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51화 (151/229)

151화 섬멸전(7)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붓으로 허공에 글자를 적어 내려가던 제갈공명이 가볍게 말을 붙였다.

제갈공명은 다재다능한 책사답게, 사후 세계에서 수많은 영웅들과 대화하기 위해 언어와 글자를 모두 익혀 놓았다.

“공명 선생님?”

잠시 손을 멈춘 유진하가 공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원문이 열리고 새롭게 변해 가는 세상에서 우리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지. 이 세상에 유일한 법칙이 있는지 그런 부분이 궁금하군요.”

제갈공명은 학구열과 탐구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질문은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철학적 난제였다.

“선생님은 혹시 그런 주제로 대화를 나눠 보셨나요?”

“많은 얘기를 나누었죠.”

“동양의 대가들은 물론이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혹시… 제자백가 선생님이라든가?”

제자백가는 동양 철학의 근본을 만든 대학자들을 말한다.

“흐음, 대학자님들과는 자주 얘기를 나눴습니다.”

“와아, 대단하네요.”

유진하는 감탄이 섞인 탄성을 토해 냈다.

역사적 위인과의 대담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니.

유진하의 반응에 제갈공명은 손가락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봐야 살아 있는 것보다는 못하다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사후 세계는 어둡고 막혀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 곳을 좋아할 사람 아니, 영혼은 없겠죠.”

제갈공명은 가볍게 웃으면서 붓을 계속 움직였다.

유진하도 쓰던 글자를 허공에 이어 적었다.

“고대 그리스의 3대 철학자들과도 얘기를 나눴습니다.”

“와, 정말인가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서양 철학의 뿌리를 만든 사람들이었다.

세계 최고의 철학자들은 사후 세계에서 무수한 논쟁과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도 그럴 터였다.

“오랫동안 토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의 생각에는 다들 일치했죠.”

“하나의 생각?”

“지금 우리가 겪는 이 문제에는 반드시 해답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유진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저 높은 하늘 너머에 끝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성운전.

이 게임에 모든 세상과 존재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숨어 있을까.

유진하의 형과 에어리스의 존재.

그 모든 것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강한 집념이 샘솟았다.

“선생님, 사람들이 원하는 꿈도 이룰 수 있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제갈공명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백우선을 펄럭였다.

한평생 주군 유비를 모시며 한나라 부흥에 몸을 바치던 천재 책사였고, 생전에는 꿈과 희망이 있었으며 그것을 이루지 못한 회한도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덧없이 사라져 가는 존재들의 운명에게서 벗어난 듯, 제갈공명은 꼿꼿하게 선 채 백우선을 들어 하늘을 가리킬 뿐이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듯이.

“다 적었으면 같이 맞춰 볼까요?”

“네.”

아홉 명의 되살릴 영웅들.

서로가 적은 명단을 하나씩 맞춰 봤고 생각을 공유했다.

두 사람은 함께 웃으면서 다음 계책을 논의했고, 그날의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성운전 1회전의 대결은 결국 1대0으로 승리했다.

열렸던 관문은 다시 닫혔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탁.

하얀 손이 흰 돌을 내려놓았다.

바둑판에는 이미 흰 돌과 검은 돌이 많이 놓여 있었다.

“…….”

정적이 흐르고 이번에는 반대편 사람이 검은 돌을 내려놨다.

툭.

남자는 하얀 수염을 머금은 고대의 철학자였다.

<서양 철학의 원천>이라는 소리를 듣는 다재다능한 천재였다.

“과연 묘수입니다.”

흰 돌을 든 하얀 손의 남자는 총기가 서린 눈빛으로 바둑판을 바라봤다.

젊고 총명한 눈을 가진 미소년 같은 남자가 어깨를 쫙 펴고 있었다.

그는 불패의 명장이라 불리던 <천하대장군>이었다.

“전략을 구상하기에 서로의 수를 주고받는 게 최선이더군요.”

“과연 전장에서 과감하게 지휘하던 명장다운 수입니다. 그런 기세가 젊음인 거죠.”

<서양 철학의 원천>이라 불리던 사람은 긴 수염을 쓸며 웃어넘겼다.

벗어진 머리와 하얀 수염에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흔들림 없는 자세는 마치 태산처럼 고요했다.

“대학자님께 그런 말을 듣다니… 과찬이십니다.”

