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천공의 성(5)
성의 내부는 근엄했다.
검붉은 커튼이 창가를 가렸고 긴 복도에는 기다란 촛대에 꽂힌 촛불이 길게 이어졌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장식은 오래되어 군데군데 세월의 자국이 남아 있었으나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이곳에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한 사람이 입장했다.
* * *
“내가 첫 입장자라는 겁니까?”
약간 당황스럽다는 언사였으나 입가의 미소는 만족을 드러냈다.
원통형에 위가 높고 평평한 실크해트 모자를 신사처럼 착용하고, 눈가를 가린 하얀 가면을 쓴 자였다.
괴도 알파.
그가 첫 번째 진입자로 선정됐다.
“이번에는 마음껏 훔쳐도 되겠네요. 그렇죠? 괴도.”
유진하는 괴도를 호명하며 가벼운 농담을 곁들였다.
쟁쟁한 원정대 멤버들 중에서 자신이 불릴 줄 몰랐는지, 괴도는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제가 제일 처음입니까?”
“내가 당신을 부를 거라고 대충 눈치채고 있었잖아요. 아닌가요?”
사실 괴도도 이번 일에 자신이 적임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괴도는 모자챙을 부여잡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설픈 연기로 놀란 척을 했는데 역시나 유진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어떤 물건이든 훔칠 수 있는 사람답게 머리가 탁월하고. 전투에 참가한 경험도 있으며 코어를 활용한 전투력도 수준급이죠.”
코어들의 세계에서 돌아온 후로 괴도는 자신만의 전투법을 연구해서 발전시켰는데, 유진하조차 1회전 거인족과의 승부에서 최후의 카드로 괴도를 여길 정도로 뛰어났다.
“후후, 알겠습니다.”
괴도가 모자를 벗어 가볍게 인사했다.
책무를 받아들이고 최초의 진입자로서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본인만의 의사 표현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천공의 성.
사실은 뱀파이어가 사는 이 흡혈귀의 성에 괴도는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우리 성운 최초로 진입했다.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군요. 딱 제가 원하는 취향입니다.”
사방에 켜진 촛불의 세례, 축 늘어진 검붉은 커튼, 중세풍의 고급스러운 가구와 장식품까지 전부 괴도의 취향이었다.
스산한 분위기가 풍기는 분위기까지 완벽하게 마음에 들었다.
멀리서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손님을 맞이하는 집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나오는 모양이군요.”
걸음 소리를 들어보니 한 사람이 아니었다.
곧 수백 명이 넘어 보이는 무리가 정상이 아닌 자들처럼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왔다.
“좀비……?”
다가오는 자들의 정체는 좀비였다.
2회전 천공의 성은 뱀파이어에 이어 좀비까지 존재하는 몬스터 소굴이었다.
걸어오는 좀비들은 하얀 눈자위에 입가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두 팔을 흔들며 걸어왔다.
“침을 흘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괴도는 검은 망토를 살짝 움켜잡고 다시 펄럭 흔들었다.
수백 명의 좀비 떼들이 몰려오는데 하필이면 길이 하나였다.
여기서 물러서면 입구까지 몰릴 터라 정면에서 승부를 걸어야 했다.
“흐음, 어쩔 수 없군요.”
괴도는 양손에서 물건을 하나씩 소환했다.
오른손에는 코어를 꺼냈고, 왼손에는 기하학 큐브를 들었다.
끼리릭.
검은 정육면체 상자처럼 보이는 기하학 큐브는 옆면에 달린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리며 움직였다.
톱니바퀴가 움직일 때마다 큐브의 형태가 팔면체, 십이면체로 변하더니 점점 수백 개의 면을 가진 상자로 바뀌었다.
-기하학 큐브
발동 시 사방 3㎞를 감싸 외부와 차단된 공간을 만든다.
해당 공간에서는 생명체를 제외한 어떤 물체든 원자 재배열하여 만들어 낼 수 있다.
“범위가 좁긴 하지만 이 안에서 충분히 많은 걸 할 수 있죠.”
파아앗!
기하학 상자가 갑자기 사방으로 퍼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하학 상자가 사라지며 주변 3킬로 이내의 지역이 괴도의 소유권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순식간에 원자 재배열 현상이 벌어지며 성의 좌우 벽면이 무장한 갑옷 기사들로 바뀌었다.
기하학 큐브가 가진 힘이었다.
“뱀파이어 성에 어울리는 첫 전투가 되겠군요.”
괴도의 손짓에 따라 열 명의 무장한 기사들이 맹렬히 돌격했다.
