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58화 (158/229)

158화 천공의 성(7)

바닥에는 푸른 번개가 정전기처럼 흘렀다.

새까맣게 태워진 괴물의 육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에어리스는 대검을 움켜쥔 채로 전신에 서리는 번개의 아우라를 가다듬었다.

“후우.”

에어리스가 처음으로 발휘한 고유 특성이었다.

<뇌명의 참격>

푸른 번개가 수없이 주변에 내리치며 회오리처럼 휘감는 능력이었다.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지켜보던 괴도가 감탄하듯이 손뼉을 치면서 맞아 주었다.

“과연 마드모아젤. 제가 에어리스 양을 두 번째 진입자로 선택한 이유를 완벽하게 증명했군요.”

칭찬을 받은 에어리스는 쑥스러운 나머지 손가락으로 볼을 가볍게 긁었다.

“너무 많이 부서졌는데 괜찮은 걸까요?”

“어쩔 수 없는 거죠. 이 성이 손님 대접을 이렇게 했으니까요.”

괴도는 하얀 마스크 속에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곁에는 흐릿한 형체가 누워 있었는데, 괴도의 특성을 활용해서 빼낸 집사의 영혼이었다.

<그림자 속의 괴도>

그림자 속으로 은밀하게 움직이며 영혼까지 빼내는 고유 특성이었다.

“집사의 영혼이 깨어나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 성의 지도가 될 수 있겠군요.”

괴도는 다음 단계를 위한 과정을 준비했다.

원정대를 대신해서 최초의 진입자가 되었고 열쇠를 이용해서 에어리스를 불러 냈다.

“바깥은 어떻습니까? 다들 저를 기다리고 있었겠죠?”

괴도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가볍게 물어봤다.

어차피 최초이자 유일한 진입자인 자신이 이곳의 모든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원정대는 성 바깥에서 대기해야 하고 열쇠를 찾으면 그들 중에서 자신이 선택한 사람만 들여보낼 수 있다.

“저는 당연히 마드모아젤 에어리스 양을 선택했습니다.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죠.”

첫 번째 열쇠로 에어리스를 먼저 데려왔다.

다음 열쇠로 누구를 데려올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는데, 절대 데려오지 않을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유진하였다.

에어리스에 대한 미묘한 경쟁이라고 할까.

어쨌든 유진하를 라이벌처럼 견제하는 마음이 있었고 절대로 들여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후후.”

괴도는 자신이 리더가 된 듯 여유가 넘쳤고, 앞으로의 전략도 본인 스타일대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여겼는데, 에어리스의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충격을 주었다.

“죄송한데 사실 성에 또 들어온 사람이 있어요.”

“네?”

당황한 괴도의 낯빛이 변했다.

“뭐라고요? 누가 또 들어왔다는 겁니까?”

에어리스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괴도를 바라봤다.

너무나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하도 이 성에 들어왔어요.”

“유진하?!”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자 괴도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그가 어떻게 들어왔죠? 아차, 입장 규칙을 이용한 건가.”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있었고, 각각 한 명씩 입장할 수 있었다.

원정대는 집행자를 잠시 놓친 대가로 가장 강한 항우를 잃었다.

그 정도로 강한 집행자의 계획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어떤 성운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하는 동쪽으로 들어갔어요. 그쪽 방면에는 시험에 통과한 성운이 없었다고 하네요.”

“…그랬겠죠. 흡혈귀 녀석들이 게임에 참가자처럼 위장하고 참가했으니까요. 학살하고 다녔으니 전원이 탈락한 성운도 있었겠습니다.”

시험에서 탈락했다면 당연히 그쪽 방면이 텅 비어 버린다.

유진하는 괴도에게 남문을 양보하고 비어 있는 문으로 진입한 거였다.

“하하, 완전히 속았군요.”

