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섬멸전(6)
테오도시우스의 성벽.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천년 성벽에는 천재 책략가 제갈공명이 팔진도를 펼쳐 놨다.
하얀 깃털로 만든 백우선을 가볍게 흔들면서 팔진도의 진용을 살펴보던 제갈공명은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아직 게임이 끝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년 성벽을 만든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시야가 탁 트인 벼랑 위에서 성벽으로 이뤄진 제갈공명의 거대한 팔진도를 바라봤다.
그 안에는 치열한 결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용연검을 든 항우와 태아검을 든 거인 타가르가 매서운 검기를 발산하며 강하게 맞섰다.
쿠구궁.
그들이 발휘하는 충격파는 철옹성 성벽을 휘청 기울일 만큼 위력적이었다.
수많은 장군과 영웅을 지휘하던 제갈공명조차 감탄하며 바라봤다.
“일대일 결전 중에 이만한 승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팔진도를 펼친 성벽마저 흔들어 버릴 파괴력이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전사들의 대결은 감히 누가 끼어들기도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었다.
“저런 맹장이 싸운다면 둘 다 잃고 싶지 않은 법인데.”
제갈공명은 과거에 군대의 전권을 맡았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백우선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삼국 시대는 인재들의 쟁탈전이었다.
책략과 무력, 그리고 지휘.
능력만 있다면 신분과 상관없이 장군이나 관리에 중용될 수 있었다.
“저런 장군이 있다면 둘 다 얻는 것이 최선이죠.”
제갈공명은 머릿속에서 하나의 계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미 삼국 시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촉나라의 기반이 되는 성도로 향하는 진입전에서 두 명의 맹장이 격돌했다.
장비와 마초.
두 사람은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용호상박의 접전을 펼쳤다.
“그대로 계속 싸웠다면 두 사람 중에 하나를 잃었겠죠. 결국 계책으로 싸움을 멈추고 마초 장군을 얻었습니다.”
제갈공명은 강한 상대를 아군으로 만드는 계책을 종종 사용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상황이었고 항우와 타가르 둘 다 아까운 실력자들이었다.
그때였다.
불꽃이 튀던 싸움에서 갑자기 정적이 흐르고 침묵이 흘렀다.
“끝난 건가?”
그곳에는 승자가 한 명만이 살아남을 터였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전투의 상흔이 사방에 자국처럼 남았고, 그 안에는 최후의 승자만이 남아있었다.
서초패왕 항우.
거인족 최후의 영웅 타가르.
결전이 끝났다.
그들의 칼끝이 서로의 심장을 겨눌 즈음.
움직임이 멈췄다.
항우와 타가르가 상대를 바라보던 눈빛이 멈추었다.
“타가르…….”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가르는 익숙한 음성을 듣자 고개를 돌렸다.
미로의 구석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령의 거인이 누추한 거적때기를 입은 채로 있었다.
거인족의 장로였다.
“장로님?!”
“이제 싸움은 끝났네.”
장로는 하얀 수염을 쓸며, 최후의 전사로 남은 거인 타가르를 지켜봤다.
타가르는 장로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격렬하게 거부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남아 있는 한 포기는 없습니다.”
“이미 모두가 이곳으로 왔네.”
장로의 뒤에서 거인들이 나타났다.
찢어진 넝마를 걸친 병약한 노인들, 낡고 찢어진 옷을 입은 여인들, 굶어서 지친 아이들이 공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거인 타가르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존재들이었는데, 지금은 전부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었다.
“그동안 숱한 싸움이 벌어졌고 우리는 최선을 다했네.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여야겠지. 우리의 공간이 끝에 왔다는 걸.”
“…장로님.”
용연검을 든 거인 타가르는 고개를 떨구었고 전신에 감도는 아우라마저 서서히 감소했다.
“인간들은 남은 우리를 받아 주겠다고 제안했고, 우린 그렇게 하기로 했네.”
“…….”
거인 타가르는 이를 악문 후에 고개를 들었다.
푸른 하늘이 펼쳐진 세상이 보이는 이곳과 달리, 자신이 살던 고향별은 캄캄한 붉은 빛으로 저물며 죽어 가고 있었다.
