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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63화 (163/229)

163화 난입자(5)

시계탑의 방에는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시리안은 어두운 방에서 상대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너는?”

나온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백가면을 쓴 조커와 육중한 도끼를 쥔 <십자군의 사자왕>이 있었다.

“모르는 녀석들이군.”

시리안은 묵묵히 상대를 바라봤다.

어차피 그가 아는 사람은 에어리스와 유진하뿐이었다.

과거에 빙룡과 함께 두 번이나 맞섰던 상대였고, 이번에 다시 만나 예전의 빚을 갚아 줄 기회라고 여겼는데 보이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은 다른 일이 있지.”

조커가 중얼거렸다.

에어리스의 영혼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에 조커와 사자심왕 두 사람이 시리안의 상대를 맡기로 했다.

“어차피 방해가 된다면 전부 죽일 생각이었다.”

차가운 서리의 기운을 발휘하는 검을 꺼낸 시리안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기가 서릴 듯 날카로운 오오라를 내뿜으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침없이 다가왔다.

“…….”

조커는 상대의 실력을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지금은 자리에 없는 유진하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상대입니다.’

단호한 말투였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적이라고.

유진하가 이렇게 단언한 적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말은 묘하게 자극적이어서 조커의 흥미를 강하게 끌었고 투지마저 불러일으켰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는… 붙어 보면 알겠지.’

양손에 단검을 움켜쥔 조커는 얼음의 오오라를 발산하는 시리안을 강하게 응시했다.

‘어차피 싸워서 죽을 운명.’

어릴 적부터 이런 죽음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익숙해졌다.

피 냄새에 점점 익숙해지고, 상처를 입어도 무덤덤해질 적에 언젠가는 이러다 죽을 거라 짐작했다.

‘전투 속에서 죽으리라.’

실제로 관문의 문지기에게 죽기도 했다.

“그쪽은 혼자 싸울 생각인가?”

<십자군의 사자왕>은 근엄한 자세로 도끼를 든 채 조커에게 말을 걸었다.

조커는 백가면을 손으로 만지며 전투 의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나는 일대일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그 마음이 이해는 가는군.”

사자심왕은 조커의 투쟁적인 의지를 높게 평가했다.

“정예군이라면 정신적인 자세가 중요하지. 다만, 통솔적인 측면에서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으니 자네 같은 사람은 전장을 보내야겠어.”

“후후, 군대처럼 생각하는군요.”

“당연하지.”

정색하듯이 고개를 돌린 사자심왕이 어깨에 도끼를 들쳐 멨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거나, 프랑스 왕국 혹은 왕좌를 노리는 동생과 싸운 왕이었다.

전투는 물론 전쟁에는 잔뼈가 굵은 실력자였다.

“전투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이네. 전력이 강하다고 무조건 이기는 것은 아니지.”

“일대일에서는 전투력이 강한 쪽이 훨씬 유리하죠.”

“그걸 부정하지는 않네만 지금은 전투가 아니라 전쟁이라고 봐야 하네.”

사자심왕은 도끼를 움켜쥐고 건너편에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시리안을 쳐다봤다.

이미 그의 근방에는 얼어붙은 자국이 늘어 가고 있었다.

“리더가 우리 둘을 남겨 둔 이유가 있을 테니까. 개인 취향은 잠시 미루고 함께 싸우는 편이 낫겠지.”

“…그럼 시간을 정해 두고 승부를 보겠습니다.”

조커는 한발 물러났다.

여기서 사자심왕과 아웅다웅 더 다퉈 봤자 이로울 게 없었고 승부에서 불리해질 수도 있었다.

“3분 주겠네.”

사자심왕은 순순히 허락했다.

조커의 전투 방식에 대해서는 자신이 사후 세계에서 부활하기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조커의 전투에는 나름의 운율이 있고 본인만의 흐름이 있었다.

‘승리를 위한 싸움에 심취하는 자.’

한마디로 일컬으면 그랬다.

단검을 기본으로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가진 그는 전투 중에도 성장하는 자였다.

천재적.

그 전투 방식은 지켜보는 사람마저 흥미로움을 느낄 만큼 특별했다.

사자왕은 도끼를 쿵 내려놓고 두 손을 손잡이에 올려놓은 채, 잠시 조커의 싸움을 지켜보기로 했다.

