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토벌령(1)
무너져 가는 천공의 성.
마치 모래성처럼 부서져 가는 내부의 예배당 구석진 어귀에는 온몸을 공처럼 웅크린 영혼 하나가 있었다.
마치 소멸하기 직전의 존재처럼.
외로이 남아 있는 에어리스의 영혼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안경을 착용한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가 무너져 가는 예배당을 찾아왔다.
“이소민 언니……?”
무너지는 예배당의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에어리스 영혼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이소민이 보였다.
“왜 그래, 에어리스?”
“저는 모르겠어요…….”
에어리스는 마음에 강한 죄책감을 받았는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구하지 못했어요. 저 대신에 그 사람이 희생되었어요.”
괴도는 에어리스의 영혼만 빼내어 달아나도록 도와줬다.
자신의 목숨을 버린 채로.
“괴도가 그런 일을 하다니 참 믿을 수가 없어.”
“…….”
“본인이 그렇게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야. 원정대부터 함께 한 사이였잖아.”
부서지는 잔해 속에서 둘만이 남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어. 에어리스도 희생할 마음으로 싸웠잖아.”
“저는…….”
“다들 그랬어.”
에어리스는 어떤 적이 나오더라도 항상 가장 위험한 선두에서 싸웠다.
금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커다란 대검 한 자루만 든 채로 강한 상대와 맞서 왔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가장 큰 위험을 감수했어. 그리고 그런 선한 영향력으로 한 사람을 바꿨지.”
“저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
에어리스와 이소민은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혼자라도 살아남겠다고 행동하던 하이에나가 마술사가 되었고, 어느새 원정대의 리더가 되었어.”
“진하…….”
“녀석도 그렇지만 나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 특별한 활약이 없기는 했지만.”
슬픈 표정의 에어리스 영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진지한 분위기가 조금은 풀렸다.
“이제 돌아가자. 모두가 기다려.”
이소민은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에어리스의 영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소민이 그 손을 단숨에 잡아 주지 않았다.
“이소민 언니?”
“결심은 굳힌 거지?”
그 물음에 에어리스가 머뭇거렸다.
나는 정말 살아남고 싶은 걸까.
내가 살아남으면 되는 걸까.
어머니와 쌍둥이 언니.
유진하.
모두와 함께… 가고 싶은 걸까.
‘살아남고… 싶어.’
비로소 그 손을 잡아 주었다.
이소민은 영혼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에어리스 영혼도 마찬가지로 이소민을 만질 수 없었다.
영혼은 스스로 일어나야 했기에, 이소민은 힘을 북돋아 주려고 응원의 말을 건넨 거였다.
형체 없는 악수.
하지만 그들은 마주 잡은 그 손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돌아가자.”
무너지는 예배당.
붕괴되는 천공의 성을 남기고 모든 생존자들이 차원 문으로 이탈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원래의 성운이 아니었다.
* * *
복귀자들은 허허벌판 같은 곳에 도착했다.
“여긴 지구가 아니야.”
조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경계심을 내비쳤다.
함께 싸웠던 <십자군의 사자왕>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왜 귀환하지 못한 거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사자심왕은 최고의 책략가에게 다가가 의견을 구했다.
“승상의 의견은 어떤가?”
“저는 이제 승상이 아닙니다.”
<천재지변의 책략가> 제갈공명은 백우선을 부치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겸손한 천재 지략가와 달리 사자심왕은 생각이 달랐다.
“과거 역사 속에 사라진 나라여도 그대의 마지막 직책은 기록으로 오래도록 남았네.”
“사자의 심장을 가진 왕처럼 말이군요.”
“그렇지, 내가 사자심왕이라면 자네는 영원한 승상이 아닌가.”
제갈공명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사자심왕의 칭찬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왕은 왕이고 승상은 승상이라는 말. 깊이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과연 왕의 자리를 거부한 승상답구나. 훌륭한 자세야.”
<한중왕의 주군> 유비는 죽기 직전에 왕의 자리를 아들 유선이 아니라, 승상인 제갈공명에게 주려 했다.
“저는 한 왕실을 위한 몸입니다. 비천한 저를 위해 세 번이나 찾아 주신 주군을 위해서 이 한 몸을 바치기로 했죠.”
제갈공명은 평생을 아울러 유비의 마지막 당부를 최대의 과찬이자 명예라고 생각했다.
“선왕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군.”
잠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주변의 영웅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가 과거의 영웅들이었고 사명감을 가진 위인들이었다.
모두가 잠시 의견을 나누던 와중에 안내 메시지가 도달했다.
-2회전의 승리 보상이 주어집니다.
-천공의 성을 파괴하면서 숨겨진 규칙으로 통과했습니다. 최초의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천공의 성이 무너졌다.
이 성이 다시 성운전의 시험에 사용될 일은 없으리라.
“또 최초의 업적을 받았나?”
이전에 삼각형의 방에서 100개의 깃발을 모으고 집행관 뱀파이어를 제압하면서 최초의 업적을 달성한 적이 있었다.
그때 <위장하는 자의 깃발>이라는 업적을 부여받아 성운의 명성이 올라갔다.
-<하늘성의 몰락>을 부여받았습니다.
업적을 달성하면 수많은 성운에게 소식이 알려진다.
인지도가 올라가고 그만큼 인정받게 된다.
성운의 명성이 커지고 유명세를 떨칠수록 다른 성운과의 경쟁에서 유리해질 수 있었다.
업적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었다.
1회전에 이어 2회전까지 숨겨진 룰로 통과하면서 우리 성운의 명성과 이미지가 널리 알려졌을 터였다.
