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천공의 성(2)
“항우가 탈락했다?”
탈락 소식을 듣자 유진하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서초패왕의 명칭을 가진 항우는 우리 원정대에서 최강의 무력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성운 하나를 전멸시키고 항우를 쓰러뜨린 자가 있다.”
상대는 무서운 속도로 초반 10분 만에 성운 하나를 궤멸시켰다.
2회전 깃발 쟁탈전을 섬멸전으로 만들어 버리는 존재였다.
유진하는 긴장한 낯빛이 되어 고민에 잠겼고, 조커는 약간의 떨림을 느끼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야 2회전다운 전투를 할 맛이 생기는 거지.”
강한 적이 등장하자 조커는 백가면을 쓰며 서서히 전투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자유분방하고 천부적인 싸움꾼이었던 터라 이런 긴장감을 오히려 원하던 사람이었다.
“…작전을 변경하겠어요.”
위험을 직감한 유진하는 급하게 전략을 수정했다.
최전방 방어선을 포기하고 모두가 한자리에 집결해서 맞서기로 했다.
“전원 80번 방으로 물러나요. 최대한 빨리 뭉쳐서 대응하는 편이 나아요.”
유진하는 전언 카드를 쥐어 머릿속으로 모두에게 같은 말을 전달했다.
2인1조로 방마다 분산된 상태에서는 각개격파를 당해 전멸당한다.
초반에 여덟 개의 깃발도 얻은 터라 무리하지 않아도 되니 재집결하는 편이 좋았다.
47번 방에서 탈락자가 나타났다면 녀석은 우리 근처에 있었다.
“당장 물러나도록 해요. 가장 마지막에 제가 가겠어요.”
리더의 명령이 떨어지자 에어리스와 조커는 재빠르게 방을 나섰다.
모두가 유진하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기로 약속한 터였으니 다른 의견은 없었다.
“후우.”
모두가 빠져나간 36번 방.
그곳에는 유진하가 홀로 남았다.
에어리스와 조커를 비롯해 다른 방의 멤버들도 뒤로 물렸지만 정작 본인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서초패왕이 어떤지 확인해야 하니까.”
유진하는 리더였다.
한 명의 목숨조차 소중했기에 반드시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다.
다만 항우가 있던 방에 직접 갈 필요는 없었다.
“저쪽에서 먼저 올 거야.”
예측은 정확했다.
멀리서 검은 분위기의 아우라를 발휘하며 정체불명의 존재가 어둠처럼 다가왔다.
‘항우가 일대일 대결에서 진 건가?’
그의 손에는 누군가의 머리가 들려있었다.
“아…….”
서초패왕 항우의 머리였다.
앙다문 입술과 서릿발처럼 부릅떠진 눈동자에는 원통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
항우의 머리를 들고 나타난 적을 보면서 유진하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고 쉽사리 발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상대가 발휘하는 아우라가 매섭게 발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죽음과 공포.
마치 검붉은 물결처럼 일렁이는 기운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뿜어냈다.
‘신화급 성운 혹은 전설급 성운.’
마스터가 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유명한 성운은 신화와 전설로 널리 소문이 퍼져 다른 공간에도 전파된다.’
세상에 알려진 신들의 신화는 마스터가 오래전에 들었던 다른 성운의 이야기라고 그랬다.
신화 급에는 올림푸스, 아스가르드 같은 거대 성운이 있었는데, 전설 급도 만만찮은 강대한 성운이 있었다.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툭.
상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항우의 머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서초패왕 항우는 인간 중에서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했다.
그런 항우가 쉽게 당했다면 우리보다 훨씬 강한 존재이며 더 강한 성운의 생명체일 터였다.
“당신은?”
커다란 키에 귀족풍의 검은 옷과 망토를 입은 자.
새하얀 머리를 흩날리며 핏빛이 서린 듯한 붉은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하얀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유진하는 그동안 들었던 전설 하나를 떠올렸다.
고귀한 신분의 복장과 망토.
새하얀 피부와 붉은 눈.
핏빛으로 얼룩진 자태.
이것들은 단 하나의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뱀파이어…….”
검붉은 아우라가 그의 전신에서 꽃처럼 피어올랐다.
붉은 꽃.
뱀파이어 일족은 새하얀 피부에서 붉은 피를 머금었다.
“우리에 대해 아는가.”
낮게 깔려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이 피부에 전해지자 욱신거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들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였다.
“물론이죠. 뱀파이어 일족에 대해서는 들어 봤어요.”
유진하는 응수하듯이 받았다.
