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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60화 (160/229)

160화 난입자(2)

‘아델리카’라는 이름.

에어리스가 가장 알고 싶어 하던 과거의 진짜 이름이었다.

쌍둥이자리의 언니.

‘레다’를 만났었고 자매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남은 짧았으나 작은 희망과도 같은 재회였기에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다.

“당신은……?”

에어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롱한 기운을 머금은 장검을 든 그녀는 옅은 노란빛의 머리를 흩날리며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한 푸른 갑옷의 기사 시리안이 코트를 입은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시오.”

여자는 조금의 움직임조차 없이 고고함과 당당함을 유지했다.

“시오…….”

에어리스는 금세 이 이름의 의미를 깨달았다.

“시오류?!”

처음 검술을 쓸 적에 자신도 모르게 깨달았던 이름이었다.

검법의 장본인이 눈앞의 그녀였다.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니… 내가 가르친 검에 대해서는 기억이 남아 있는 모양이구나.”

시오라는 이름의 여자는 차분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제가 당신에게 검술을 배운 건가요?”

“…모든 것을 가르쳐 줬어.”

에어리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시오는 다음 말을 이어 갔다.

“모든 기술과 자세를 알려 줬지. 기억이 사라질 때 다른 것도 잃어버린 모양이야.”

“다른 거라면?”

“함께 했던 이야기…….”

짧은 대답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서서히 고조되는 긴장감을 느꼈다.

“…….”

옆에서 지켜보던 괴도는 그들의 사이에 함부로 끼어들지 못했다.

건너편에 있는 남자, 시리안이 팔짱을 끼며 괴도를 견제하듯이 노려보고 있던 탓이었다.

“검을 꺼내.”

그녀는 차갑게 에어리스에게 내뱉었다.

긴장한 에어리스가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은 건가?”

“…….”

“검을 꺼내, 어서.”

시오는 강한 어투로 명령하듯이 꾸짖었다.

그러면서 영롱한 빛을 머금은 검을 고쳐 잡으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에어리스는 대검을 바로 꺼내지 않고 잠시 주저했다.

“기억을 잃어도 몸에는 흔적이 남는 법이야. 검술은 몸에 자국처럼 남았을 거야.”

“저는…….”

“내가 가르쳐 준 첫 번째 가르침이 그거였어.”

시오는 서서히 치솟는 기운을 가다듬었다.

온몸에 흐르던 오오라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검으로 배웠으니 검으로 다시 일깨워 주겠어. 어서 검을 꺼내.”

단호한 말투였다.

에어리스는 더 거부하기 어려워지자, 흔들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떨리는 손으로 등에 멘 대검을 꺼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괴도는 에어리스의 어깨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가만히 있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마드모아젤 에어리스, 지금은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에어리스가 아니라 괴도 에어리스거든요.”

에어리스는 눈매를 가린 하얀 가면과 검은 망토를 착용한 상태였다.

순수한 모습에서 과감하고 비밀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사람은 어떤 모습이든 가지고 있습니다. 에어리스 양도 괴도라는 자각을 가진다면 괴도가 되는 거죠.”

“괴도가 된다?”

“에어리스라는 마음을 가지면 에어리스가 되기도 합니다. 당신이 가진 마음이 중요한 거죠.”

괴도는 에어리스를 격려하며 힘을 주었다.

과거의 기억에서 흔들리는 에어리스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 애쓴 것이었다.

하얀 가면을 쓴 지금.

에어리스는 괴도라는 마음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마음으로 싸울 수 있다.

카앙!

에어리스와 시오.

두 사람의 검이 정면에서 맞붙었다.

에어리스는 대검을 내세우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에 맞선 시오는 장검을 들어 차분하게 에어리스의 공격을 막았다.

“나에게 배운 검술은 너의 몸에 흔적으로 남았을 거야.”

“기억인가요……?”

“정신은 기억을 잃을 수 있어도 몸은 기억하는 법이란다. 상처가 깊을수록 기억도 깊게 자리하지.”

번뜩이는 검날과 동시에 시오의 눈매가 가늘게 일그러졌다.