조용히 지켜보던 <서양 철학의 원천>은 길게 자란 수염을 만지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더 하고 싶은 얘기가 많겠지만, 일단 이곳이 어딘지 알아야 하고 돌아갈 길도 찾아야하네.”
잔디 하나조차 자라나지 않은 이곳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죽어 가기 직전의 공간처럼 바닥이나 하늘 어디에서든 정전기가 일어나며, 공간이 부서지는 형태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물조차 없는 곳인가…….”
<천하대장군>은 과거의 배수진을 떠올렸는지 메마른 땅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제국의 제독>과 <불패의 명장>은 바다가 없는 것에 왠지 침울해져서 조용했다.
기운이 빠진 바다의 명장들을 보면서 제갈량은 조용히 다가와 그들을 다독였다.
“바다는 어떤 공간에서도 필요한 생명체의 근원이니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제갈량의 다독이는 말에 두 영웅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건 그렇고. 새로운 손님이 생겼군요.”
제갈공명은 낯선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금발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는 모두가 아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쌍둥이라더니 정말 에어리스 양과 똑 닮았군요.”
그녀는 레다였다.
<천재적인 책략가> 제갈공명은 레다의 행동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간파하겠다는 듯이 냉철한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핏줄이니까요.”
레다 역시 모인 영웅들을 살펴봤는데, 모두가 범상치 않은 실력자들이었다.
각자 발휘하는 아우라의 기운은 결코 평범한 기세가 아니었다.
“이름은 레다, 에어리스의 언니입니다.”
유진하가 대신 소개해 줬다.
“우리의 적은 아니에요.”
“그렇군요. 그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겠습니까?”
천공의 성 바깥에서 대기하던 영웅들은 내부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했다.
유진하는 간결하게 에어리스와 레다, 그리고 난입한 어머니에 대해서 설명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제갈공명은 백우선으로 얼굴을 잠시 가리며 고심에 잠겼다.
“<신멸의 구도자>라는 거군요.”
“신좌들을 제압할 수 있는 실력자입니다. 문제는 지금 에어리스의 육체가 어머니의 손에 있다는 거죠.”
영웅들은 일제히 침묵에 빠졌다.
신화급 성운과 전설급 성운에 대적하기에 모두의 힘은 아직 부족했다.
아득히 먼 저편의 소리 같았다.
“최선을 다해 볼게요.”
항상 호기롭게 앞장섰던 에어리스가 이제 없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필사적으로 싸우던 그녀가 지금은 영혼이 되어 남아 있었다.
“에어리스를 구해야 한다면 나는 어디든 갈 생각이야.”
이소민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
다른 영웅들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마음이었다.
원정대의 리더를 맡은 유진하의 결정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심판관이 출현했습니다.
광활한 하늘에서 빛살처럼 아름다운 오오라가 내려왔다.
그곳에서 강림하는 하나의 존재가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 새로운 심판관으로 등장했습니다.
안내 메시지와 함께 하늘의 빛에 휩싸인 존재는 당당하게 구름 사이에 떠 있었다.
“흐음.”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서양 철학의 원천>은 단숨에 여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올림푸스의 진정한 심판자. 아테나 여신님이군요.”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네요.”
빛에 휩싸인 아테나는 등 뒤에 하얀 날개를 펼치며 구름의 언저리에 머물렀다.
하늘을 바라보던 영웅들은 전쟁의 여신이 발휘하는 아우라와 웅장한 자태에 압도되어 넋을 놓고 바라봤다.
“아까 불가피한 문제가 생겨서 2회전의 심판관이 사라졌죠.”
원래 심판관이었던 헤르메스는 유성하에게 배후를 찔려 차원 문으로 버려졌다.
신좌라서 쉽게 죽지는 않았지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해 잠시 물러났다.
헤르메스의 빈자리를 새로운 올림푸스의 신이 메꾼 셈인데, 무려 아테나가 직접 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정말 심판관 자리를 이어서 온 건가요?”
“그렇게 되었군요.”
유진하의 질문에 <정의와 신념의 여신>은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했다.
“최상위 성운 간에는 합의된 법칙이 있습니다. 심판관이란 역할을 맡았다면 당연히 심판관의 일만 허락되죠. 당신들에게 다른 용무는 없습니다.”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제가 안내하는 것만이 전부라고 대답해 드리죠.”
아테나는 단호했다.
고지식한 면이 있었고 차갑지만 지혜롭기도 한 신화를 가진 여신이었다.
“심판관은 다음 성운전을 선포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성운전은 최상위 성운, 신화급 성운들이 합의한 게임이다.
성운들의 세계도 우리와 비슷하게 국력이 강한 세력이 많은 발언권을 가진다.
마치 최강대국이 세계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듯이, 최상위 신화급 성운들이 결정한 사안은 세계의 법칙이 되었다.
“3회전은 토벌전입니다.”
아테나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우렁차게 들렸다.
“<신멸의 구도자>를 토벌하는 세력이 3회전의 승자가 됩니다.”
유진하는 물론 레다의 눈동자가 크게 일그러졌다.
“뭐?!”
레다의 귀에는 그것이 어머니를 토벌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틀림없는 명령이었다.
에어리스의 영혼도 그 소리를 듣자 가늘게 팔을 떨었다.
“3회전에 참가하는 성운은 총 10곳입니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은 안내를 계속했다.
“3회전 토벌전에 성공한 성운은 전설급 성운의 자격을 얻을 것이며 실패한 성운은 소멸합니다.”
3회전.
심판관 아테나에 의해서 <신멸의 구도자> 토벌령이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