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토벌령(3)
“2권을 열려면 아테나에게 허락을 얻어야 해.”
에어리스의 쌍둥이 언니인 레다가 봉인의 주체를 확실하게 확인시켜 줬다.
올림푸스 12신좌 중 아테나의 명성은 특히 유명했다.
전쟁을 관장하면서 정의를 수호하고 지혜를 맡은 여신인, 그녀가 걸어 놓은 봉인이라면 절대로 깰 수 없다.
“아니면… <정의와 신념의 여신>을 쓰러뜨려야 하겠군요.”
유진하의 눈빛은 덤덤했다.
3회전의 심판관은 아테나였고, 30일 뒤 성운전에서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될 터였다.
“형은 회귀자라고 했어요. 성운전의 끝까지 갔다고 들었고요.”
“나도 그렇게 알아. 유성하를 쫓는 회귀의 잔재도 그에 견주는 실력자들이기에 고전하는 거고.”
유진하는 형을 떠올렸다.
형은 레다와 에어리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슨 존재였을까.
“유진하, 당신이 맡은 역할은 원래 유성하가 하던 거였어.”
“형이요?”
“차원 문이 열리기 전에는 평범하게 살았지만, 열리고 나서부터는 거의 모든 싸움에 참여했다고 들었어.”
유진하는 형의 기억을 떠올렸다.
실제로 차원 문이 열리기 전에는 조그만 회사에 다니던 프로그래머였다.
하지만 차원 문이 열리던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회사원이었던 형은 가장 먼저 그 안에 과감하게 들어갔다.
최초의 진입자였다.
“형은 회귀자였기에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부 알고 있던 거야.”
유성하가 항상 하던 말이 있었다.
‘모든 건 차원 문이 열리면서 시작된다.’
차원 문이 열리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외부 공간과 연결되었다.
그때부터 회귀의 잔재들이 침입했고 형을 뒤쫓았다.
세상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유성하는 끝없이 다른 공간의 던전으로 넘어가며 회귀의 잔재들을 유인해야 했다.
“형이 받은 운명. 아니, 저주였어.”
회귀 특성을 사용하면 자신의 잔재가 남아서 본체를 끝까지 쫓는다.
회귀자에게 부여된 운명이었다.
옆에서 지켜본 레다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모두 목격했다.
“유성하는 최선을 다해서 싸웠어.”
그녀의 금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레다는 형의 동료가 되어 무수한 전장에서 싸웠으리라.
무수하게 남은 회귀의 잔재들이 증명처럼 남았다.
형은 싸웠고 회귀했다.
“유진하, 당신처럼 모두를 위해서 싸웠어. 지금 당신이 맡은 역할을 혼자서 다 해냈던 거야.”
레다의 목소리에는 약간 울음이 섞인 듯했다.
기나긴 싸움에서 형은 불굴의 투지로 성운전의 끝에 도달했으리라.
그런데…….
왜? 다시 회귀하고 있을까?
“형은 끝에서 무엇을 본 거죠?”
“…….”
레다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그 일은 절대 알려 주지 않았으니까.”
끝에 도달했지만 회귀하는 운명.
도대체 형은 성운전의 끝에서 무슨 일을 겪은 걸까.
“형은 3회전도 알고 있겠네요.”
“…그러겠지.”
“여기서는 어떻게 된다고 하던가요?”
“…….”
레다는 잠시 머뭇거렸다.
형의 곁에서 모든 것을 듣지는 못했다고 해도, 중요한 얘기는 해 줬을 터였다.
“죽는다고 했어.”
“…누가 죽는다고요?”
“어머니 아니면 에어리스 그리고 나. 여기서 반드시 한 명이 죽어.”
“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유진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다의 대답은 단호했다.
‘세 모녀 중 한 명은 죽는다.’
형이 했던 말이었다.
무수한 회귀를 거듭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기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유성하는 팔 하나를 여기서 잃는 기분이라고 했어.”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
회귀자는 수없이 반복되는 과정을 겪어 가며 하나씩 뭔가를 잃어 간다.
소중한 동료를 잃는다는 것.
