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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54화 (154/229)
  • 154화 천공의 성(3)

    뱀파이어는 유진하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가슴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지 않을 만큼 그의 손놀림은 깔끔했다.

    죽음 직전의 순간.

    유진하는 최후의 말을 마치 유언처럼 남기듯이 중얼거렸다.

    “당신은 독립된 성운의 자격으로 참가했지만 실제로는 뱀파이어였고, 우리를 시험하는 자였습니다. 집행관이 몰래 참가한 거죠.”

    “…….”

    “이번 시험의 본질은 그거였군요.”

    2회전의 집행관이 신분을 숨기고 몰래 참가했다.

    정체를 감추고 잠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면에서 맞설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렇죠?”

    뱀파이어는 죽음의 사선에 서서 묘한 말을 남기는 유진하에게 관심을 보였다.

    심장이 붙잡힌 순간에서도 그는 죽어 가는 사람답지 않았고, 오히려 대범했다.

    “집행관이 위장해서 들어와 참가자들을 속이고 죽인다. 그렇게 다른 성운을 없애 버리면서 자신들의 성을 지킨 건가요?”

    “…….”

    천공의 성.

    승리한 성운이 이곳을 차지하기에 뱀파이어는 참가자를 제거하려 애를 썼다.

    “…그랬던 거야.”

    유진하는 쓴웃음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봤다.

    그러곤 뱀파이어의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서서히 강한 빛의 기세를 발휘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알아야 할 거예요.”

    “뭐지?”

    “난 당신의 생각을 이미 알았다는 겁니다.”

    이 전투의 근본적인 변화를 알리는 말이었다.

    “내가 죽으면 당신도 죽습니다.”

    뱀파이어의 낯빛이 차갑게 변했다.

    심장이 붙잡혔음에도 여유로운 유진하의 말과 반응이 어쩐지 수상하다고 느끼던 즈음이었다.

    손에 잡힌 뜨거운 심장은 서서히 식어 가야 할 텐데, 그는 오히려 더 뜨겁게 타올랐다.

    무언가 계획한 것이 있는게 확실했다.

    “이곳은 삼각형의 방이죠. 들어올 수 있는 방향은 세 군데뿐입니다.”

    삼각형은 3개의 변이 있다.

    좌상변, 우상변, 밑변.

    1층은 삼각형 방이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정삼각형을 이루었기에 이곳에서만 사용 가능한 전략이 있었다.

    “36번 방은 가장 구석에 있습니다. 우상변은 끝이라 아예 막혀 있고. 그럼 좌상변과 밑변만 출입구가 연결되어 딱 두 곳으로만 나갈 수 있다는 거죠.”

    “설마…….”

    “두 입구는 우리가 막았습니다.”

    유진하는 뱀파이어가 혼자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함정에 끌어들이면 어떨까.

    ‘가두리 작전.’

    삼각형 모양의 방에 뱀파이어를 끌어들인 후, 출입구를 막아 가두는 작전이었다.

    “너는 미끼였나?”

    뱀파이어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눈빛을 번뜩였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유진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뱀파이어를 유인하는 동안, 나머지 멤버들은 출입구 두 곳을 막았다.

    ‘제갈공명 선생님이라면 완벽한 방어 태세를 갖췄겠지.’

    실제로 제갈공명은 테오도시우스 2세의 <천년을 지킨 성벽>을 출입구에 설치했다.

    절대 뚫리지 않는 철옹성의 성곽은 지금처럼 출입구를 틀어막고 방어하기에 아주 유리했다.

    “…….”

    뱀파이어는 유진하의 심장을 쥐고 있었으나, 선뜻 터트리지 못했다.

    함정에 빠져 출입구가 막혔다면 이 방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위를 풀어라.”

    “싫은데요?”

    유진하는 더 당당하게 나섰다.

    어차피 이번 게임은 깃발만 과반수를 차지하면 통과한다.

    이미 참가한 성운 하나가 궤멸했고, 뱀파이어 본인은 방에 갇혔으니 남은 방의 깃발은 전부 우리가 차지할 수 있었다.

    “깃발을 모아야만 승리하는 게임에서는 당신이 아무리 강해도 질 수 있죠.”

    “…….”