“빨리 싸우도록 하지. 시간이 없으니까.”

조커는 쌍단검을 움켜쥔 채로 천천히 다가왔다.

상대는 시리안.

단 한 명뿐이나 그 실력은 확실히 강할 터였다.

“네가 괴도를 죽였나?”

유진하에게서 괴도가 죽었다는 소식과 들었고, 에어리스마저 영혼만 겨우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들었으나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가면을 쓴 자를 말한다면 내 손에 죽었다.”

시리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빙열검을 든 그의 사방에는 차가운 기운이 뒤덮었고 얼음 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그 순간.

단검이 빠르게 흘렀다.

지평선을 가르듯이 나아간 단검이 얼음 기둥을 자르며 나아갔다.

시리안은 빙열검을 들어 그 단검의 일격을 막아 냈으나 거의 얼굴에 닿기 직전까지 베기를 허용했다.

“죽이면 안 되는 자였나?”

단검의 얼굴까지 다가왔음에도 눈빛조차 깜빡이지 않은 시리안이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조커의 단검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동료라서?”

“아니.”

조커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젠가 내가 싸울 녀석이었는데 네가 빼앗아 갔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커의 단검이 매섭게 움직였다.

무엇이든 사방으로 가를 듯한 조커의 공격이 시리안에게 직격했다.

카앙.

칼날이 번뜩였다.

무수히 상대를 베면서 조커는 불길한 감정을 느꼈다.

시리안을 벨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은 너무나 딱딱했고, 마치 얼음을 베는 듯이 무거웠다.

그것은 생명체가 아니라 물체에 가까웠다.

‘녀석이 아니다……?’

그때 조커의 배후에서 얼음 기둥들이 무수히 치솟았다.

그들은 곧 형체를 바꾸어서 시리안의 모습으로 변했다.

“얼음 조각이다.”

얼음 조각으로 만들어진 그는 진짜와 완전히 모습이 똑같았다.

누가 진짜인지 몰라 대치하고 있을 때 시리안의 아우라가 발휘되었다.

영원의 영역.

<얼음의 조각상>

얼어 버린 지대에서 특수한 존재를 창조할 수 있다.

빙열검에서 쏟아지는 얼음이 사방을 빙하 지대로 만들고, 이어서 <얼음의 조각상>을 발현하면 무한에 가까운 얼음 조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칫!”

조커는 살짝 뒤로 움직였다.

바닥과 천장을 뒤덮은 얼음 지대에서 시리안의 얼음 조각상들이 무수히 달려들었다.

“함정이었나?!”

조커는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발휘하여 아우라를 발휘했으나, 시리안의 얼음 조각상은 능력마저 본체와 같았다.

무수히 몰아치는 검의 세례를 전부 받아 내기에는 무리였다.

“큭!”

온몸이 난자당한 조커는 칼날을 맞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시리안이 파 놓은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말았다.

“쿨럭!”

얼굴에 쓴 백가면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입가에는 피가 가득했고 조커의 몸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힘겹게 비틀거렸다.

“젠장.”

승기를 잡은 얼음 조각들이 무수히 달려들었다.

그들은 지옥의 파수꾼 같았다.

검으로 무수히 찌르는 살인마처럼 조커의 온몸을 베고 또 베었다.

촤아악!

왼팔이 날아가고, 오른 다리도 베였다.

마지막은 머리마저 잘려 나갔다.

툭.

방향을 잃고 바닥에 떨어진 조커의 머리가 나뒹굴었다.

두 번째 죽음이었다.

얼음 조각들은 가만히 서서 죽어 버린 조커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끝이다.”

목이 잘린 조커가 다시 죽었다.

시리안은 어차피 예정된 결과였다는 듯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감각을 느꼈다.

푹.

단검이 시리안의 상체를 찌르고 들어왔다.

“네가 진짜지?”

조커의 목소리였다.

얼음 조각들이 앞장서서 조커를 난자하는 동안, 뒤에 홀로 남아 있던 시리안이 본체였다.

입가에서 피를 토해 낸 시리안이 중얼거렸다.

“…죽지 않았나?”

“분신이 죽었지. 너와 같은 전략이었다.”

