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난입자(8)
초월격은 영원의 영역 아우라 너머에 도달한 힘이었다.
시공간의 경계선마저 휘어 버릴 정도의 파괴력을 발산하기에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힘이었다.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지만, 누군가만 올라갈 수 있는 길도 있다.”
초월격의 발현만으로도 공간 자체가 진동할 정도로 흔들렸다.
폭풍의 눈에 있듯이 시오는 전신에서 강한 초월격의 아우라를 후광처럼 뿜어내기 시작했다.
“초월격이란 신격화에 육박하는, 어쩌면 그것에 맞서 이겨 낼 수 있는 힘이다.”
신적인 존재들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초월 너머의 힘.
초월격은 신좌가 아닌 자들이 극한까지 도달할 수 있는 한계선이자 경계 너머의 영역이었다.
“당신은…….”
유진하의 눈앞에 있는 그녀는 에어리스와 레다의 생모였고.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육신과 영혼까지 스스로 거두려는 어머니였다.
<신멸의 구도자>
초월격의 수식언을 이렇게 받았다는 건, 그만큼 숱한 멸망전을 치러 왔다는 소리였다.
미루어 짐작해도 그녀가 지나온 과거를 알 수 있었다.
유진하가 발산한 빛의 아우라마저 그녀의 기세이 비하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연약할 지경이었다.
‘생각해 본 적 있어? 그 아이들이 왜 나에게서 떠났는지 말이야.’
아까 시오가 했던 그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 아이들은… 날 죽일 힘이 없어서 도망간 거란다.’
질문에는 정답이 있다.
답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제대로 답변을 찾지 못했거나 애초에 질문이 틀렸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전율을 절로 느끼게 하는 힘.
빛의 힘만으로는 초월격에 맞설 수 없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몰아치는 초월격의 기세를 보고서도 침착한 유진하를 보면서, 시오는 처음으로 흥미를 느꼈다.
“당신에게 있어 두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내가 낳은 아이들이지.”
“그것뿐입니까?”
“…….”
정적이 흘렀다.
시오의 입은 다시 움직였다.
“내 옆에 있어야 하는 존재들이기도 하고.”
“…그렇군요.”
유진하가 진짜 묻고 싶은 질문은 따로 있었다.
“당신이 지켜야 할 존재는 아니었습니까?”
“…….”
시오가 내뿜는 초월격의 광활한 힘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졌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지킬 수 없어.”
그녀의 대답이 계속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성운과 공간은 태어나고 멸망하기를 반복하고 있어.”
“당신은 <신멸의 구도자>라고 했습니다.”
“그래, 나는 하나의 성운을 추구해. 그래야만 모든 성운들의 전쟁을 종결시키고 끝낼 수 있으니까.”
<신멸의 구도자>로 각성한 시오에게 설득이란 귓가를 스치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아. 희생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그렇게 할 작정이니까.”
굳건한 의지를 가다듬은 그녀가 귀혼검을 들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공간을 지워 가듯이 초월격의 존재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신의 생각은 알았습니다. <신멸의 구도자>라는 명칭까지 부여받을 정도로 굳건하다는 것을요.”
물론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가 낳은 자매도 같은 생각일 터였다.
“에어리스도 레다도, 당신과는 다른 생각일 겁니다.”
어머니와 자매의 생각은 다르다.
에어리스의 영혼은 육체를 잃고 어딘가에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이 더 있었다.
초대받은 손님은 아니지만 불청객도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이며 어쩌면 벌써 왔어야 하는 자이기도 했다.
‘유성하가 왔다면… 항상 같이 다니는 그녀도 왔을 거야.’
최상층에서 순간적으로 광대한 빛이 번쩍였다.
“<별자리에서 태어난 자>. 그 아이구나.”
배후에 별자리를 발현하는 사람.
시오 역시 간절하게 찾던 아이였다.
“오랜만이네요, 어머니.”
“너와 만나기를 기다렸어.”
에어리스의 쌍둥이 언니, 레다가 강대한 아우라를 머금은 채로 나타났다.
오랜만에 만난 모녀는 서로 매섭게 치솟는 기세를 뿜어내며 가볍게 안부를 나누었다.
반가운 인사는 아니었다.