“나도 그랬거든…….”

날카롭게 휘두른 장검이 단숨에 에어리스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악!”

상처가 남았다.

마치 물 흐르듯이 지나가는 장검이었는데 에어리스의 반응으로는 따라가지 못하는 속도였다.

“상대의 검이 아니라 자신의 검으로 움직이는 거야. 스스로한테 확신이 없는 사람은 검을 들 자격이 없지.”

시오는 이전의 가르침을 일깨워 주듯이 하나하나 알려 줬다.

에어리스가 그녀에게 중요한 존재였음이 분명했다.

“후우.”

에어리스는 그 말을 듣고 숨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검부터 신뢰하고 믿어야 했다.

“너와 레다는 내 밑에서 배웠다.”

“레다 언니도?”

시오의 입에서 언니의 이름이 등장했다.

지금 레다는 유진하의 형인 유성하와 함께하고 있었고, 언젠가 다시 만날 운명의 사람이었다.

시오가 레다를 알고 있었다.

“그 애는 이미 자신의 길을 정했어.”

“…들었어요.”

에어리스는 레다가 전해 준 말을 기억했다.

유성하와 성운전을 헤쳐 나가 최정상으로 올라가겠다고.

“성운들이 모인 게임에서 이기고 싶다고 들었어요.”

“그래야겠지. 그래서 너희들에게 검부터 내 모든 것을 가르쳐 준 거니까.”

시오는 차분한 눈매로 에어리스를 쳐다봤다.

영롱한 빛깔을 머금은 장검을 든 그녀는 점점 더 강한 기세를 뿜어냈다.

“레다와 아델리카, 너희 자매는 나에게 배웠지만 자신의 길을 선택해서 나갔다.”

“자신의 길?”

“성운전에 참가한 성운의 운명은 너도 잘 알 거야. 끝없는 승부 속에서 결국에는 멸망하거나 거대 신화급 성운들에게 복종하게 되지.”

“소멸하거나 멸망하거나…….”

유성하와 레다도 같은 말을 했다.

성운전에 들어온 이상.

반드시 어떤 끝에 다다를 거라고.

1회전에서 싸웠던 거인족들은 숱한 전투 끝에 멸망 직전의 상태로 내몰렸다.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 성운의 미래일 수도 있었다.

살아남거나 소멸하거나.

아니면 신적인 존재들에게 굴복하거나.

“이제는 알고 있어요. 어떻게든 지금 2회전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도요.”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하는 거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지 시오는 특별한 반응 대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 역시 너와 같은 목표야.”

“네?”

시오는 매서운 속도로 에어리스의 곁에 다다랐다.

순간적으로 시선을 놓칠 만큼 매서운 속도였다.

“나는 신화급 성운이 완전히 끝장나기를 원해.”

장검과 대검이 다시 맞닿았다.

서로 매서운 기세를 뿜어내며 격돌했고 막대한 오오라가 치솟았다.

주변에 흐르는 바람이 뒤틀리며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너희는 나를 떠났지만 돌아와도 좋아. 계속 헤매고 다니기보다는 같은 길을 가는 편이 낫겠지.”

“저는…….”

검을 겨루는 와중에서 에어리스는 계속 생각했다.

검술을 가르쳐 줬다는 그녀에게서 왜 떠나야 했는지.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성운전을 끝내는 것. 그걸 해내려면 최정상에 있는 그 오만한 자들을 전부 죽여야 한다.”

발밑에는 세찬 바람이 흘렀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정적만이 남았다.

시오의 목적은 성운전의 최정상에 있는 신적인 존재들을 격멸이었다.

“그들이 나를 지배하거나 죽이려고 하기에 내가 먼저 전부 없애 버리는 거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녀의 차분했던 눈동자에는 어느새 격렬한 증오가 담겨있었다.

신적인 존재, 신좌들을 향한 분노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저는 모르겠어요.”

에어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싸움에서 그들과의 결전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정말 죄인인 건지.

정말 그렇다 해도 전부 쓰러뜨려야 한다고 결정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한다면…….

