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난입자(7)
“너는 누구냐?”
최상층의 왕좌에 앉은 그녀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기다리던 사람은 푸른 갑옷의 기사 시리안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인간이 나타나자 경계심을 내보였다.
“당신은……?”
“내가 먼저 물었어.”
백금발의 여자가 차가운 숨결을 내뿜으면서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왕좌에 앉아 다리를 꼬고 턱을 괴고 있었으나 다른 손은 장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기다란 검은 옆으로 누워 있듯이 자리했지만, 언제라도 앞을 겨누고 피를 묻힐 분위기를 가졌다.
“저는… 유진하라고 합니다.”
그 이름을 곱씹으면서 시오는 차분한 눈매로 돌아왔다.
아까처럼 격렬한 적의는 조금 누그러든 모양이지만 절대로 방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요?”
“…시오.”
“그 검술의 주인이었군요.”
기억을 잃은 에어리스가 엄청난 검술을 발휘할 적에 무심코 반사적으로 내뱉었던 말이었다.
시오류.
그것은 시오라는 검의 대가가 만든 검술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참가자라면 이 왕좌를 차지해야겠지.”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2회전의 난입자입니다.”
유진하는 차분하게 응답했다.
난입자는 성운전의 참가자가 아니기 때문에 규칙에 적용받지 않는다.
그녀에게 왕좌는 의미가 없었다.
“이 자리를 양보하길 원해?”
시오가 턱에 손을 괸 채로 여유를 부렸다.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고혹적인 자태를 뿜어냈으나, 몸에서 풍기는 오오라는 가시처럼 날카로워 아름다운 꽃잎과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장미 같았다.
“당신에게 필요 없는 자리입니다.”
“그건 아니야. 왕좌의 자리를 차지하면 이 성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
“이 성이 필요한가요?”
“그건 아니지.”
허공에서 맴도는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해.”
“에어리스를 찾기 위해서인가요?”
“아델리카는 내가 그 아이에게 지어 준 이름이야.”
“…….”
시간이 멈춘 듯 침묵이 흐르고, 고요한 숨소리만 들렸다.
“당신이… 에어리스의 어머니였군요.”
“그래.”
“검의 스승이기도 했고요.”
“맞아.”
최상층은 핏물로 뒤덮여 있어서 걸을 때마다 질척거렸다.
“당신의 검이 뱀파이어를 몰살시킨 거네요.”
성에 가득한 뱀파이어를 혼자서 처리한 것이 확실했다.
“전설급 성운의 존재들로는 내 상대가 될 수 없어.”
“목적이 뭔가요?”
“네가 에어리스라고 부르는 아이를 데려가는 거야.”
“데려가서는요?”
“내가 누구도 닿지 못할 곳으로 올라간 후 내 옆을 보좌하게 할 거야.”
성운의 가장 높은 자리를 원한다.
거기까지 도달해서 모든 결말을 스스로 정할 생각이었다.
“성운전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학살. 무의미하게 소멸되는 존재들. 그 절망스러운 영원한 싸움을 이제는 끝내야 해.”
“성운전의 종결을 원하는 거군요.”
“맞아.”
거대하고도 거창한 목표였다.
종결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했다.
“신화급 성운과 전설급 성운은 그들만의 규칙을 만들어 법칙으로 제정했다. 성운전은 그들이 합의한 결과에 불과해.”
시오는 선언했다.
“나는 성운전의 법칙을 전부 깨 버릴 거야. 녀석들의 유희와 굴레를 모조리 벗어 버릴 거고.”
성운전은 신적인 존재들이 만든 영원한 굴레였다.
그녀는 이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법칙을 전부 부정하고 있었다.
“그걸 깨뜨려야만 해.”
시오의 결심은 굳건했다.
강자가 만든 법칙은 게임의 규칙처럼 억누르고 억압했다.
“성운전을 깨부수고 하나의 성운으로 통합시키겠다는 거군요.”
“영원한 성운전의 법칙. 본질은 전쟁과도 같지. 이 살육전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내가 만들 거야.”
시간은 짧게 흘러갔다.
분노가 절절히 담긴 시오의 결의는 충분히 전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옳은 방식일까.