    “함부로 링에 올라오면 안 되는 겁니다. 그걸 알려드리죠.”

    뱀파이어는 당황했으나 애써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의 역할은 집행관으로, 그동안 참가한 성운들을 모두 전멸시켜 왔었다.

    패배의 대가는 영원한 죽음.

    ‘소멸’이었다.

    “집행관이 시험에 들어와서 참가자를 학살한다. 그게 당신들이 우리를 속이고 하는 게임의 정체입니다.”

    유진하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저들은 성운전에 교묘하게 숨어들거나 규칙을 절묘하게 이용했다.

    기만과 속임수.

    속아서 당하면 끝나는 게임이었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연합 원정대는 최정상급 영웅들로 구성된 정예 원정대였다.

    원정대에 지략가로 차출된 <천재지변의 책사>와 <서양 철학의 원천>의 활약으로 돌발 상황에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유진하 역시 저들의 속임수를 금세 간파했기에 대응을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시간제한이 있죠?”

    “…….”

    “45분 남았네요. 여기 당신이 갇혀 있으면 게임은 이대로 우리의 승리로 끝나죠. 어떤가요?”

    “…….”

    뱀파이어는 부정하지 못했다.

    상대를 전부 전멸시키지 못하면 자신이 소멸당하는 처분을 받는다.

    출입구가 막혔으니 꼼짝없이 갇혀서 죽는 것이었다.

    “날 죽이면 당신은 빠져나갈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유진하는 마침내 용건을 꺼냈다.

    뱀파이어를 절벽 끝으로 몰았으니 이제는 거래를 제시할 타이밍이었다.

    심장을 잡힌 지금.

    유진하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뱀파이어는 여전히 손을 뻗어 유진하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고, 손아귀에 힘을 주면 심장은 흔적도 없이 터질 터였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자신도 이 방에 갇혀 패배하게 된다.

    게임에서 패배하면 소멸하는 처벌을 받으니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좋다, 말해라.”

    뱀파이어가 유진하의 심장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그 틈에 유진하는 빛의 아우라를 발휘하여 녀석의 손을 쳐 내고 벗어났다.

    피의 장막 속에서 빠져나온 빛줄기처럼 하얀 빛이 섬광처럼 뱀파이어와 멀어졌다.

    “큭!”

    뱀파이어의 깔끔한 솜씨 덕분에 가슴에는 큰 부상이 없었다.

    피가 조금 나오기는 했으나, 심장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었다.

    뚝뚝.

    뱀파이어의 하얀 손과 팔뚝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혓바닥을 내밀어 팔뚝에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핥았다.

    “포위를 풀어라. 그러지 않으면 널 죽일 거다.”

    뱀파이어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위협적인 기세를 뿜어냈다.

    하지만 아까와는 명백히 달랐다.

    죽일듯한 협박처럼 보이지만 기세가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그런가요?”

    하늘로 솟구친 유진하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마침 방을 가득 채운 피의 농도도 이전보다 옅어지고 있었다.

    <붉은 꽃의 피>

    <죽음에서 피어나는 피>

    겉으로는 별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유진하의 매서운 눈썰미는 이를 바로 알아차렸다.

    “게임에 들어왔으면 당신은 집행관이 아닙니다. 참가자와 같은 처지인 거죠.”

    “…….”

    “게임에 들어왔으면 당신도 당할 수 있는 겁니다.”

    방에 갇힌 뱀파이어는 차츰 인내심을 잃어 갔다.

    제한 시간은 1시간에 불과했고, 이제 40분도 안 남았다.

    그동안 원정대는 제갈공명의 지휘 아래 출입구를 봉쇄했고, 깃발을 모으고 다녔다.

    100개의 방.

    100개의 깃발.

    과반수가 아니라 깃발 전부를 차지했다.

    유진하는 이번 시험의 진짜 의도를 알아차렸다.

    눈에 보이는 대로 믿지 마라.

    지력과 무력을 모두 갖춘 성운만이 살아남는다.

    숨겨진 룰이 있다.

    유진하는 기세가 자신에게 넘어왔음을 느끼고 빛의 아우라를 발휘했다.

    “피는 무한하지 않습니다.”

