 정원사 벨다는 놀란 눈빛이 되었다.
“조금은 재밌는 성운이 있었나요?”
예상치 못한 거대 성벽이 나타나자 정원사는 약간 당황했으나,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외눈 안경에 비치는 그 너머에서 에어리스의 영혼체와 레다가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가씨들이 돌아오셨군요.”
정원사 신분이라 평소에도 어린 시절의 자매와 잘 어울려 주곤 했다.
“반가운 마음입니다만 인사는 나중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평소의 정원사가 아니라 성채의 방어를 맡은 책임자였다.
주인을 지키는 수호자.
그것이 유일한 사명이었다.
쾅!
포격이 시작됐다.
철옹성과 천년 성벽은 서로 대포를 쏘면서 충격을 주고받았다.
“모두 조심해라.”
천년 성벽은 움직이는 힘이 있어서 무수한 포격 속에서도 야금야금 전진할 수 있었다.
쾅!
<혁명의 황제>가 발사하는 포격도 위력적이었다.
무수한 포대에서 쏟아지는 화력과 정확도는 철옹성의 대포를 압도했다.
“지금이다.”
성벽과 성채가 점점 가까워졌다.
정원사가 자랑하는 방어 요새는 서서히 무력해졌고, 마침내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덧 성채의 최정상에 있는 정원사 벨다만이 남았다.
“내가 맡지.”
정원사를 노리던 자가 나섰다.
백가면을 쓰고 양손에 단검을 움켜쥔 조커가 가장 먼저 성채에 달려들었다.
이미 무력화된 성채의 포격이었으나 아직 남아 있는 소수의 포대가 있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
조커를 정확히 겨눈 한 방의 대포가 발사됐다.
퍼엉!
포격이 작렬했다.
직격으로 포탄에 맞은 조커가 넝마가 되어 나뒹굴었다.
“조커?!”
놀란 이소민이 크게 소리쳤다.
조각이 되어 바닥에 떨어진 조커의 육체는 불에 그슬려 나뒹굴었다.
“거기가 아니에요.”
유진하가 짧게 대답했다.
대포에 맞아 떨어진 조커는 행동 불능 상태에 빠졌지만 이내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건 조커의 분신이었다.
“흐음, 분신이라…….”
위에서 지켜보던 정원사는 조커의 본체가 대포 위에 선 모습을 목격했다.
분신은 미끼였고 조커의 본체는 따로 돌격하고 있었다.
성벽을 뛰어올라 벽을 타고 올라온 조커는 매섭게 달려들었다.
카앙!
성채의 최정상.
단검과 가위가 맞부딪쳤다.
무수하게 후려치는 양측의 베기가 공중에서 격돌했다.
“칫!”
정원사 벨다는 조커의 돌진에 맞서 가위를 휘둘러 막아내는 동시에,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 공격이 막힌 조커는 잠시 거리를 두고 물러나서 벽면에 튀어나온 대포에 착지했다.
상대 역시 조금 떨어진 대포 위에 올라섰다.
“후후, 단검이 무기라…….”
“그쪽은 가위고.”
둘 다 짧은 무기를 주로 사용하고, 양복도 말끔하게 차려입었다.
“나는 정원사. 삐져나온 모든 것을 잘라 버립니다.”
백가면을 쓴 조커도 입술을 씰룩거렸다.
“나도 그걸 잘하지.”
조커와 정원사.
두 사람은 성채의 최정상 벽면에서 서로를 노려보며 단독 승부에 돌입하고 있었다.
그 싸움을 지켜보던 에어리스의 영혼은 무언가 눈앞에서 스치는 흐름을 떠올렸다.
‘정원사와의 과거?’
정원사는 어린 시절의 에어리스에게 무언가를 주었고, 그것을 양손에 받아들고 좋아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억의 파편이었다.
돌아온 조각들이 하나씩 퍼즐처럼 머릿속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나는…….”
기억을 되찾아 가는 에어리스.
정원사는 쌍둥이 자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존재였다.
지금 결전의 순간에서 과거의 기억과 진실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