성운전이란 게임 속에서 여흥을 즐기는 그들과 무엇이 다른 걸까.

“성운전에서 올라가는 길. 신적인 존재들과 싸워서 사생결단을 가르는 길. 이 두 개의 길이 같은 거 같지는 않아요.”

“…그래.”

에어리스의 대답을 들은 시오는 이내 차분한 말투로 속삭였다.

아주 작으면서도 소름이 끼치는 말이었다.

“기억이 없다더니… 아직도 같은 생각이구나.”

시오의 검이 빠르게 좌우로 몰아쳤고 에어리스는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집중력을 올린 터라 아까처럼 쉽게 베이지 않고 버텨 냈다.

“신화급 성운을 절멸시키고,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완전한 하나의 성운만 남길 거야.”

시오는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왜 그녀가 성운전에 난입자로 존재했으며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독립된 성운을 만들었어. 그곳에 나와 뜻을 함께하는 자들을 모아 갈 거야.”

시오의 검 끝에 새로운 기운이 샘솟기 시작했다.

영롱했던 빛은 서서히 짙어지더니 검날을 거대한 기운으로 뒤덮어 갔다.

“광명의 저편, 그것이 내가 만든 성운의 이름이다.”

신적인 존재는 없애고, 성운 자체를 하나로 통일시켜서 분란의 씨앗을 없애 버린다.

하나의 성운.

시오는 그것을 원했다.

“그럼 우리가 사는 세계는……?”

“끝자락에는 내가 만든 독립된 성운만 존재시킬 거야. 그것만이 모든 분란을 끝내고 이 끝없는 전투를 종식할 방법이니까.”

시오의 계획은 거창하면서도 과감했다.

하지만 극단적이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에어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적인 존재를 없애는 걸로도 모자라 전체 성운 중에서 하나만 남기려는 생각에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유진하와 함께하는 지구의 성운마저 저들에게는 결국 제거할 대상에 불과하기에.

“너희 자매가 내게서 배운 모든 것은 이걸 위한 거였어.”

시오는 아우라를 가다듬었다.

내재화를 넘어 초월화 단계를 거쳐 단숨에 영원의 영역에 들어섰다.

전신에서 흐르는 아우라가 거대한 검기의 화신으로 발현됐다.

<검기의 화신>

아우라의 형체가 마치 지옥의 악귀처럼 나타나 거대한 산처럼 뒤덮었다.

“거부해도 괜찮아. 방법은 얼마든지 많으니까.”

서슬 퍼런 선포였다.

그녀의 눈빛은 진심이었고, 검기의 화신은 강한 아우라를 발휘하며 번쩍거렸다.

“너를 잡아서 기억을 지우고, 다시 내 밑에 두어서 처음부터 키우면 되니까.”

“목표는 저였군요.”

난입자들의 목적은 에어리스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옛 스승이던 시오와의 인연.

레다와 에어리스 자매가 그녀에게서 벗어났던 이유까지 알게 되었다.

싸우기 위해서 배웠고.

그녀의 이상을 위해서 살았지만.

그것은 껍데기였다.

이들의 재회는 전주곡과 같았다.

새로운 시작 혹은 절망의 노래가 동시에 들리는 것과 같았다.

“저는 당신과 같이 가지 않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끝까지 하겠어요.”

에어리스는 전신의 아우라를 뿜어냈다.

푸른 기운이 무수한 푸른빛의 번개가 되어 바닥에 내리꽂혔다.

<뇌명의 참격>

지면을 짓이기는 번개들이 에어리스의 주변에 폭풍우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수하게 번뜩이는 번개들의 자락에서 에어리스의 흐트러지는 금발 머릿결이 나부꼈다.

그녀는 차분하게 고개를 들었다.

기억을 되찾아 가던 과정에서 과거의 파편을 만나게 되었고 이제는 과거의 망령과 겨루게 되었다.

‘성운에서 살아가는 자.’

이전엔 과거를 알고 싶었으나 지금은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에어리스는 흘러가는 혜성처럼 삶의 흐름을 스스로 바꾸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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