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천공의 성(4)
-업적 <위장하는 자의 깃발>을 부여합니다.
원정대 전원이 부여받은 업적이었다.
유진하와 에어리스는 푸른빛의 새로운 글귀가 나타나더니 물결처럼 전신을 감쌌다.
업적 자체에는 특별한 힘이 없으나 업적을 달성했다는 소식은 모든 성운에 전파되었으리라.
특히 최초로 획득한 업적이거나 난이도가 어려울수록, 그만큼 널리 알려져서 해당 성운에 대한 명성이 올라간다.
그때, 멀리서 봉쇄됐던 출입구가 열리고 에어리스가 크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진하, 괜찮아요?”
뱀파이어와의 승부에서 유진하를 믿고 출입구를 봉쇄한 원정대였다.
덜덜 떨리던 어깨를 억누르던 에어리스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안으로 달려들었다.
“우리가 이겼어.”
유진하는 고개를 들어 연기처럼 사라진 뱀파이어의 잔해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강한 힘이 있어도 그것이 승부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전력의 차이만이 전쟁을 승패를 결정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에어리스에 이어 모두가 들어왔다.
100개의 깃발을 모두가 손에 들고 있었다.
“확실히 어려운 승부였어요. 공명 선생님께서 많이 수고하셨을 거 같네요.”
“진하 말이 맞아요. 정말 혼자서 모든 방을 돌아다니며 숨겨진 깃발을 다 찾아냈어요.”
에어리스가 대답하면서 뒤편에 있는 제갈공명에게 시선을 보냈다.
원정대는 모두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천년을 지킨 성벽>의 테오도시우스 2세가 방을 봉쇄하고, 다른 영웅들이 방어 태세를 갖췄다.
그 틈에 제갈공명은 무려 100개의 방을 수색하며 모든 깃발을 찾아냈다.
“깃발 찾기는 정말 대단했어요. 제갈공명은 진하처럼 한 번에 다 안다고나 할까요?”
지략에 통달한 영웅답게 뛰어난 두뇌를 완벽하게 활용했다.
덕분에 최초로 깃발 100개를 차지하고, 동시에 뱀파이어까지 제거하는 수훈을 이뤄냈다.
“훌륭한 계책이었습니다.”
백우선을 든 제갈공명이 다가와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유진하는 예상치 못한 칭찬을 듣자 약간 부끄러워졌는지 어색하게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선생님께서 깃발을 전부 찾으신 덕분에 업적까지 달성했네요.”
“무시무시한 흡혈귀를 상대한 제자가 더 고생했을 겁니다.”
제갈공명은 처음으로 유진하를 제자라고 불러 줬다.
세계 최고의 전략가에게 인정받은 것에 모자라 제자가 되었다니, 어떤 업적보다도 기뻤다.
“하지만 서초패왕의 희생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갈공명은 백우선을 얼굴에 들어 눈가를 살짝 가렸다.
원정대에 참가하면서 희생을 각오하였으나, 그 첫 번째 사람이 출중한 무력을 가진 항우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모두가 잠시 숙연해져서 묵념했다.
-잠시 후, 천공의 성에 입장합니다.
안내 메시지가 흘러나오자 유진하는 결의를 되새겼다.
다들 유명한 영웅들답게 빨리 감정을 정리하고 투지를 불태웠다.
“그런데 업적이 뭐지? 뭔가 얻었다고 해서 기분이 좋기는 한데.”
뒷머리를 긁적이던 이소민은 눈앞에 나온 업적 메시지를 계속 바라봤다.
-업적 <위장하는 자의 깃발>
업적이란 것을 얻었지만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
“이게 뭐지? 힘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명성이 올라간다는데?”
“업적이란 숨겨진 과제를 달성하는 개념이에요.”
이소민의 말을 듣자 에어리스는 잊었던 기억의 조각 하나를 깨달았다.
“업적을 달성할수록 다른 성운에게 우리의 이미지가 널리 알려질 거예요.”
“그럼 유명해진다는 거네? 더 얻으면 많이 알아볼 수도 있겠다.”
기분이 괜찮았다.
널리 알려진다면 우리 성운이 유명해진다는 거였다.
“명성이 올라가면 다른 성운의 실력자들과 대등해질 수 있어요. 그럼 당당하게 협상할 수도 있고요.”