“그래서… 에어리스는 당신에게 무엇인가요? 사용하는 도구입니까?”
목적을 위한 수단이 정당한 건가.
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딸을 향한 물음이었으나, 떳떳이 대답할 수 없었다.
“에어리스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아나요?”
“…….”
오랜만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게 뭐지?”
왕좌에 기대어 누웠던 자세도 고쳐 앉았고 꼬았던 다리도 풀었다.
생각에 잠긴 눈빛을 머금으며 그윽하게 쳐다봤다.
어서 대답하라는 듯이 재촉했다.
“그 아이가 좋아하는 건 뭐지?”
“…저를 이기면 알려 드릴게요.”
어떠한 대의명분을 가졌든.
무한에 가까운 책임감과 지치지 않는 사명감을 가졌다고 해도, 자신의 행위가 전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가 대체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나로 되는 성운. 그럼 그 안에 있던 다른 생명체와 존재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들의 능력에 달린 일이지.”
“멸망하거나 소멸당하겠군요.”
짧은 한숨을 토해 낸 후에 유진하는 온몸에 서리는 빛의 기운을 느꼈다.
빛은 밝으면서 따스했고 모두에게 이 따스함을 전했다.
시오가 다시 차갑게 유진하를 쳐다봤다.
“희생은 어쩔 수 없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평행선을 달리듯이 두 사람의 가치관은 달랐다.
“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그녀가 든 장검이 서서히 정면을 향하기 시작했다.
검날에는 오오라가 감돌았고, 희미하게 감돌던 기운이 차츰 거세게 휘어지더니 번개처럼 강해졌다.
“죽은 자의 검…….”
검기의 흐름은 요기처럼 변하더니, 바닥에 뿌려진 핏물을 향해 뻗어나갔다.
쿠구구구.
피로 태어나 피로 죽은 존재인 뱀파이어가 다시 핏빛으로 물든 바닥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귀혼검의 주술에 걸린 뱀파이어들은 이전의 모습이었지만 미묘하게 형태가 달랐다.
이마나 어깨, 목 같은 신체 부위에 하나씩 낙인이 박혀 있었고, 발휘하는 기운은 불길하게 흔들렸다.
“죽은 자를 부리는 검…….”
검의 주인이 중얼거렸다.
휘날리는 백금발의 머릿결 속에서 왕좌에 앉은 그녀가 눈빛을 번뜩이며 노려봤다.
“이 검에 죽은 자는 내 명령에 따르지.”
-귀혼검.
검에 죽은 존재를 불러내어 명령을 내린다.
죽은 자를 부리는 귀혼검의 능력에 따라, 죽었던 뱀파이어들은 일제히 부활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크로맨서의 검.’
혼령과 대화를 하는 주술사.
그들의 주문에는 죽은 자를 수하로 부리는 힘이 있었기에, 피로 물든 뱀파이어가 부활하여 사방을 포위하듯이 둘러쌓다.
“이게 당신의 대답입니까?”
“내 결단은 바뀐 적이 없어.”
피의 꽃처럼 무수하게 피어난 뱀파이어들이 집단을 이루자, 죽은 자의 검을 쥔 시오는 왕좌에 앉아서 차분하게 대응했다.
굳이 일어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다시 다리를 꼬아서 앉았고, 왕좌의 팔걸이에 팔을 올려놨다.
죽은 자를 바라는 검.
산 자를 증오하는 검.
천공의 성 최상층은 죽은 뱀파이어들의 세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자욱한 피의 안개가 서려 왔고, 불온한 공기가 가득했다.
어둡고 음침한 곳으로 변해 가는 이곳에서 하나의 태양이 차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
찬란하게 뻗어 나가는 빛의 창살들이 원형을 이루어 유진하의 배후에 발현되었다.
어두운 성에 한 줄기 빛이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영원의 영역에서 빛의 한계를 넘어서 고유 특성을 계속 발전시켰다.
피에 맞선 빛.
하지만 핏물은 진했다.
뱀파이어는 수많은 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전설급 성운의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악명처럼 세상에 넓게 퍼져 나갔다.
죽어서 부활한 자의 전설.
그들은 피로 태어났다가 피로 죽는다.