조커의 고유 특성.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본체와 똑같은 능력을 가진 분신을 하나 소환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조커는 분신을 먼저 보낸 거였다.

<십자군의 사자왕>과 대화를 하던 것도 작전의 일부였다.

상대가 이것을 진짜 조커라고 믿도록 완벽하게 파 놓은 함정이었다.

“너도 가짜로 위장했으니 억울해하지 마라.”

조커는 냉소적으로 비웃었다.

단검으로 찌른 시리안을 그대로 들어 올려 녀석이 비명을 더 토해 내도록 유도했다.

“죽어라.”

조커의 단검이 번뜩였다.

시리안의 목이 순간적으로 잘렸다.

파앗!

피가 뿜어지면서 튀어나온 머리는 허공을 잠시 허우적거리듯이 빙글 돌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전략적인 면도 전투에서 중요하지.”

전투를 지켜보던 사자심왕은 조커의 싸움 방식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기만과 용력이 중요했다.

힘만 믿는 용사들은 자기 혈기에 못 이겨 한계를 모르고 돌격만 하다가 죽는다.

기만책을 쓰는 녀석은 똑똑한 자기 꾀주머니만 믿다가 결국 함정에 빠져 죽는다.

모략과 힘을 겸비한 자.

이런 녀석은 쉽게 죽지 않으며 전투를 능수능란하게 지배한다.

“훌륭하다.”

이중간첩도 훌륭히 수행했던 조커는 전투에서 힘만 추구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기만술과 속임술에도 능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지켜보던 사자심왕은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큭큭큭큭.”

어디선가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리안의 본체를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의 머리가 웃고 있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서 얼음 기둥이 더 강하게 치솟을 따름이었다.

“서로 속임수를 썼군. 나도 그것만으로 싸우지는 않지.”

시리안은 과거 에어리스, 유진하와의 대결에서 연이어 패배한 후로 한동안 공간을 떠돌아야 했다.

누군가에게 몸을 의탁할 생각도 했으나 신좌들을 증오했다.

그들이란 성운의 멸망을 건 싸움을 붙이며 즐기는 존재에 불과했기에, 이런 자들과 대적하려는 자를 찾아갔다.

‘시오라는 이름을 가진 자.’

시리안은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려 계획에도 참가했다.

그래서 <광명의 저편>에 합류하라는 제안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너희에게 더는 시간을 끌릴 생각이 없다.”

시리안의 눈빛이 번뜩였다.

지금 시오에게 받은 목표는 에어리스였다.

그녀의 영혼만 가져가면 된다.

“방해한다면 죽여 주지.”

빙열검은 더 강한 한기를 뿜어냈고, 시리안도 더 강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얼음 조각들은 서로 뒤엉키며 뭉치더니 거대한 형태가 되어 서서히 얼음의 상이 되어 갔다.

얼음덩어리 상은 거대한 성곽처럼 커다란 기사가 되어 나타났고 창을 들었다.

“빙하의 기사인가?”

지켜보던 사자심왕은 얼음의 기사가 등장하자 가만히 쳐다봤다.

기사를 보자마자 문득 중세 시대의 왕과 기사가 떠올라 잠시 과거의 추억을 회상했다.

“저쪽은 내가 맡지.”

<십자군의 사자왕>이 모처럼 왕의 자세로 나왔다.

왕과 기사.

중세 시대의 전투가 연상되었는지 땅에 내려놓은 도끼를 들어 올렸고, 자신이 한때는 국왕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자신의 왕국은 과거의 유물처럼 사라졌으나 그의 위명은 대대손손 전해졌다.

왕의 위명으로.

왕은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사의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훌륭한 왕은 기사가 도전할 때 받아 줘야 하지. 얼마든지 맞서 주겠다.”

사자심왕은 노란빛의 아우라를 머금으며 쿵쿵 걸어갔다.

왕이 걸을 때마다 풀 플레이트 갑옷은 차츰 아우라를 머금으며 황금빛으로 변해 갔다.

동시에 시리안도 얼음을 휘감은 파란 갑옷으로 전신을 보호했다.

시계탑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이제 정각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커 대 시리안.

사자심왕 대 빙하의 기사 소환체.

정각의 종소리가 울리기 10분 전.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전투는 더 깊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시계탑의 종이 울릴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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