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난입자(6)
시계탑에서의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는 동안, 도서관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에어리스와 난입자의 대결이 벌어져서 난장판이 되었지만, 도서관의 천장에는 숨겨진 다락방이 있었다.
그곳에는 사색을 즐기는 존재가 살고 있었는데, 희끗희끗한 머리에 갈색빛의 긴 가운을 입은 노인이었다.
“또 한바탕 지나갔구먼.”
꼭대기의 비좁은 다락방에서 노인은 오랜만에 외출하듯이 잠시 나와 있었다.
빗자루와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있더니, 망가진 책장과 책들이 널브러진 도서관의 로비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정말 없다니.”
푸념하듯이 한숨을 토해 낸 노인은 껄껄거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별수 없는 거지.”
손에 든 빗자루는 보통 물건이 아니었는데, 가벼운 기운이 서려 있어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원상복구를 해 볼까.”
가볍게 빗자루를 쓸자 부서졌던 책장과 책들이 마치 시간을 되감듯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노인은 도서관의 관리인이었다.
천장의 다락방에 서식하며 도서관의 모든 관리를 맡았다.
“자, 됐다.”
말끔하게 복구된 책장들을 보자 노인은 그제야 허리를 쭉 폈다.
빗자루를 잠시 내려놓고 다락방에서 가져온 책 한 권을 책장의 빈 곳에 끼워 넣었다.
“반납도 했고. 이제 조용해졌구먼.”
도서관은 원래 침묵하고 사색에 잠기는 곳이었다.
시끌벅적한 곳에서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주로 다락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다가 다시 내려와서 빗자루를 쓰는 하루를 보낸다면 만족이었다.
그때, 정적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할아버지.”
맑고 명랑한 목소리의 한 여자가 다가왔다.
갈색 단발머리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모험가처럼 보이는 여성이 어느새 다가와 노인의 뒤에 있었다.
“아직도 있었나?”
노인은 한숨을 내쉬면서 낯선 여자를 돌아봤다.
“자네는 이번 2회전의 참가자인가?”
“네, 이소민이라고 해요.”
이소민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머금으며 할아버지의 곁에 다가왔다.
그 움직임은 일순간 상대의 경계심을 풀어 버릴 만큼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내게 용건이 있는가. 그런데 여기는 조용함이 원칙인 곳일세.”
“죄송해요. 그럼 다른 곳에서 이야기할까요?”
“내 다락방이 있네. 그곳으로 가지.”
자신의 말을 넉살 좋게 받아 준 이소민을 본 노인은 그저 허허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긴 사다리가 끝없이 높게 올라가 도서관의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후아, 엄청 높네.”
긴 사다리를 타고 한 발 한 발 올라간 이소민은 숨을 헐떡이며 한숨을 토해 냈다.
사다리가 너무 길었고 천장이 정말 높았다.
오히려 할아버지는 지친 기색도 없이 도서관 천장에 도달하여 다락방의 문을 열었다.
“내가 머무는 다락방이지. 전용 서재라고도 할 수 있네.”
“우와, 깔끔하네요.”
책이 두서없이 널려 있기는 했지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곳이었다.
곳곳에 촛불이 켜지자 책상에 있는 무수한 책들이 보였다.
“그래, 여기서는 얘기를 나눠도 괜찮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나?”
“할아버지한테 물건을 사려고 왔어요.”
“물건을 사겠다고.”
이소민은 가방에서 금화를 꺼내어 양손에 가득 담아 들었다.
괴물들의 파편 속에서 열심히 주워 담은 것과 동료들의 금화까지 전부 받아 온 거였다.
그 양은 십만 금화에 육박했다.
“대단한 양을 모았군.”
“모두가 모은 걸 제가 다 받아 온 거거든요.”
이소민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금화를 바라봤다.
모두가 모아 온 금화는 한 사람에게 맡겨졌는데, 유진하는 적격자로 이소민을 선택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소민 누나는 가장 돈을 잘 모으니까요.’라는 아주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유진하 이 녀석. 내가 돈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돈벌레는 아니라고.’
그런 불만이 있었으나 어쨌든 금화는 전부 챙겨 넣었다.
짤랑짤랑 동전 소리는 사실 듣기에도 좋으니까.
“도서관에 할아버지가 있을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누가 그랬지?”
“유진하라고. 머리가 좀 비상한 녀석이 있어요.”
“흐음, 어떻게 날 알아냈으려나.”
이번 2회전에는 금화가 있었기에 유진하는 반드시 동전을 사용할 곳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처음 천공의 성에 입장했을 때부터 금화를 거래할 곳이 어딘지 생각했는데, 성을 돌아다니다 보니 도서관 어귀일 거라고 추측했다.