죽음의 공간과도 같았던 터전에서 벗어나 지금은 거인족 모두가 새로운 세상에서 쏟아지는 태양의 빛을 받았다.
오랜만에 보는 빛이었다.
“…알겠습니다.”
거인족은 인간들에게 의존하겠다 결정했고, 최후의 전사라도 그 결단을 되돌릴 수 없었다.
타가르는 손에 든 검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그런 타가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로는 하얀 눈꺼풀을 슬프게 감았다.
“잘했다, 내 아들이여.”
타가르에 대한 찬사였다.
장로의 아들이자 최후의 전사로서 아내와 손자를 모두 잃고도 저항했던 영웅이었다.
그에게 있어 전투의 승부보다는 일족의 생존이 더 중요한 사명이었다.
“…방해를 받았군.”
서초패왕 항우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맞수의 항복을 지켜봤다.
푸른빛의 용연검을 다시 검집에 넣으며 전투의 끝을 마무리했다.
두 맹장의 승부가 중단되자 장로와 함께 넘어온 유진하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다행이야.”
서초패왕 항우도 거인 타가르도 잃지 않았다.
용맹한 영웅을 무사히 구해 냈다는 안도감이 들자 그제야 유진하는 긴장을 풀었다.
멀리 벼랑 위에서 지켜보던 제갈공명도 훈훈한 표정이 되어 바라봤다.
“과연 대단하군요.”
이번 1회전의 전체적인 전략을 담당한 사람은 유진하였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만든 기회.
전투의 룰을 이용한 부활과 적절한 인재 선택.
마지막에는 거인족의 본거지로 가서 항복을 받아 내기까지.
“생명의 귀중함과 전력의 온전함을 모두 알았던 겁니다. 훌륭하고도 완벽한 계책이었습니다.”
와룡.
누워 있는 용이라 불리던 천재 지략가였기에 실전에서 전략을 숱하게 성공시킨 유진하의 가능성을 높게 여겼다.
“오랜만에 만난 천하의 기재라고 볼 수 있겠군요.”
천년 성벽을 만든 테오도시우스 2세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마속처럼 입만 살은 허풍선이 아니지.”
“후후, 마속 얘기는 그만 들었으면 좋겠군요.”
제갈공명은 새로운 세상에서 다음 단계의 전략을 구상했다.
“1회전 시간은 아직 남았습니다. 전투는 불과 3일째이고 남은 날은 9일이나 남았죠.”
“9일이라…….”
“굉장히 귀중한 시간입니다. 방해 없이 안전하게 준비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제갈공명은 북벌을 앞세우고 숱한 작전을 구상하면서 변수와 불운을 계산했고 수없이 생각했다.
지금도 이미 머릿속에서 전략과 전술을 구상하고 있었다.
제갈공명은 문득 출사표를 쓰던 날이 떠올랐다.
힘차게 글씨를 써 가던 붓끝에는 군대를 일으키면서 숱하게 괴롭혔던 고민의 흔적이 남았다.
‘이기기 위해서.’
싸워야 했던 비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승리는 새로운 싸움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소리군.”
테오도시우스 2세가 제갈공명의 흰 도포 자락과 백우선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말을 걸었다.
할 일을 머릿속에 정리한 제갈공명은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렸다.
“거인족의 성운은 멸망할지언정, 백 명의 생존자는 지구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에게 대우를 해 줘야겠죠.”
“살 수 있는 터전을 줘야겠지.”
“가능할 겁니다. 현재 인류는 코어라는 무한의 동력원을 얻었기에 에너지 자원에서는 부족하지 않으니까요.”
제갈공명은 유진하의 생각에 공감했다.
당장은 거인족들의 세력이 약하나 그들이 다시 번성한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중요한 부분이 또 남아 있습니다. 남은 점수가 있죠.”
성운전 1회전의 스코어는 10 대 0.
1점만 앞서도 승리할 수 있었으니 남은 9점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
‘아홉 명의 영웅’을 더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진하, 드디어 끝났어요.”
에어리스가 양손에 물통을 들고 다가왔다.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시자 그동안의 피로가 잠시 가셨다.
“진하, 저는 잠시 거인족의 여인들에게 있을게요.”
“그쪽에?”
“임신한 거인 여인들도 있어서 도와줘야할 거 같아요.”