뱀파이어가 공포의 존재로 불린 이유는 당연히 인정사정없이 피를 뽑아 먹고 죽이기 때문이었다.
“피와 죽음을 갈망하는 존재. 살아 있는 존재에게 공포를 주는 자.”
뱀파이어 전설.
소문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뉘앙스는 비슷할 터였다.
“피를 힘으로 활용하는 자.”
유진하의 예측은 정확했다.
“그리고 지금 이 방에는 뱀파이어 소속이 당신 혼자라는 것도 압니다.”
상대가 처음으로 눈빛이 흔들렸다.
“당신은 일족이라고 했어요. 성운으로 참가했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겠죠.”
유진하는 자신의 추리를 계속 얘기했다.
“초반 10분 동안 당신은 성운 하나를 탈락시켰어요. 그때마다 안내 메시지가 나온 덕분에 당신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
“그 행동은 절대로 집단이 아니었어요. 단체였다면 거의 동시에 여러 방에서 탈락자 안내가 나왔을 테니까요. …단독 패턴이었어요.”
안내 메시지도 중요한 힌트가 된다.
유진하는 단독범의 소행임을 알아차렸다.
“최대 22명 참여인데 소수로 겨우 한 명이 참가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인원이 적은 독립된 작은 공간이 아닐까요?”
“눈치가 빠른 녀석이군.”
상대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일부러 거짓말을 하면서 심리전을 걸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는다는 건 자신감이 있다는 의사였다.
“뱀파이어 성운에서 독립해서 게임에 참가했다? 일부러 그랬다면 위장이라고 볼 수 있어요.”
유진하는 날카롭게 핵심을 찔렀다.
녀석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을 터였다.
“…….”
그 순간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뱀파이어가 말없이 아우라를 본격적으로 발현시켰다.
<붉은 꽃의 피>
형상화된 붉은 꽃의 아우라에서 막강한 기운이 치솟으며 꽃잎이 흩날리는 듯한 효과가 나타났다.
“내 역할은 집행관. 게임의 일부가 되어 쓸모없는 녀석들을 미리 제거한다.”
“집행관?”
“2회전에 참가한 녀석들이 이기면 천공의 성을 얻는다. 그걸 지키는 게 내 역할이니까.”
뱀파이어는 새하얀 손을 내밀어 흩날리는 붉은 꽃의 아우라를 발휘했다.
“너의 핏물도 묻혀 주겠어.”
저 붉은 꽃잎의 아우라에 닿으면 죽는다.
본능적으로 유진하는 깨달았다.
칼날처럼 변해 버린 붉은 꽃잎들이 나부꼈고 사방을 가득 채웠다.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
빛의 초월자로 성장한 유진하에게 피의 꽃잎들이 보이는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느렸다.
두렵지 않았다.
진짜 무서운 부분은 꽃잎이 가진 힘이었는데 붉은 꽃잎에 닿은 모든 것들은 붉은 피로 물들어 갔다.
허공은 물론 땅바닥까지 붉은 피로 점점 채워지고 있었다.
“아무리 피해도 한계는 있다.”
상대는 무려 서초패왕 항우를 단독으로 제압한 녀석이었다.
붉은 꽃잎으로 뒤덮은 일대를 <역발산기개세>의 기세로도 뒤엎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힘과 완력으로도 뒤집을 수 없는 아우라였다.
“결국 이 방에서 죽는다.”
피가 완전히 사방을 채울 즈음.
유진하는 이곳에 갇혔다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걸 깨달았다.
주저하는 순간.
“어?”
뱀파이어가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파앗!
녀석의 손에 피가 묻었다.
유진하의 목에 상처가 생긴 것이다.
‘이 녀석. 서초패왕처럼 내 목부터 노렸어.’
뱀파이어의 일경이 유진하의 목덜미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손가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바라보던 뱀파이어는 이내 혓바닥을 내밀어서 훑었다.
소름이 끼치는 광경이었다.
“아까는 가치가 없을 정도로 싱거운 녀석들이었다. 너희들은 죽일 가치가 있을까.”
피를 빨아 먹는 뱀파이어.
전설적 성운에 속한 그들은 인간을 먹잇감으로 여겼다.
방금 일격은 치명적이었다.
유진하의 목에 생긴 상처에서 피가 나오자 마치 주술에 걸린 듯이 온몸이 멈췄다.
빛의 아우라도 서서히 사라졌다.
“피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
뱀파이어는 하얀 손을 흔들더니 이내 붉은 눈을 번뜩였다.
새하얀 머리카락 속에서 혼돈이 담긴 듯한 그의 눈동자가 무섭게 바라봤다.