“이 성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물건이 있는 곳이 도서관이라고 그랬거든요.”
“허허, 그 친구는 책의 가치를 잘 아는가 보네.”
노인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면서 다락방의 책상에 돌아가 앉았다.
바쁜 와중에도 유진하는 이소민에게 굳이 도서관을 들러서 특별한 물건을 사라고 시켰다.
왜 심부름을 시키냐고 투덜거렸으나, 인질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어 순순히 들어 줬다.
“좋아, 원하는 물건을 팔아 주지.”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자네는 뭘 사고 싶은 건가?”
“첫 번째는 안경이에요.”
“안경?”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책을 볼 때마다 돋보기안경을 끼는데 세상이 훤히 보일 만큼 편한 물건이었다.
“이건 좀… 내가 눈이 잘 안 보여서 쓰는 건데.”
“5만 금화면 어때요?”
할아버지는 고민이 되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소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양손에 가득 담은 금화를 전부 책상에 내려놓았다.
쩔그렁.
금화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책상을 가득 메웠다.
금빛의 동전으로 인해 주변이 더 밝아졌고, 그 금빛 자태는 매혹적인 모습이라 노인의 눈길을 끌었다.
“안경은 여분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노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책상에 있는 안경을 손에 쥐었다.
냉큼 안경을 써 보자 천리안을 낀 듯이 훤히 보였다.
이것만 있으면 에어리스 영혼이 성의 어디에 숨었는지 찾아낼 수 있다.
“다음에는 또 뭘 원하는가?”
“사고 싶은 건 여기 도서관에 있는 책이에요.”
“책이라면……?”
“제목을 불러 드릴게요.”
이소민은 호흡을 가다듬더니 그 책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책의 제목은 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 2권이예요.”
* * *
시계탑에서는 둔탁한 병기가 맞부딪쳤다.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톱니바퀴가 부서져 파편이 튀어나왔다.
“칫!”
조커는 빠른 속도로 시계탑의 톱니바퀴 사이를 이리저리 오갔다.
상대는 시리안.
냉기의 아우라를 뿜어내며 빙열검을 휘두르는 강자였다.
“훌륭하다.”
치고받는 칼날 속에서 번개가 튀어나왔다.
검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흐름 속에서 조커의 눈매는 단검보다 더 날카로웠다.
“특이한 전투 방식이군.”
조커는 상체를 숙이고 두 팔을 벌려 자유자재로 쌍단검을 휘둘렀다.
사거리가 짧은 단검을 사용하는 대신에 현란한 움직임으로 몰아붙이는 스타일이었다.
‘단독이 어울리는 전투법이다.’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벽을 박차기도 하고, 높게 뛰었다가 낮게 파고들기도 했다.
휘황찬란한 예측 불허의 움직임 탓에 주변에 동료를 두지 않는 편이 더 좋은 전투 방식이었다.
“나와 다르지만 비슷하다.”
푸른 아우라를 머금은 시리안은 빙열검을 움켜쥐었다.
정통 기사인 검술가 시리안.
은밀한 암살자인 검무가 조커.
서로 검을 주고받으며 격렬한 불꽃이 튀도록 격돌했다.
정반합 같은 둘의 검술 대결은 전투 중인 서로의 입가에 미소를 떠오르게 했다.
“너는 혼자이다.”
시리안이 중얼거렸다.
“네가 혼자겠지.”
조커는 대답했다.
사방에 가득한 톱니바퀴 속을 움직이던 시리안은 눈빛을 번뜩였다.
다시 소리쳤다.
“나는 혼자이고 너도 혼자이다.”
“아니.”
조커는 단검을 거두어 물러나더니 정색하듯이 답변했다.
“너는 혼자이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조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단숨에 발휘된 아우라가 순식간에 상대를 몰아치듯이 다가갔다.
일격으로 시리안의 가슴을 베었다.
“큭!”
시리안은 가슴에 생긴 상처를 손으로 잡았다.
마치 과거의 그때처럼.
에어리스와 레다 자매와 만났던 그때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녀들은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스승이자 어머니였던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받았고 모든 것을 배웠으나 결국 떠났다고 했다.
“하나의 성운으로 통일하겠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어요.”
따르지 않는 자들은 멸절을 시켜서라도 복종시키겠다.
영원한 성운들의 싸움.
그것이 성운전의 본질이기에 하나의 성운으로 통일시켜야만 끝난다고 믿었기에.
시오라는 이름의 그녀.
레다와 에어리스의 어머니이자 스승이었던 그 사람에게서 떠났다고 그랬다.
두 사람은 다른 소원이 있었다.