괴도는 멋쩍게 웃으면서 하얀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자기를 먼저 순순히 성으로 보내 준다는 점이 이상했는데 역시나 유진하는 따로 속셈이 있었다.

감쪽같이 속았다.

“진하는 벌써 열쇠를 두 개나 얻어서 두 사람을 더 소환했어요.”

“네?”

아차.

유진하는 지략이 뛰어난데다 빛의 힘으로 속도마저 빠른 사기적인 능력의 리더였다.

열쇠의 존재야 금방 눈치챘을 거고, 그 순간 본격적으로 성의 탐색을 시작했으리라.

“누구를 데려갔죠?”

“으음.”

에어리스는 손가락을 접으며 한 사람씩 세어 봤다.

“조커하고 이소민 언니를 불러서 데려갔어요.”

“…그렇군요. 벌써 한참 앞서갔을 수도 있겠습니다.”

조커는 전투 면에서 뛰어났기에 이해가 가는 선택이었는데, 이소민을 선택한 거는 의외였다.

점점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자 괴도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럼 저희도 서둘러야겠군요. 목적지는 최상층이니 거기로 가야겠습니다.”

급한 마음이 들자 괴도는 기절한 집사의 영혼을 툭툭 건드려서 깨웠다.

“그만 자고 일어나시죠?”

괴도에게는 집사의 영혼이 있었다.

그가 길잡이를 해준다면 아직 승산이 있었다.

괴도는 아직 어리둥절한 집사의 영혼을 추슬러서 서둘러 떠났다.

“아, 가기 전에 드릴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저한테요?”

“마음에 드실 겁니다.”

유진하에게 지고 싶지 않았으나, 에어리스에게도 따로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선물의 정체는 검은 망토와 하얀 가면이었다.

“아, 이건 또 받았네요.”

“에어리스 양에게 전하는 제 성의입니다.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괴도의 가면과 망토를 얼떨결에 받자, 에어리스 표정은 순간 멍해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에어리스를 보면서 괴도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간단한 코스튬입니다. 굳이 제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의도는 아니니까 편하게 받으시면 됩니다.”

“아, 그런가요?”

새로운 괴도단에 에어리스가 합류하길 권했던 적이 있었고, 그때 한 번 거절했다.

강요가 아니라고 하자 에어리스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가볍게 입어만 보십시오. 파는 건 아니니까요.”

괴도가 농담을 곁들이며 에어리스의 어깨에 검은 망토를 걸쳐 줬고, 하얀 마스크를 들어 직접 에어리스의 얼굴에 씌워 주었다.

에어리스는 하얀 가면을 쓴 채, 검은 망토를 살짝 들어 올리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괴도 코스튬이 어떤가요? 제 생각에는 정말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저도 괜찮은 거 같아요.”

원체 에어리스는 호기심이 많고 의욕적이었다.

버킷 리스트에는 없지만 괴도 복장도 나름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금발 머릿결과 새하얀 마스크, 깔끔하게 정돈된 검은 망토는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가면을 쓰면 의외로 더 강해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 말을 듣자 에어리스는 팔에 힘을 주고 어깨도 휙휙 돌려 봤다.

특별한 느낌은 없었는데 어쩐지 기분이 괜찮았다.

“한 번 이대로 가 볼게요.”

가면을 썼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더 상쾌하면서도 흥미로운 느낌이 들었다.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가는 에어리스의 뒷모습을 보던 괴도는 가만히 그 뒤를 따라갔다.

“가면은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주기도 합니다.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를 나오게 하죠.”

에어리스가 함께하는 신생 괴도단이 탄생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임시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괴도 에어리스의 첫 행동이 시작되었다.

먼저 나아간 에어리스를 앞에 두고 괴도는 갓 깨어난 집사의 영혼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길 안내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집사의 영혼은 육체를 잃은 충격으로 멍한 채, 괴도만 쳐다보고만 있었다.

“저와 거래하면 어떻겠습니까? 당신의 새로운 육체를 찾아 드리죠.”