커다란 대검과 철퇴를 든 기사들과 맨몸의 좀비 무리 간의 싸움이 시작됐다.
검의 궤적이 빛날 때마다 좀비의 머리가 사방으로 잘려 나갔고, 육중한 철퇴는 좀비의 머리를 으깨 버리며 살점을 튀겼다.
“크어어어!”
기사들의 맹공에도 좀비들은 물러나지 않고 반격을 가했다.
기사들의 갑옷은 전신을 보호하는 풀 플레이트 아머라서 좀비들의 이빨과 손톱으로는 절대 뚫을 수 없었다.
열심히 깨물려고 했으나 오히려 자기들의 이빨과 손톱이 깨져 버리며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파악!
심지어 괴도가 가진 코어는 동력이 무한했다.
코어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흘러가 기사들의 전신에 오오라로 발휘됐다.
마치 빛의 오오라를 두른 성기사처럼 진화한 검과 철퇴, 도끼를 휘둘러 좀비들을 부숴 버렸다.
콰과광!
압도적인 기사들의 맹공은 좀비 떼의 물량을 압도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응?”
죽어 가던 좀비의 몸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물체가 시야에 보였다.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던 그 작은 물건을 살포시 잡은 괴도는 곧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동전이군요.”
금화였다.
이전에 앞마당 삼각형의 방을 통과하면서 보상으로 받았던 동전과 같은 물건이었다.
“흐음, 좀비들을 죽이면 동전을 얻을 수 있군요.”
2회전은 성의 최상층에 있는 왕좌까지 도달해야 한다.
성 내부에 나타나는 괴물들을 쓰러뜨리면서 어딘가에서 쓸지 모르는 금화를 확보할 수 있었다.
“큐브 해제.”
기하학 큐브를 해제하자 방금 잘 싸웠던 기사들도 모두 사라졌다.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온 하나뿐인 복도에는 죽은 좀비들의 시체로 가득차 있었다.
피 냄새가 진하게 코끝을 찔렀다.
짤랑짤랑.
괴도는 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쏙쏙 집어내며 여유롭게 걸었다.
“흥미로운 느낌이군요. 이 성과 분위기, 몬스터까지 전부 다 말입니다.”
어둡고 고귀한 성.
검은 망토를 휘날리던 괴도는 긴 복도의 끝에 있는 첫 번째 문을 보았다.
괴도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곳이 점점 더 마음에 드네요.”
끼이익.
낡은 문을 열자 하얗게 빛나는 응접실이 펼쳐졌다.
기다란 식탁과 많은 의자가 정돈되어 자리를 잡았고, 공중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유리 장식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취향이 훌륭하네요. 이 성의 주인을 꼭 만나 보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이왕이면 이 거대한 성을 관리하는 집사도 같이 보고 싶고요.”
응접실에는 커다란 상자도 있었다.
굳게 닫힌 궤짝은 조용히 침묵 속에 잠들어 있었다.
“마치 열어 달라고 하는 상자가 있네요?”
궤짝은 총 다섯 개였다.
괴도는 팔짱을 끼고 조심스레 상자 다섯 개를 살펴봤다.
그때였다.
장송곡을 연주하는 오르간 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사람을 위로하는 슬프고도 장중한 진혼곡을 들은 괴도는 전율했다.
음울하던 음색이 열정적인 연주가 되어 길게 이어졌고, 괴도는 그 선율을 따라 응접실 너머의 오르간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한 사람이 오르간의 건반을 능숙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멋진 연주입니다.”
괴도는 손뼉을 치며 멋진 음악을 들은 답례를 했다.
“…예의가 있으신 분이군요.”
오르간에 있던 남자의 손이 건반에서 떨어졌다.
올백으로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남자는 외눈 안경을 낀 채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차분하면서 냉정한 눈빛으로 지긋이 찾아온 손님을 쳐다봤다.
“손님을 위한 연주였나요? 그러기에는 슬픈 음색이군요.”
“곧 죽을 사람을 위로하는 노래입니다.”
외눈 안경의 남자가 오르간 의자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보랏빛의 기운이 강하게 서렸고, 손에는 거대한 낫이 들려 있었다.
“분위기는 좋은데 손님 대접이 영 아니군요.”
괴도는 기하학 큐브를 다시 작동시켜 사방 3킬로의 공간을 지배했다.
큐브가 발동되는 동안 응접실은 괴도의 소유가 되었다.
“저는 괴도라 불리는 자입니다.”
“이쪽은 이 성의 집사입니다.”
서로 짧은 자기소개를 마친 후에 괴도는 본격적으로 큐브를 사용했다.