<서양 철학의 원천>은 기원전 사람이었고 <천하대장군>보다 50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더 어린 대장군은 노년의 대학자를 향해 예의를 다하고 깍듯하게 모셨다.

두 사람은 아홉 명의 부활자 중에 두뇌를 담당할 지략가로 선택됐다.

“한 수에 우주의 길이 담겨 있다는데 앞으로 우리가 그 길을 찾아내야 할 겁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벼랑에 앉아 바둑을 두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서양 철학의 원천>의 가장 유명한 제자가 있었다.

쿠웅.

황금 갑옷을 챙겨 입고 거대한 창을 움켜쥔 그는 위대한 정복자였다.

<동서양을 이은 대왕>

<서양 철학의 원천>의 문하에게 7년이나 배운 희대의 전략가이자 전술가였고, 그가 이끈 정예 부대는 무적을 자랑했다.

“대왕의 창술. 과연 감탄만 나올 뿐입니다.”

그와 대련을 해 주는 상대도 당연히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뭉툭한 도끼를 움켜쥔 그는 대왕에 못지않게 중세 시대에서 무력에 관한 위명이 널리 퍼진 영웅이었다.

심지어 적의 칭찬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은 자였다.

<십자군의 사자왕>

십자군 전쟁에서 도끼를 휘두르며 압도적인 무력을 발휘하던 왕.

그 용맹한 기상과 힘을 보고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는 별명을 받았다.

콰앙!

두 사람의 대련은 왕들의 대결이었다.

<동서양을 이은 대왕>

<십자군의 사자왕>

정복왕과 사자왕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이곳은 부활한 영웅들이 모인 터전이었다.

지평선 너머의 바다에도 두 명의 영웅이 있었는데 그들은 함께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람과 물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못 할 것이 없지요.”

“바다를 지키지 못하면 나라를 잃기 마련입니다.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지켜야 하겠습니다.”

나라를 구한 제독.

나라를 지킨 성웅.

두 장군은 해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명장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제국의 제독>

유럽을 정복한 황제의 함대를 무너뜨린 함대의 사령관이었다.

<불패의 명장>

12척의 배로 100척이 넘는 적을 물리친 천재적인 명장.

두 사람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최고의 해전 전문가였고, 앞으로의 성운전에서 바다의 전권을 맡아 줄 핵심 전력이었다.

파아아.

두 사람은 가만히 푸른 바다를 지켜봤다.

밀려오는 파도에 실린 바다의 내음이 피부에 닿자 두 명장의 가슴에는 굳건한 사명감이 차올랐다.

<제국의 제독>은 다시 전장에 서게 된 지금 이 순간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받아들였다.

“함대의 지휘를 다시 맡을 순간이 오다니…….”

두 장군은 최후의 전장에서 총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

마치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처럼 전쟁터에서의 삶과 죽음까지 일치했다.

“전장의 바다가 다시 나를 불렀다는 건가.”

<불패의 명장>도 같은 심정이 되어 이 새로운 전장에 다시 들어서기로 마음먹었다.

“명장 집결이라…….”

아홉 명의 부활한 영웅 중에 남은 세 사람은 함께 있었다.

<애꾸눈의 장군>은 가만히 넓은 고원을 바라봤다.

기병 포위 전략가로 유명한 그는 훗날의 수많은 전쟁에서 쓰이게 되는 전략의 토대를 만들어 낸 전략가였다.

망토를 둘러쓴 그는 하나 남은 눈으로 세상을 응시했다.

“이런 대영웅들과 함께하는 전투라니. 영웅들의 전장에 기대감이 드는군.”

그의 옆에는 망토를 둘러쓴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복자들이었다.

<푸른 늑대의 정복자>가 조용히 매서운 눈빛을 번뜩였다.

“끝없이 펼쳐질 전투를 생각하니 정복욕이 샘솟는군.”

그는 사상 최대의 정복자로, 복수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며 운명을 개척한 희대의 영웅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혁명의 황제>는 품에 살짝 손을 집어넣었다.

전장에서 그는 상체의 주머니 틈에 한 손을 넣는 걸로 유명했다.

“…정예 근위병과 다시 함께하는 기분이군.”

<혁명의 황제>는 과거 영광과 좌절을 모두 겪은 경험이 있었다.

유럽을 정복한 거인에서 결국에는 조그만 섬으로 쫓겨났던 자.