에어리스의 설명에 유진하는 업적과 명성의 효과를 금세 이해했다.
명성치가 상승해서 얻게 될 이점은 상당할 터였다.
“이제 다음 장소로 넘어갑니다. 지금 우리는 천공의 성 중 겨우 앞마당에 불과한 곳에서 게임 하나를 한 거니까요.”
눈앞에는 거대한 성이 있었다.
검은 성벽으로 쌓인 거대한 크기의 천공의 성.
저 성의 너머에 가장 높은 곳이 있을 것이다.
“최상층에 가야 해요.”
최종 목표는 천공의 성을 장악하는 거였다.
성에 있는 시험을 통과해 가며 마지막 최상층의 권좌에 앉은 성운이 최종 승리한다.
이어서 첫 과제의 추가 보상도 받았다.
-달성 조건에 따라 보상을 지급합니다. 깃발 하나당 100금화입니다.
100개의 깃발을 획득하여 1만 금화를 부여합니다.
총 1만 금화를 받자 리더 유진하는 이 금화를 공평하게 나눌지 아니면 합쳐 가질지를 고민했다.
“이 금화는 돈처럼 쓰이는 걸까?”
금화 하나를 든 이소민은 마치 보석 감정사처럼 뚫어지게 쳐다봤다.
빛나는 금빛의 동전은 상당한 값어치가 있어 보였다.
수집에 능한 이소민의 눈에 보물처럼 보였는지 구미가 당긴 듯 금화를 자꾸 탐했다.
“금화를 사용하는 곳이 있다는 거네요.”
그런 이소민에게서 금화를 슥 가져온 유진하도 동전의 가치를 알아봤다.
첫 번째 과제를 통과한 지금.
금화는 성 안에서 중요하게 쓰일 물건처럼 보였다.
그래서 금화는 적당히 분배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다음 과제로 가야겠어요.”
천공의 성은 이제 시작이었다.
마당을 가렸던 벽은 어느샌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눈앞에는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고풍스러운 성의 중앙은 하얀 안개가 둘러싸여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여기가 흡혈귀의 성이라는 거지?”
차가운 안개의 기운 탓인지 이소민은 오한이 서려 양팔을 부여잡았다.
모두가 추위를 느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앞마당에 있었던 거군요.”
제갈공명은 텅 비어 버린 공터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봤다.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안내는 나오지 않았다.
“저 안으로 들어가야겠군.”
조커는 옷매무새를 단정하면서 침착하게 대기했다.
리더는 유진하였기에 그의 지시가 있어야 했다.
“가요.”
안개가 시야를 가려 성의 윤곽이 전부 보이지는 않았음에도,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있었다.
“동서남북. 성의 네 방향마다 앞마당이 있군요.”
하얀 가면을 쓴 괴도가 지형을 빠르게 파악했다.
원체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답게 주변 지형에 누구보다 민감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남쪽입니다. 이 말은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에 우리처럼 시험을 통과한 성운들이 있다는 겁니다.”
적어도 몇 개의 성운이 천공의 성에 도전했다는 소리였다.
뱀파이어의 성.
이곳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천공의 성. 입장 규칙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내가 다시 나왔다.
-최종 목적은 천공의 성 최상층 권좌에 앉는 것입니다.
동서남북, 네 방향의 성문이 열립니다. 각 문에 최초 입장자 한 명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한 명?”
우리 성운의 참가자는 21명이었다.
항우가 탈락해서 한 명이 줄었는데 이 중에서 ‘최초 입장자’를 골라야 했다.
“최초로 들어가는 사람은 부담이 많겠군.”
유진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략을 담당한 제갈공명과 대학자 <서양 철학의 원천>도 턱에 손을 괴고 고심에 빠졌다.
-성문은 1분 뒤에 열립니다. 각 문에서 한 명의 인원만 진입할 수 있습니다. 최초 입장자는 대기하고 입장을 준비하십시오.
최초로 들어가는 사람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또, 안개가 끼고 음산한 이 성에서 어떤 기계 장치나 함정, 혹은 괴물이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위험했다.)/
“적어도 피 빨아먹는 뱀파이어가 성안에 우글우글하겠다는 건 알겠어.”