저 피에 닿으면 죽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근접전은 피한다.’
이전 싸움으로 뱀파이어가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피로 이뤄진 그들은 핏빛의 줄기가 되어 빛을 뒤쫓기 시작했으나 따라잡지는 못했다.
쫓고 쫓기는 빛과 피.
팽팽한 속도전.
무수하게 뻗어 가는 손아귀처럼 핏물의 줄기가 하나의 빛을 쫓았다.
뒤쫓기던 빛줄기는 공중에서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목적지는 저기…….’
내려가는 빛의 어귀에는 왕좌에 앉아 귀혼검을 쥔 그녀가 보였다.
그때, 그녀의 얼굴이 고개를 들어 똑바로 바라봤다.
파앗!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검날의 끝이 유진하의 목을 겨누었다.
시오는 공중에 멈춘 유진하를 정확히 귀혼검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내려왔다가는 검에 꿰뚫렸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
동시에 충격파가 두 사람 사이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유진하는 퍼뜩 깨달았다.
‘…나를 봤다.’
시오의 눈동자는 처음부터 모든 행동을 보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눈빛이었다.
“…….”
그 짧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칠 즈음, 뒤편에 쫓아오던 핏빛의 줄기들이 유진하의 등 뒤로 무수히 내리꽂혔다.
그 순간, 섬광이 번쩍였다.
빛의 속도로 움직인 유진하는 뒤에서 오는 핏줄기를 회피했다.
가속도를 줄일 수 없던 핏물은 유진하를 놓치는 바람에 그대로 나아가서 왕좌로 향했다.
그곳에 앉은 시오에게 작렬했다.
콰과과광!
최상층에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부서지는 파편과 조각 속에서 먼지가 가득 차올랐다.
후우욱.
호흡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희뿌연 잔해 속에서 걸어 나왔다.
“제법이구나.”
가느다랗게 뻗어 나간 귀혼검을 쥔 시오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죽은 뱀파이어를 나에게 충돌시키려고 하다니. 훌륭한 판단이었어.”
어딘가 소름이 끼치는 말투였다.
창살처럼 뻗어 나간 빛의 원형체를 배후에 둔 유진하가 건너편에 살짝 떠오른 채로 대기했다.
“에어리스한테도 그렇게 말했나요?”
“그 아이는 내 아이들이야.”
“당신이 어머니라고 해서 모든 걸 결정할 권한은 없습니다.”
“아까부터 그 애와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시오는 살벌한 눈매로 쳐다봤다.
여유가 넘치던 표정에서 분노와 경멸이 가득 찬 표정으로 변해갔고, 왕좌에 앉아서 여유를 부리던 모습도 사라졌다.
“그 아이들은 내 결정에 따르지 않았어.”
끝나지 않은 악몽.
기나긴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그녀의 표정은 차츰 일그러져 갔다.
영혼을 잃은 에어리스 육체는 공중에 뜬 채로 허공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더니 시오가 슬픈 눈빛을 머금었다.
“상대해 줄게.”
찰나의 순간이었다.
파아앗!
순식간에 나아간 검의 파동은 유진하가 배후에 발휘한 빛의 원형체를 일격에 베어 버렸다.
보고도 반응하지 못할 검의 궤적이었다.
툭.
부서지는 원형체의 아우라를 보면서 유진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힘은 영원의 영역에서 싸울 수준이 아니었다.
<검기의 화신>
그 아우라의 힘은 초월격에 해당하는 파괴력에 도달하고 있었다.
“생각해 본 적 있어?”
시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아이들이 왜 나에게서 떠났는지 말이야.”
“…….”
그녀가 속삭였다.
“간단한 거야. 그 아이들은 날 죽일 힘이 없어서 도망간 거란다.”
진심이 서린 말이었다.
그 한마디와 동시에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아우라가 격정적인 빛으로 발현되었다.
“똑똑히 알려 주지. 왜 그 아이들이 그렇게 도망갔는지.”
그녀를 지칭하는 명칭은 하나가 아니었다.
이름은 시오.
하지만 더 유명했던 그녀의 수식언은 따로 있었다.
<신멸의 구도자>
초월격의 아우라로 발휘된 힘이 시오의 전신에 오롯이 치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