다시 살아난 지금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겠다고 다짐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아홉 명의 부활자가 이 자리에 모였다.

유진하와 제갈공명이 상의 끝에 선택한 핵심 영웅들이었다.

-지략가.

<서양 철학의 원천>

-맹장.

<동서양을 이은 대왕>

<십자군의 사자왕>

-바다.

<제국의 제독>

<불패의 명장>

-지휘관

<천하대장군>

<애꾸눈의 장군>

<푸른 늑대의 정복자>

<혁명의 황제>

최고라 불리는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앞으로의 전투에 대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모두 함께하는 건가요.”

빛의 오오라를 머금으며 벼랑에 나타난 유진하는 이 싸움에 기꺼이 동참해 준 모든 영웅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었다.

그 옆에는 하얀 깃털의 백우선을 든 제갈공명이 있었다.

“자네들이 왔군.”

벼랑에 단둘이 앉아 바둑을 두던 <서양 철학의 원천>과 <천하대장군>은 동시에 돌을 내려놓았다.

“이제 2회전이지?”

하늘에는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섬이 있었고, 그 위에는 하나의 건축물이 있었다.

‘천공의 성’이었다.

“하늘에 뜬 섬도 신기한데 저렇게 거대한 성곽도 있다니. 참으로 놀랍군.”

<천하대장군>은 불패의 정예병을 이끌던 장군답게 성곽을 보면서 곧바로 전의를 다졌다.

하얀 피부의 미소년 같은 외모였으나,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용병술을 가졌다.

“성운전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전투 같아.”

미지의 무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불가사의한 세계로 가야 했다.

<서양 철학의 원천>이라 불리는 대학자는 하얀 수염을 쓸어 넘기며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를 생각했다.

“성운전이란 세계에 인간들이 들어섰네. 선대와 후대가 모두 집대성하여 힘을 합쳐 맞서 나가야 하는 이 게임도 반드시 끝은 있을 거야.”

유진하가 슬쩍 그를 바라봤다.

“끝이 있다고 보는 겁니까?”

“영원한 것은 없는 거 아닌가.”

대학자가 반문했다.

철학과 사유라는 개념에서 그의 통찰력은 예리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를 대표하는 삼단논법은 특히 유명했다.

“인간은 죽는다. 죽음은 영원하지 않다. 그럼 인간은 영원하지 않다.”

대학자가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공간은 죽는다. 죽음은 영원하지 않다. 그럼 공간도 영원하지 않다.”

두 개의 삼단논법에서 인간과 공간을 논했다.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이 대학자의 머리에 스쳤다.

“인간과 공간이 같을 순 없는 건가?”

대학자다운 철학적 사유를 듣고 있던 유진하는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갈공명은 빙그레 웃으며 대학자의 고민 주제를 살짝 바꾸었다.

“저 위에 있는 성운들과 신적인 존재들과 맞서려면 인간이 쌓아 온 지혜와 지식을 집대성해야 합니다.”

“그렇겠지. 저 높은 자들에게는 놀이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우리는 생존이 걸린 싸움이니까…….”

하늘까지 연결된 끝없는 사다리를 모두와 함께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이곳에 모인 영웅들을 바라보던 유진하는 위대한 선조들에 버금가는 그들을 믿었다.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에어리스와 이소민이 나타났다.

그 뒤에는 조커와 괴도를 비롯해 D, M, J가 등장하면서 이번 2회전에 도전할 팀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선대와 후대가 처음으로 모두 모인 최초의 ‘연합 원정대’가 탄생했다.

마지막으로 멀리서 푸른 머리의 소녀 같은 외모의 마스터가 나타났다.

“이번 팀은 영웅 집결을 이룬 최초의 팀이야.”

푸른 머리의 마스터가 유진하의 어깨를 툭 잡아줬다.

“리더는 유진하로 결정했어.”

던전에 가장 익숙하고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뛰어난 지략으로 통솔할 수 있는 사람.

유진하가 적임자라고 여겼다.

“너희들만 믿을게. 여기에 남아서 마지막까지 지켜볼 거야.”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밝은 모습의 마스터였으나 수십억 년을 살아온 최고령자이기도 했다.

공간의 주인으로서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마스터는 이곳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들에게 미래를 걸었다.

하늘에 떠오른 섬.

‘천공의 성’에서 성운전 2회전이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