에어리스는 거인들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다.
공간의 이민자들인 그들은 병약했고, 인도적인 마음으로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부탁할게.”
유진하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자코 쉴 여유가 없었고 이제는 남은 시간을 아껴서 다음 전략을 준비해야 했다.
“정말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조커가 다가왔다.
결사대의 일원이자 전투 팀에서 핵심을 맡았고, 이번에도 가장 먼저 부활했던 그의 활약 덕분에 이번 전투에서 기적적인 역전이 가능했다.
“거인족의 상황은 알았어. 이렇게 우리 세계로 받아들인 이유는 있겠지?”
“전략적으로만 보는 건가요?”
유진하가 반문했다.
조커는 이득이 없는 행위를 무의미한 장식품으로 여겼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이득이 되는 점을 찾아내곤 했다.
“저 강력한 거인은 그만한 실력이 있어.”
거인 타가르가 투항했다.
서초패왕 항우에 견줄 만한 괴력의 용사는 귀한 전력이었다.
전투에서 그의 활약을 기대할 수 있고, 거인족이 무사히 번성한다면 연합 세력을 든든하게 구축할 수도 있었다.
“내 생각은 중요치 않아. 어차피 너의 전략에 따라 싸울 자리만 있으면 그만이다.”
“역시 전투만 집중하는군요. 그럼 저는 선생님을 만나고 올게요.”
“선생님?”
“네, 공명 선생님이요.”
전투를 준비하는 조커와 달리 전략을 담당한 유진하는 다음 수를 준비해야 했다.
“멋진 전략이었습니다.”
흰 도포를 입은 제갈공명은 빛의 힘과 함께 다가온 유진하를 직접 맞이했다.
벼랑에 도착한 유진하는 제갈공명과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인사하며 전투의 승리를 전달했다.
“두 분이 만든 천년 성벽과 팔진도 덕분에 완벽하게 이길 수 있었어요.”
“애초에 저희를 선택해서 부활시킨 기대에 부응한 거뿐이죠.”
가볍게 고개를 숙인 제갈공명은 백우선을 흔들며 감사의 인사를 전달했다.
깜짝 놀란 유진하도 얼른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야말로 이 여정에 함께할 수 있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서로를 맞이한 유진하와 제갈공명이었다.
할 말은 많았으나 가장 중요한 얘기부터 이어 가야 했다.
“9점의 활용에 대해서 저와 상의하려고 온 것이겠죠?”
제갈공명은 유진하가 자신부터 찾아온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9점을 사용한다면 아홉 명을 살릴 수 있었다.
어떤 영웅을 부활시키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싸움의 승패가 달라진다.
“생각해 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갈공명은 백우선을 흔들면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천재 책략가로 이름 높았던 제갈공명과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전략을 상의할 기회를 맞은 유진하는 기분이 오묘했다.
“마치 적벽에서 전략을 선보이던 때와 비슷한 거 같네요.”
유진하가 솔직한 감상을 밝히자 제갈공명은 빙그레 웃었다.
“손바닥에 화공책을 썼던 일을 말하는 거군요.”
제갈공명과 주유는 적벽대전의 대전략을 상의할 적에 서로의 계책을 손바닥에 적어서 내보였다.
火
화공.
유진하가 손에 적은 느낌을 말하자 제갈공명 역시 예전 기억을 떠올리더니 웃음으로 화답했다.
“좋습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 볼까요?”
제갈공명은 긴 소매에서 두 개의 붓을 꺼냈다.
“이번에도 동시에 적어 보도록 하는 건 어떨까요? 이 붓은 허공에도 글의 자락이 남는 겁니다. 손바닥이 아니라 하늘에 적어 봅시다.”
“제가 해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죠.”
겸손한 제자를 보듯이 제갈공명은 은은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대전략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가장 중요한 핵심 인원을 선택하게 되었다.
아홉 명의 부활하는 영웅.
앞으로의 전장에서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모두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사람부터 적어 보죠.”
제갈공명은 붓을 들어 허공에 가볍게 점을 찍듯이 눌렀다.
유진하도 마찬가지로 붓을 들어 힘차게 적어 내려갔다.
“첫 번째 부활할 자.”
두 사람은 천천히 하나의 이름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