팔 하나가 잘리는 이상일 터였다.
그렇게 하나씩 뭔가를 잃어 가며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앞으로 걸어가는 회귀자.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끝없이 전진하는 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두 사람을 곁에 두었던 거군요.”
“유성하는… 자신의 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다고 그랬어.”
회귀자조차 바꿀 수 없는 운명.
그것을 숙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머니 시오.
쌍둥이 자매 레다, 에어리스.
셋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반대로 생각하면 둘은 살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에어리스 그리고 레다.”
언뜻 봤던 형의 잔상이 떠올랐다.
커다란 의자에 앉았던 형의 양옆에는 레다와 에어리스가 있었다.
어머니 시오는… 죽었으리라.
“형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에어리스가 항상 하던 말이 떠올랐다.
어깨를 과하게 들썩이며 주먹을 꾹 쥐고 기운을 북돋던 목소리였다.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 말이 지금 귓가에 맴돌았다.
언제나 밝게 들렸는데 지금은 어쩐지 슬프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어.”
레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떤 결말을 맞이하더라도 감내하겠다고 그랬다.
이 싸움에서… 끝은 바꿀 수 없는 걸까.
바람이 부는 와중에 유진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가오는 3회전은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불길한 예감이 서렸다.
차가운 바람만이 불어오는 황폐해진 이곳에 다시금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유진하와 레다의 대화를 몰래 엿듣는 사람이 있었다.
흐릿한 형체로 숨은 그녀, 에어리스의 영혼이 숨어 있었다.
‘한 사람을 잃는다니…….’
영혼체의 에어리스는 슬픈 눈빛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했다.
어느새 밤이 된 이곳은 별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생명이 사라지듯이 그렇게 모든 것이 소멸해 가고 있었다.
* * *
“이제 그날이 되었군.”
<십자군의 사자왕>은 검붉은 얼굴로 당당하게 가장 먼저 등장했다.
사자심왕을 비롯한 무장들과 거인 타가르는 만신창이가 되어 나타났는데 서로 얼마나 대련을 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들 잘 수련하고 있었나?”
영웅들은 각자 수련을 하겠다고 흩어졌다가 이제 다시 모였다.
무장들끼리는 격렬한 대련을 벌였고, 지장들끼리는 자리에 앉아 치열한 두뇌전을 펼쳤다.
“먼저 오셨군요.”
제갈공명이 도착해서 사자심왕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뒤로 <천하대장군>과 <서양철학의 원천>이 나타났다.
“지략이 뛰어난 사람들끼리 작전은 잘 구상했나?”
“많은 수를 주고받았습니다.”
지략가들도 준비를 끝냈다.
영웅들과 마음껏 대결한 조커는 옷이 넝마가 되어 깔끔했던 평소와 달리 추레하게 나타났다.
“후후, 정말 전투를 마음껏 즐겼던 나날이었어.”
행색이 별로라고 여겼는지 도착하자마자 깔끔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나머지도 왔군요.”
이소민과 정부 요원이 다가왔다.
하늘에는 에어리스의 영혼이 허공을 유영하듯이 나타났고, 항우와 괴도의 영혼도 함께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저 높은 하늘에서 레다와 쏟아지는 빛줄기 속의 유진하가 내려왔다.
“진하?”
에어리스가 빛줄기 속 유진하에게 다가갔다.
빛 속의 유진하, 레다와 함께하는 순간을 반겼다.
마침내 전원이 집결했다.
“다들 모인 거죠?”
유진하는 원정대 전원을 한번 돌아봤다.
3회전 섬멸전은 극적인 승부가 예정된 결전이었다.
“에어리스의 육체가 있는 곳…….”
자매의 어머니.
초월격 <신멸의 구도자> 시오와의 결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 전투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결말이 기다릴 터였다.
모두가 숨을 고를 즈음.
마침내 3회전을 알리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세 번째 시험. 3회전.
-당신들은 <성운전>에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인정받았습니다.
2회전을 통과한 당신들은 승리 아니면 패배, 삶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운명에 도전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은 <신멸의 구도자>에게 도전하게 됩니다.