    뱀파이어는 피를 힘의 원천으로 사용했는데, 피에 닿을 경우 녹아 버리거나 단숨에 절명할 정도로 막강했다.

    심지어 유진하의 아우라마저 침식될 만큼 피의 아우라는 강력했지만, 그들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피에 집착한다는 건 그만큼 피가 부족하다는 소리다.

    흡혈귀의 전설로 상대의 약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흡혈귀들이 계속 피를 보충한다는 건 그만큼 피가 부족하고 많이 필요하다는 거죠.”

    피의 아우라는 강대한 위력을 가졌으나, 그 위력만큼 많은 피가 필요했다.

    피를 활용하는 만큼 피는 줄어들게 마련이었기에, 뱀파이어는 스스로 생명을 갉아먹는 전투 방식으로 싸워 왔다.

    ‘피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그가 스스로 얘기했던 말은 뱀파이어의 자긍심과 동시에 치명적인 한계를 실토한 거였다.

    “당신의 힘은 줄어들고 있어요. 하지만 빛은 달라요.”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

    빛은 무한했다.

    유진하는 빛의 창살을 원형체로 발현해 전신을 환하게 만들었다.

    줄어 가는 피와 달리 사방에 뻗어 나가는 빛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속전속결로 싸웠던 이유도 그런 거겠죠.”

    뱀파이어는 강한 힘을 가졌지만 제한된 피로 인해 단숨에 승부를 결정지어야 했다.

    10분 만에 성운 하나를 없애 버린 이유도 장기전에 미흡한 탓이었다.

    특히나 지금은 녀석이 방에 갇힌 상황이었다.

    “피를 보충할 수 없다면 약해지는 거죠.”

    뱀파이어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그래서 무려 두 개의 고유 능력, <붉은 꽃의 피>와 <죽음에서 피어나는 피>를 연계했다.

    하지만 승부를 빨리 결정짓지 못한 탓에 힘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허억.”

    뱀파이어가 처음으로 헛구역질을 했다.

    피가 빠르게 줄어든 녀석은 서서히 반응 속도가 느려졌다.

    한 번 뿜어낸 피는 곧 말라 버리기에 기술을 쓸 때마다 막대한 피가 소모된다.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는 공격으로는 빛의 속력을 초월한 유진하를 잡을 수 없었다.

    “젠장.”

    뱀파이어의 숨결이 차츰 거칠어졌다.

    성운전이 진행되는 장소는 절대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결계까지 설치해 놓는다.

    즉, 출입구가 유일한 탈출구라는 건데 성벽으로 막혀 버렸다.

    ‘완전히 갇혔다.’

    뿜어내는 피만큼 뱀파이어는 차츰 말라 갔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피는 소모됐고, 뱀파이어의 새하얀 피부는 점점 더 투명해졌다.

    “허억, 허억.”

    압도적인 피의 힘을 가진 뱀파이어가 기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피로 태어나서 피로 죽는다.

    그 말 그대로였다.

    “크아아악!!”

    게임에 패배해서 죽거나.

    피를 전부 잃고 죽거나.

    뱀파이어는 고고했던 자태를 완전히 잃었고, 하얀 머릿결을 흩트린 채로 소멸당하는 운명에 처했다.

    닿지 않는 빛을 향해 연신 손을 내밀었으나 그것은 너무나 멀었다.

    그는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아아아아!!”

    마지막 한 방울.

    목이 말라가듯 모든 피를 잃고 무릎을 꿇었다.

    녀석의 몸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서서히 육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유진하는 뱀파이어가 점점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만약 이 방에 갇히지 않았거나 게임에 시간제한이 걸리지 않았다면, 매우 어려웠을 상대였다.

    하지만…….

    참가자 자격으로 들어온 자는 모두 같은 처분을 받는다.

    녀석은 승부에서 졌기에 소멸당하는 것이었다.

    슈우우.

    뱀파이어의 피가 공기 중으로 완전히 증발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진하는 빈방에 홀로 섰고, 게임의 종료 메시지를 받았다.

    -집행관을 처리했습니다.

    -하나의 성운이 100개의 깃발을 전부 차지했습니다.

    -두 개의 조건을 동시에 달성하여 최초의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업적 <위장하는 자의 깃발>을 부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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