“그 검은 너의 것이 아니야.”
레다는 얇고 긴 장검을 쥐고 있었는데, 시오가 가진 귀혼검과 검날의 색만 다를 뿐 외형이 복제품처럼 똑같았다.
“둘 다 내 것이었어. 너희 쌍둥이처럼…….”
시오의 말에는 가시가 담겨 있었다.
저 의미는 구속에 가까웠다.
“우리는 당신에게 다시는 잡히지 않아요.”
“너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은인에게 할 말은 아니구나.”
시오는 어머니의 자격으로 타이르듯이 나긋하면서도 단호한 어투로 꾸짖었다.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그녀가 쥔 귀혼검의 검 끝이 어느새 레다를 겨누고 있었으니까.
“이제 너희를 데려갈 시간이야.”
초월격이 더 강렬하게 치솟았다.
분노의 기세와는 달랐고 열의에 찬 듯이 더 깊어진 듯한 기세였다.
장검을 움켜쥔 레다는 그 압도적인 기세에 밀리지 않았다.
“내 검은 생환검. 당신의 귀혼검과 쌍둥이처럼 얽힌 운명으로 만들어진 검이에요.”
마치 에어리스와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어머니는 쌍둥이 자매에게 생환검과 귀혼검을 선물로 주었고, 그들이 떠나자 이제는 돌려받을 유물로 여겼다.
나의 검.
어쩌면 우리의 검이었다.
깨져 버린 모성애처럼.
사라진 모녀의 고리처럼.
두 개의 쌍둥이 검은 차갑게 서로를 겨냥하고 있었다.
“<별자리에서 태어난 자>로는 내 초월격을 받아 낼 순 없어.”
“걱정해 주는 건가요?”
“너를 죽이려는 게 아니니까.”
대화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오랜만에 재회한 모녀의 대화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냉랭했다.
“사로잡을 거야. 다치지 않게 조심했으면 하지만, 그건 너 하기 나름이겠지.”
경고였다.
까딱하면 칼날이 베어 버릴 수도 있으니 무리하지 말라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귀혼검이 허공을 갈랐다.
지잉.
마치 검이 우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면서 검날이 닿은 곳마다 깔끔하게 갈라졌다.
시공간이 갈라지며 드러나는 외부 공간마저 잘라 버리자 하얀 공간이 드러났다.
“공간 너머의 외부를 가르면 백지상태의 세계만이 남아.”
백화 상태를 의미했다.
태초에 비어 버린 세계가 나오면서 희멀건 하얀 액체가 흘러내리듯이 나타났다.
마치 새하얀 피를 흘리듯이 공간은 상처를 입었다.
“<신멸의 구도자>라 불리는 당신다운 검격입니다.”
레다는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신음하듯이 흔들리는 공간 속에 버티고 있었다.
귀혼검을 어깨에 걸친 시오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다음에는 너를 벨 거야.”
확실한 경고였다.
웬만한 신좌들과 전면전이 가능한 시오의 힘은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별자리에서 태어난 자>의 아우라를 발휘한 레다조차도 <신멸의 구도자>의 초월격에 대적할 수준은 아니었다.
“…….”
레다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아는 어머니는 결코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하겠어.”
검 끝은 정확히 레다를 겨누었다.
생환검을 가진 레다였으나 두 사람의 격차가 너무 컸기에 큰 의미는 없었다.
“…….”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유진하는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저 초월좌에 대적할 수 있는 멤버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아직 제 얘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정면 승부에서 그렇다는 소리였다.
이곳은 2회전이었고 게임의 룰에 해당한다.
<빛을 초월하는 자>
빛을 넘어서는 속도라면 절대 쉽게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목표는 하나.’
섬광처럼 치솟아 가던 유진하가 한곳으로 향했다.
목표는 귀혼검을 들고 고고한 자세로 버틴 시오가 아니었다.
최상층의 왕좌.
이곳에 앉으면 2회전은 끝난다.
동시에 천공의 성을 차지한 성주가 된다.
이 성의 권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너는?”
시오는 순간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성주가 된다면 천공의 성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권한을 가지게 된다.
누구든 초대할 수 있고.
누구든 추방할 수 있다.