응접실의 탁자와 의자는 원자 재결합을 거쳐서 새로운 풀 플레이트 기사가 되었다.
코어의 에너지까지 흘려보내자, 기사들은 전신에 강렬한 오오라를 머금은 성기사처럼 강화됐다.
지잉.
집사는 자신을 포위하는 기사들을 보면서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촤악!
낫이 한 번 움직이자 기사는 단숨에 갑옷째로 갈라졌다.
좀비를 압도하던 성기사들이었으나 집사는 좀비들과 비교도 안 되는 강자였다.
“과연 거대한 성의 집사를 맡을 만한 실력자이군요.”
기사들이 압도당하자 괴도는 전략을 수정했다.
정면 승부보다는 지략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콰드득.
벽과 바닥이 뒤틀리는 소리가 격렬하게 들렸다.
응접실 전체를 원자 재배열하여 순식간에 미로를 만들었다.
전후좌우 복잡한 미로 속에다 적을 가둬 두고 빈틈을 노리려는 계획이었다.
“남의 공간을 마음대로 바꾸다니. 재밌는 손님입니다.”
외눈 안경을 매만지던 집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더니 낫으로 가볍게 베어 버렸다.
차원의 낫.
시공간을 갈라 버리는 무기였다.
마치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리더니 기하학 큐브가 차지한 영역을 순식간에 갈라 버렸다.
공들여 만들어 놓은 미로도 한순간에 날아갔다.
“쳇!”
큐브의 공간이 붕괴할 때, 반응이 늦어 피해를 입었다.
낫의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해 복부를 베인 탓에 다시 원래 공간으로 돌아온 응접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낫에 베인 상처를 부여잡은 괴도는 벽면에 등을 기대어 주저앉았다.
“다 끝난 것입니까?”
집사는 낫을 어깨에 들쳐 메고 걸어왔다.
저벅저벅.
벽면에 기댄 괴도는 다가오는 발걸음을 들으면서 축축하게 핏물에 물든 배를 움켜쥐고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
“…강하네요.”
마치 낫을 든 사신이 다가오듯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손님에 대한 처리는 깔끔하게 하라. 그것이 제 임무입니다.”
집사는 낫을 높이 들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칼날이 단숨에 괴도의 목을 베었다.
툭.
쏟아져 나오는 핏줄기 속에서 괴도의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
짧은 침묵이 흘렀다.
피 묻은 낫을 손수건으로 닦던 집사는 순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괴도의 머리가 꽃잎처럼 흩어졌다.
동시에 죽은 괴도의 육체도 꽃잎으로 휘날렸고, 응접실 벽면과 바닥마저 꽃가루처럼 흩날렸다.
“현실이 아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멀리서 괴도가 정중한 자세로 한 손을 올리며 다시 나타났다.
“이제 아셨습니까? 이곳은 아직도 제 지배하에 있습니다.”
괴도는 미로 뒤에 응접실까지 가상으로 만들었다.
배를 움켜잡으며 피를 흘리고 쓰러진 괴도는 원자 재배열로 만든 가짜였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기하학 큐브답게 원자 재배열로 유리한 판을 만들었다.
괴도의 정교한 계획에 집사는 완전히 속아 버렸고.
“속였다는 건가?”
당황한 집사는 다시 낫을 휘둘러서 또 다시 나타난 괴도를 베어 버렸다.
낫에 의해 갈라졌으나 이번에도 가짜였다.
오히려 무수히 늘어나는 괴도가 사방에서 집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후후, 전투는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죠. 머리도 중요한 법입니다.”
괴도의 손에는 열쇠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집사의 주머니에 있던 물건이었다.
“언제 그걸……?”
“당신이 내 가짜들에 현혹되는 동안 가져왔습니다. 저는 손놀림이 뛰어난 편이라서 모든 걸 훔칠 수 있거든요.”
괴도는 여유로운 얼굴이 되어 열쇠를 살살 흔들었다.
이곳에는 금화만이 아니라 아이템도 있었다.
“열쇠는 문을 여는 겁니다만 여기서는 특별한 사용법이 있더군요. 그건 금방 알았습니다.”
열쇠를 들어 허공에 내밀자 투명한 문이 생성됐다.
생겨난 문은 밝은 빛과 함께 열리더니 새로운 존재를 받아들였다.
“열쇠 아이템은 문을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걸로 새로운 진입자를 받아들일 수 있죠. 이제 제가 선택한 추가 진입자가 들어오겠군요.”
문에서 뿜어내는 광채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금발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나타난 순수한 미모의 여인.
커다란 대검을 든 그녀.
에어리스가 두 번째 진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