그는 신에게 대적하는 자.
성운의 운명을 바꾸려는 자.
당신의 도전은 위대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이곳의 시련을 넘어선다면 당신들의 성운은 전설급으로 인정받을 자격을 부여받게 됩니다.
-최종 성공 목표.
목표는 오직 하나.
<신멸의 구도자>를 제압하는 성운이 승리합니다.
-규칙.
어떤 방법이든 목표를 이루십시오.
-참가 인원.
성운마다 제한이 없습니다.
-제한 시간.
12시간.
-승리.
목표를 이룬 생존자에게 전설급 업적이 내려집니다.
-패배.
패배한 성운은 멸망합니다.
메시지가 끝나자 관문이 나타났다.
은빛으로 빛나는 찬란한 빛이 문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제 가겠습니다.”
유진하의 앞에는 수많은 영웅과 요원들이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 한자리에 모인 선조와 후손들을 보면서 이번 토벌전에 승부를 걸었다.
“가요.”
결의에 찬 모두가 관문으로 향했다.
에어리스는 저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세 사람 중 한 명은 죽는다.’
만약 자신이 가지 않는다면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어리스…….”
관문 앞에 있던 유진하가 고개를 돌려 에어리스를 바라봤다.
마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이 차분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같이 가자.”
피하지 말고 함께 하자.
그 말은 어떤 응원보다 더한 울림이 되었다.
생명의 빛처럼.
구원의 별처럼.
따사로운 감정으로 다가왔다.
“에어리스…….”
유진하를 믿었고 항상 의지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도 신뢰할 사람이었다.
“갈게요, 저도 가고 싶어요.”
에어리스는 생각을 마친 듯 주저 없이 관문으로 다가갔다.
자신의 육체를 되찾고.
어머니와 결말을 맞이하기 위해서.
쌍둥이 자매는 어릴 적에 자신들이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 * *
‘최초이자 최후의 성운.’
시오는 자신의 성운을 그렇게 일컬었다.
“성운전은 사라질 체계에 불과해. 없애 버릴 체계일 뿐이야.”
시오는 모든 신좌들을 멸하고 자신의 공간만을 남겨 둘 생각이었다.
홀로 평상에 앉은 그녀는 잠시 배후에 뜬 거대한 행성을 지긋이 바라봤다.
“달이 밝구나.”
눈앞에 있다고 착각할 만큼 근접한 달이 눈부시게 빛났다.
눈은 부셨지만 밤이 될수록 사방을 환하게 밝혀 주기에 너무나 아름다웠다.
“언제나처럼 혼자만의 시간이라니…….”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시오는 평상에 홀로 앉아 세상이 돌아가는 자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손님을 초대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나타났다.
하얀 날개를 단 여신.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라 불리는 올림푸스의 여신 아테나가 공중에 유유히 나타났다.
“이곳이 성운전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펄럭이는 여신의 날개에서 하얀 깃털이 떨어졌다.
그 하얀 날개의 자취를 보면서 시오는 마시던 차를 살며시 내려 놨다.
“알고 있어. 나도 오늘부터 시작할 생각이었지.”
“무엇을 말이죠?”
“너희가 나를 섬멸할 작정이니… 내가 먼저 너희를 모두 없애는 거.”
신좌와 초월좌.
서로가 숙적으로 여기는 그들은 3회전에서 맹렬한 아우라를 발산하며, 거대한 기 싸움을 벌였다.
“기대하겠습니다.”
아테나는 공중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차분한 자세를 유지했다.
“지금부터 3회전이 시작됩니다.”
하늘과 땅.
온갖 사방에서 관문들이 벌집처럼 무수히 생성됐다.
3회전에 참가하려는 성운들이었다.
참가자가 무제한이기에 수많은 도전자가 도착하고 있었다.
“참가자 모두를 환영합니다.”
아테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양팔을 크게 벌렸다.
그러곤 등 뒤에 있는 하얀 날개를 쫙 펼치며 배후에 동그란 달을 두고 아름답게 자리했다.
“성운전의 3회전, <신멸의 구도자> 토벌전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