“육체 말인가?”

“저는 당신의 몸에서 영혼만 빼냈습니다. 그 말은 영혼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는 거죠.”

괴도의 제안은 적절했다.

영혼인 채로 이곳에 있다가는 안전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영혼인 상태로는 힘이 없습니다. 이곳의 괴물들한테도 먹잇감처럼 찢겨 사라질 수도 있죠. 당신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

“시간이 없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후.

괴도는 미묘한 눈빛을 지으며 집사의 영혼을 압박했다.

유리한 위치에서 적절한 제안을 던지면 누구라도 받아들이게 된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지 않습니까?”

괴도는 머릿속에서 영화 대부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집사의 영혼은 말없이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을 굳혔는지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정말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괴도 알파와 괴도 에어리스.

두 사람은 본격적인 성의 탐색을 시작했고, 집사의 영혼은 마치 호롱불처럼 빛을 내면서 안내를 맡았다.

* * *

“찾았다!”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 손을 모은 이소민이 크게 소리쳤다.

양손에 무수한 금화와 열쇠를 가득 쥐고 있었는데, 그동안 열심히 주워 담은 결과물이었다.

“역시 데려오기를 잘했어.”

유진하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단검을 움켜쥔 조커도 옆에 있었는데, 대리석으로 이뤄진 바닥에는 부서진 나무와 파편들이 가득했다.

“위장한 몬스터였어.”

조커가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탁자와 가구로 위장한 괴물들이 기습했지만 유진하의 눈썰미와 조커의 반사 신경을 이길 수 없었다.

두 사람이 괴물을 쓰러뜨리는 동안에 이소민은 빠르게 몬스터에게서 나온 아이템을 회수했다.

땅에 나뒹구는 금화.

상자에 숨겨진 열쇠.

이소민은 아이템 수집가의 재능이 있어서 필요한 물건만 쏙쏙 빼 가는 기예를 선보였다.

“내가 잘 찾았지?”

양손에 가득 물건을 가져온 이소민이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금화도 많았지만 당장은 열쇠가 더 귀중했다.

“사람을 더 데려와도 되겠다.”

열쇠가 있으면 참가자를 더 데려올 수 있었다.

유진하는 이미 두 개의 열쇠를 찾은 덕분에 조커와 이소민을 데려왔고, 괴물이 우글거리는 성에서도 순조롭게 탐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누구를 데려올까?”

이소민은 슬쩍 열쇠를 내밀었다.

리더 유진하에게 선택을 맡긴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아직 바닥에는 무수한 금화가 있어서 더 회수해야 했고, 이소민은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었다.

“알아서 결정하고 아무나 오라 그래. 딱 필요한 사람들로 말이야.”

이소민은 마치 바닥을 훑듯이 빠르게 금화 회수를 시작했다.

재물에 욕심이 있어서 그런 건지 아이템 챙기는 속도가 누구보다 빨랐다.

독보적인 아이템 회수 능력.

이소민을 먼저 데려온 이유였다.

“에어리스는 잘 있으려나? 괴도가 데려갔을 텐데.”

그 생각은 정확했다.

열쇠를 들어 에어리스를 소환하려고 했으나 이미 없는 참가자라는 메시지가 돌아왔다.

“역시… 그럼 다음 사람을 데려와야겠다.”

에어리스와 괴도, 두 사람의 실력이라면 어딘가에서 반드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금은 조커, 이소민에 이어서 다음 사람을 선택하기로 했다.

“제가 선택한 사람은…….”

지금 필요한 것은 무력이었기에, 전투적인 면을 보강시켜 줄 수 있는 영웅으로 선택했다.

“중세의 사자왕이 필요해.”

<십자군의 사자왕>이었다.

황금빛 갑옷을 입고 등장한 중세 역사상 최강의 왕.

사자의 심장을 가진 왕.

리처드 1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