이소민은 징그러운 핏빛을 떠올렸는지 몸서리를 치면서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소민 언니, 괜찮아요. 저도 좀 기분이 싱숭생숭하거든요.”
에어리스가 다가와 이소민의 어깨를 잡아 주며 같은 마음으로 위로해 줬다.
상의할 시간은 1분이었다.
이제는 누가 최초의 입장을 할지 결정해야 했다.
이소민은 번쩍 손을 들어 첫 번째 후보자를 추천했다.
“누가 먼저 들어갈까? 유진하, 너는 어때.”
“제자는 어려울 겁니다.”
백우선을 가볍게 흔들던 제갈공명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유진하는 방금 뱀파이어를 상대하면서 많은 힘을 소모했어요.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선생님…….”
제갈공명은 제자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유진하는 서 있기도 버거울 만큼 지친 상태였다.
내색하지 않고 숨겼음에도 제갈공명의 눈은 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안개가 자욱하고 음산한 곳에 있군요. 회복하기에 빛이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제갈공명의 판단은 정확했다.
유진하는 한계 상태에 다다랐고 걸어갈 기력조차 거의 없었다.
“진하, 괜찮은 거예요?”
에어리스는 얼른 유진하를 끌어당겨서 바닥에 앉히고 물을 꺼내어 건네줬다.
이소민은 긴장 상태를 풀어 주려는 듯이 연신 유진하의 어깨와 팔을 번갈아서 주물렀다.
그 모습이 마치 권투 경기의 쉬는 시간마다 선수의 컨디션을 살펴 주는 코치들처럼 보였다.
“아아, 그만해도 돼.”
모두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자 얼굴이 붉어진 유진하가 두 사람에게서 빠르게 벗어났다.
“조금만 쉬면 괜찮을 거야.”
유진하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성의 최초 진입자는 다른 사람으로 결정해야 했다.
“그럼 제가 가도 될까요?”
에어리스가 손을 들어 자청했다.
문득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에어리스는 얼굴이 붉게 변한 채로 수줍게 손을 내렸다.
전투에서의 박력 넘치는 모습과는 다르게 평소에는 매우 쑥스럽고 부끄러워했다.
“과연 용기가 있는 분이시군요.”
제갈공명은 부드럽게 에어리스를 쳐다봤다.
전투 팀의 일원인 대검의 에어리스는 항상 용맹하게 나서며 전장의 선봉 역할을 맡았다.
삼국지로 보면 오나라 손권의 동생이었던 손상향을 연상시키는 무용이었다.
강하고 아름다움.
외면의 강함.
내면의 부드러움.
에어리스는 두 면모가 뒤섞여 강인한 기세를 발산했다.
“좋은 자세입니다만 지금 우리는 여러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나서야 합니다.”
“아, 그런가요.”
실망한 에어리스는 어깨를 축 늘였다.
그녀를 더 잘 달래 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녀를 위로할 시간이 없었다.
“전투력은 기본이고. 전략적인 두뇌와 사고력까지 겸비한 사람이 필요해요.”
잠자코 지켜보던 유진하도 한마디를 보탰다.
눈치 없는 이소민이 제갈공명을 슬쩍 바라봤다.
백우선으로 얼굴을 가린 제갈공명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저는 서생 출신의 몸. 무장의 재능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서양 철학의 원천> 대학자도 제갈공명과 같은 상황이었다.
지략에 뛰어난 두 사람이었으나 전투적인 면모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나머지 영웅들도 무력에 치중되어 있거나, 방어에 치우친 면이 있었기에 적임자는 아니었다.
지력과 무력, 정신력과 임기응변을 모두 겸비한 원정대의 멤버.
“딱 한 사람이 있네요.”
유진하는 마침내 한 명의 적임자를 떠올렸다.
제갈공명과 대학자 역시 말은 하지 않았으나, 어렴풋이 누구를 선택할지 예상하고 있었다.
리더 유진하가 최초의 진입자를 결정했다.
“최초의 진입자는… 당신입니다.”
그의 새롭게 평가된 능력치는 다음과 같았다.
지력 : SSS
전투력 : UR
민첩 : UR
정신력 : S
체력 : B
체력을 제외하고 골고루 뛰어난 올라운드 멤버였다.
<그림자 속의 괴도>
그가 최초의 진입자로 선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