위기감을 느낀 시오가 그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궤적을 따라 공간이 베어졌고 하얀 액체가 흘러내렸다.
검 끝이 왕좌를 겨냥했기에 왕자에서 하얀 눈물이 흩뿌리듯이 번져 나가는 듯했다.
만약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면 반드시 목이 달아났을 터였다.
“이건?!”
하지만 왕좌에는 앉은 사람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유진하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
초월좌의 검을 얕봤다면 반드시 죽었다.
그래서 유진하는 2회전의 통과 조건인 왕좌에 앉지 않고 그 의자의 뒤편에 있었다.
‘바라던 기회.’
사실 유진하는 처음부터 왕좌에 앉을 계획도 없었다.
빛나는 황금 의자는 아름다운 족쇄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왕좌에 앉으면 성주가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의 규칙이 숨어 있었다.
‘천공의 성은 살아 있는 공간이야.’
이 성의 주인이 되면 성운전에 얽매이는 몸이 된다.
뱀파이어 이전에도 주인이 있었고, 새로운 주인을 찾는 게임을 반복할 것이다.
왕좌는 족쇄였다.
벗어날 수 없는 게임의 부속품이 된다.
‘이곳은 2회전을 수행하는 무대야. 왕좌는 그 운명을 반복하도록 만드는 함정이고…….’
유진하는 함정에 걸리지 않았다.
자신과 싸웠던 거인족들의 운명이 떠올랐다.
성운전에 얽매인 거인족은 끝내 쇠락했고, 1회전만 전전하다가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다.
‘그런 운명을 왜 받아야 하는가.’
유진하는 전신의 아우라를 완연히 발산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배후에 발현된 빛의 원형체가 무지개 빛깔처럼 뿜어졌고, 광활한 에너지가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왕좌를 부순다.’
이 저주받은 왕좌.
누구도 이런 운명에 휘말리지 않도록.
저주받은 성을 남김없이 날려야 했다.
콰앙!
한 줄기 빛이 왕좌의 등받이를 깨부쉈다.
그 충격을 받은 왕좌는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갈라지며 완전히 부서졌고, 조각조각 나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잔해 속에서 유진하는 우두커니 있었다.
“너는…….”
잔해 너머에는 시오가 보였다.
그녀는 조금은 놀란 듯하더니 이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알 수 없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유진하와 시오는 서로를 경계하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툭.
왕좌의 조각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시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왕좌를 바라보면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난입자는 게임의 규칙에 서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성주가 될 수 없었지.”
“당신도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진짜 성주가 된다는 의미에 대해서.”
“…맞아.”
시오는 부정하지 않았다.
성운전은 신좌들의 여흥이자 길들이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기에, 그들을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
규칙도 목적도 믿지 않는다.
쿠궁!
왕좌가 사라지자 성은 존재 가치를 잃었다.
존재의 의미를 잃은 공간처럼 붕괴를 시작했다.
천장과 바닥, 벽이 무너져 내렸다.
“이곳은 사라질 거야.”
시오는 허공에 뜬 에어리스에게 다가가 품에 안으며, 순식간에 유진하마저 지나쳤다.
그 짧은 순간.
시오는 한마디 말을 남겼다.
“내 공간으로 넘어와라.”
에어리스를 안은 그녀가 손을 들어 차원 문을 소환했다.
“이 아이의 영혼을 데리고 와라. 기다리고 있겠어.”
에어리스의 육신을 가져가는 대신 영혼을 데려오라고 요구했다.
마지막 말이었다.
쿠구구궁!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가는 성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왕좌를 무너뜨리는 숨겨진 룰이 달성되었습니다. 해당 성운은 2회전을 통과했습니다.
-남은 시간 안에 본래의 성운으로 돌아가십시오. 빠져나가지 못한 존재는 소멸합니다.
무너지는 성의 공간 속에는 생존자만이 남아 있었다.
부서지는 공간과 어두운 하늘 속에서 여명처럼 빛나는 햇살이 쏟아지는 순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던 유진하는 이제 앞으로의 길을 깨달았다.
“함께 찾으러 가요.”
옆에 있던 레다가 움찔했다.
유진하는 비어 버린 하늘 너머를 강하게 응시했다.
“에어리스와 당신의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