“우리는 성운전에서 모두를 구해 내는 길을 원해요.”
하나의 성운으로 통일시킨다면 문제는 해결되지만, 다른 성운을 전부 멸망시킨다는 점에서 굉장히 폭압적이었다.
무수한 성운이 소멸할 것이고.
수많은 생명체들이 죽을 거였다.
결과를 위해서 과정을 희생하는 방법이었다.
그 과정에서 죽어 가는 자들은 아무 죄도 없었고, 그런 절망을 자신의 가치관과 사명감으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이자 스승이었지만 그것을 막아야 했어요.”
레다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옆에서 수줍은 얼굴로 있던 에어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갑옷을 입은 시리안은 두 사람을 믿었다.
아름다운 백금발의 그녀.
모두를 지키겠다는 그 말을 철썩 같이 신뢰하고 의지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시리안이 있던 성운은 멸망했다.
“너에겐 동료가 있다는 건가? 필요하면 옆에 있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리는 게 동료인가.”
레다와 에어리스는 과거에 시리안과 힘을 합쳐 시련을 맞섰다.
동료였다.
함께 싸웠고.
함께 결의를 다졌으며.
결국에는 함께 패배했다.
성운이 멸망하는 순간.
자매는 떠났고 시리안은 혼자 무너져 가는 공간에 남았다.
죽어 가는 세계를 구원하지 못하는 운명 속에 시리안은 절망감과 배신감에 빠지며 죽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때 한 번 죽었다.’
마음이 완전히 죽었고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믿음이 죽었다.”
시리안은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그날 이후로 죽음 속에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 절망을 삶의 양분으로 삼았다.
“신뢰가 죽은 거군.”
상체를 숙인 조커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바닥을 살피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건 너만 죽은 거야.”
“뭐라고?”
상체를 베인 시리안은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비통함을 토해 냈다.
“오로지 너만 죽은 거라는 거지. 신뢰가 죽고 불신만 남은 껍데기가 되었다는 거다.”
냉정한 대답이었다.
시리안의 가슴에 베인 상처는 더 벌어지고 있었다.
“먼저 동료에 대한 마음을 버린 쪽은 그쪽일까? 아니면 너일까?”
서서히 상체를 일으킨 조커는 쌍단검을 든 채로 천천히 아우라를 발휘했다.
치솟아 오르는 아우라의 기세 속에서 주변의 톱니바퀴는 더 버티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콰과광!
무너지는 톱니바퀴와 시계탑의 파편 속에 조커와 시리안이 있었다.
<십자군의 사자왕>은 거대한 빙하의 기사와 맞서 도끼를 휘두르며 격렬하게 맞서고 있었다.
전투의 끝.
이미 무너지는 시계탑.
조커의 단검이 시리안을 연속해서 베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베는 기분이다. 가장 불쾌한 상황이야.”
믿음에 배반을 당한다는 것.
아무도 믿지 않으면 홀로 남는다.
시리안은 고독한 기사였다.
무너지는 톱니바퀴 속에서 사자심왕도 거대한 빙하의 기사를 도끼로 마침내 으깨버리고 당당하게 남았다.
시계탑은 완전히 붕괴했다.
무너지는 파편 속에 전투에서 패배한 시리안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제 이곳은 시계의 폐허이자 자신의 무덤이 될 터였다.
“일어나라.”
조커는 시리안의 육체를 들쳐 메고 걸어갔다.
무너지는 톱니바퀴 조각 속에 공중에는 시계탑의 종이 붕괴됐다.
커다란 종이 땅에 처박히며 육중한 진동이 퍼져나갔다.
시리안은 힘겹게 중얼거렸다.
“왜?”
조커가 대답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시리안을 업은 조커는 부서지는 시계탑에서 빠져나왔다.
“만약 너를 만나면 죽음에서 구해 달라고 부탁받았지.”
“누구에게?”
“에어리스다.”
시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그녀에게 배신당했다고 믿었는데 목숨을 구명 받아 살아남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배회하고 다녔을까.’
멸망의 모든 원인이 레다와 에어리스에게 있다고 믿었는데 그들은 달랐다.
부서지는 시계탑의 내부에서 모두가 빠져나왔다.
“후우.”
조커와 사자심왕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성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대결은 잔해더미와 함께 조금씩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성의 최상부에 유진하가 도착했다.
에어리스의 육신은 허공에 뜬 채로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 옆의 왕좌에는 한 사람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냐?”
에어리스의 스승이자 어머니인 여자가 왕좌에 앉아서 턱에 손을 괸 채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시오라는 이름을 가진 자.
그녀의 눈빛은 증오를 품으며 눈앞의 모든 존재를 경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