“영혼이 담긴 피는 그만한 가치가 있지. 저주를 걸 수도 있고 내 힘으로 삼을 수도 있다.”
피로 만들어진 붉은 꽃잎 속에서 뱀파이어가 서서히 몸을 떠올리며 다가왔다.
달콤하면서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그의 몸에서 피어나더니 이내 차가운 핏방울이 되어 흩뿌려졌다.
이제 사방이 피로 물들었고 빠져나갈 곳은 사라졌다.
“크윽!”
빛의 아우라를 잃은 유진하는 목에 생긴 상처에서 나오는 피로 인해 고개를 떨구었다.
뱀파이어의 손에 닿아 피가 나오는 순간, 저주에 걸린 탓이었다.
“뱀파이어가 있는 전설급 성운에 대해서 알려 주지.”
붉은 피바다에서 그는 여유롭게 걸어왔다.
저벅저벅.
“뱀파이어는 피에서 태어나 피로 죽는다.”
그들이 말하는 피는 붉은빛이었다.
삶을 갈망하기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의미를 부여했다.
저주에 걸려 부동자세가 된 유진하가 힘겹게 한마디를 던졌다.
“죽음의 언저리에서 산다는 거. 그렇게 즐겁지는 않을 거예요.”
뱀파이어는 천천히 다가왔다.
“우리가 피에 연연하는 존재라고만 생각하나?”
그는 유진하의 앞까지 걸어왔다.
그러곤 우두커니 서서 붉은 눈을 빛내며 인간을 관찰하듯이 샅샅이 쳐다봤다.
“아니…….”
유진하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당신들의 존재 자체가 피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유진하의 전신에서 새하얀 빛이 다시 샘솟았다.
사라졌던 빛의 아우라가 발동하면서 피의 아우라를 밀어냈다.
“지금…….”
목에 난 상처는 가까스로 버텨 냈다.
피의 저주가 걸리더라도 어차피 빛의 힘이 모이면 한 번에 밀어내 해제할 수 있었다.
유진하는 몰라도 빛 자체는 저주에 걸리지 않는다.
콰아아!
무수한 빛의 아우라가 피의 아우라를 순식간에 밀어냈다.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
가까이서 마주한 빛줄기는 광활했고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열기를 뿜어내면서 피의 잔재를 몰아냈다.
피의 아우라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소모전을 벌이는 대신에 단숨에 압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빛의 힘을 아끼고 모아서 순간적으로 방출할 기회를 노린 것이다.
“피에 살고 피에 죽는다면…….”
동시에 뱀파이어의 심장을 노렸다.
일발역전.
피를 제압해서 심장을 노린다.
마치 녀석의 심장에 말뚝을 박듯이 빛의 아우라로 모든 피를 뚫고 녀석의 심장을 꿰뚫었다.
“…너는 다르군.”
귓가에 들리는 음성에 유진하의 눈빛이 번뜩였다.
심장을 잃어 사라질 존재였는데 어째서 지금도 살아 있을까.
뱀파이어는 최초로 두 번째 영원의 영역을 발동했다.
<죽음에서 피어나는 피>
<붉은 꽃의 피>는 그가 도달한 첫 번째 고유 특성이었다.
영원의 영역에서 고유 특성은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며 성장한다.
“고유 특성은 연계로 이어져 새로운 특성을 개화할 수 있다.”
첫 번째 고유 특성에 이어 두 번째 특성이 발현됐다.
뱀파이어는 피로 이루어진 존재.
<죽음에서 피어나는 피>가 발동하자 녀석의 심장은 다시 생성됐다.
밀렸던 피는 다시 채워졌고 무한에 가깝게 솟아올랐다.
피의 장벽.
빛의 아우라마저 붉은빛에 침식되듯이 힘을 잃어 갔다.
“아까처럼 너도 죽는다.”
항우도 이 단계에서 당한 거였다.
“죽음에서 태어난다. 너희는 그 반대로 죽는다.”
붉은 피는 유진하의 빛을 잠식했고 급속도로 소멸시켰다.
빨갛게 뒤덮인 피의 장벽.
흘러내리고 올라가는 물결 같은 흐름 속에서 뱀파이어의 손이 유진하의 심장을 노렸다.
“아…….”
짧은 고통이 지나가는 순간.
그의 새하얀 손이 빛을 밀어내고 심장을 움켜쥐었다.
죽음이 전신을 휘감았다.
얼마 후.
안내 메시지가 나타났다.
<36번 방에서 탈락자가 발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