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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49화 (149/229)
  • 149화 섬멸전(5)

    푸른빛 용연검을 든 항우는 양손으로 검을 비스듬히 들어 상대를 겨냥했다.

    거인 타가르는 하얀빛 태아검을 들고 강렬한 아우라를 발휘했다.

    서로의 힘은 백중세였다.

    “으아아아아!”

    항우는 완력으로 모든 상대를 뒤엎었으나 상대는 거인족 최후의 영웅이었다.

    <역발산기개세>

    아우라를 발휘했으나 거인 타가르 역시 마찬가지로 아우라를 발현해 승부가 쉽게 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그들은 사생결단의 결전을 벌였다.

    “정말 훌륭하다.”

    서초패왕이라 불리던 항우조차 거인 타가르의 위용을 인정했다.

    그가 휘두르는 맹렬한 아우라는 그야말로 전사 그 자체였다.

    <전사의 심장을 가진 자>

    거인족 최후의 영웅이라 불리는 타가르는 죽어도 죽지 않는 자처럼 싸웠다.

    “지지 않는다.”

    타가르가 고함을 내뱉으며 소리쳤다.

    마치 태산이 울리는 듯한 괴성이었다.

    인간을 죽이면 다시 동료를 살려 낼 수 있었고,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죽다 살아난 적이 있었다.

    “동족을 살리기 위해서 너희를 죽여야 한다.”

    마지막 남은 저력을 발휘하며 그는 끝까지 싸워 나갔다.

    거인족의 전투에서 항상 최전선에서 싸우며 가족도 동료도 모두 잃었고, 심지어 연인은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버렸다.

    죽었다 살아나는 룰.

    그것에 의해 다시 부활해서 싸우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끝없는 싸움을 반복하면서 굳건히 버텼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거인 타가르는 죽음을 넘어선 의기를 발휘했다.

    그 무시무시한 아우라는 마치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듯이 처절하고도 무섭게 뻗어 나갔다.

    “나 역시 부활한 자다.”

    항우는 용연검을 잠시 들고 이 싸움에서 숨을 골랐다.

    몰아치는 적의 기세에 맞서 패왕이라 불리던 그가 검을 밑으로 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인 타가르의 용맹함은 패왕 항우조차 인정하고 심지어 존중할 지경이었다.

    “용연검과 태아검이라…….”

    항우의 예전 무기인 쌍검을 가져온 유진하가 왜 두 사람에게 하나씩 나눠 줬는지 그 연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전사들의 결전이 난투극 같은 주먹질로 끝나 이 싸움의 가치가 낮아져서는 안 될 일이야.”

    그리고…….

    어쩌면 검을 나눠 준 진짜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었다.

    항우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문제였다.

    “나는 서초패왕이다.”

    패도의 길을 걷는 자는 인의가 아니라 무력을 추구한다.

    그것이 패왕이었다.

    ‘무력과 항전 의지를 드러내라. 이 싸움은 강한 자가 이기고 살아남는다.’

    패배는 패왕의 자존심을 부정하는 소리였고, 자신의 패배는 아군 전체의 패배로 이어질 수 있었다.

    ‘패왕인 내가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인가?

    내가 죽어서 거인 영웅에게 기회를 주는 건가?’

    “웃기는군.”

    항우는 쓴웃음을 짓더니 패도의 아우라를 더 강하게 발산했다.

    종족을 위한 영웅 타가르의 결의 못지않게 항우의 투사다운 의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서로 발휘하는 아우라가 호각을 이루었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

    항우와 타가르는 무아지경에 빠지더니 태풍처럼 뒤엉켜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격전을 이어 갔다.

    이들의 싸움이 한창 진행될 즈음에 유진하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저 승부는 절대로 결판이 나지 않을 거야.”

    항우와 타가르의 승부는 맨주먹이었다면 하루 내내 치고받다가 결국 결판이 날 터였다.

    하지만 용연검과 태아검을 들었다면 일주일은 버틸 수 있었다.

    관문을 넘어온 거인들은 대부분 쓰러뜨렸고, 항우에게 남은 유일한 거인 타가르를 맡겨 놓으면 이쪽 상황은 정리가 될 터였다.

    “이제 간다.”

    항우에게 검을 줬으니 쉽게 당할 리 없고, 혹시라도 고전하면 천재 책사 제갈공명이 팔진도를 움직여서 항우를 피신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에 획득한 9점도 있었다.

    거인을 쓰러뜨리고 얻은 9점을 소모하면 아홉 명의 영웅들을 부활시킬 수 있다.

    “세 가지 작전을 짜 놨으니까 이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유진하는 차분히 다음 목표에 집중했다.

    저쪽의 주요 전력이 이곳으로 온 상황은, 역으로 우리가 거인족의 공간으로 넘어갈 기회였다.

    “진하…….”

    에어리스는 대검을 가지고 팔진도의 미로에 있었다.

    빛을 머금은 유진하는 항우에게 뒷일을 맡겨 두고 빠르게 에어리스에게 다가가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거인들의 공간으로 갈 거야.”

    방어적으로 대비한 유진하는 역공의 기회를 잡자마자 새로운 작전을 계획했다.

    “제가 가도 될까요?”

    “반드시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성운전 1회전은 결국 상대를 제압해야만 끝나게 된다.

    유진하의 곁에는 에어리스가 항상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겠어요.”

    에어리스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함께 푸른빛이 감도는 관문으로 향했다.

    “이 싸움의 끝이 저기에 있어.”

    유진하는 망설이는 느낌이 있었는데, 어쩐지 평소의 모습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거인들의 공간에서 벌어질 치열한 사투나 결전을 예정하는 걸까.

    씁쓸하면서도 음울한 표정 속에서 유진하는 눈빛을 다시 빛냈다.

    “나도 가지.”

    백가면의 남자가 다가왔다.

    춤추는 피에로 문양을 가면에 새긴 조커였다.

    “조커?”

    “나도 결사대의 일원이고 이번 전투에서도 함께 했다. 따라갈 자격 정도는 있을 텐데.”

    조커의 말에 유진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때 적이었고 이후에는 동료였다.

    지금은 어떨까?

    적과 아군의 중간일지 무엇이든 확답할 수 없었다.

    “관문을 처음으로 열려던 나다. 그랬다가 문지기와 싸우다 죽었지. 나도 같이 들어갈 자격은 충분해.”

    조커는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동료인 동시에 ‘필요악’이 었기에 쓸 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같이 있으려 했다.

    함께할 때는 든든하나, 좀처럼 제어하기 힘든 상대이기도 했고.

    “…알겠어요.”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유진하는 조커와의 갈등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같이 가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제가 말할 때만 전투에 들어가야 합니다.”

    “조건이 있나?”

    조커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애매한 대답이네요.”

    유진하는 지금까지 조커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이번에는 제어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인족의 공간에서 벌어질 일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커는 이번 원정에 변수였는데 이 싸움의 흐름을 바꿔서는 안 되었다.

    “이제 갈게요.”

    오직 세 사람만이 가는 길이었다.

    눈만 깜빡이던 에어리스는 유진하와 조커의 갈등을 보았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앞으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지라도 고심해야 했다.

    ‘진하는 내가 지키겠어요.’

    그 다짐을 품고 서서히 관문의 차원 통로에 진입했다.

    * * *

    “여긴?”

    세 사람은 거인들의 본거지에 마침내 도달했다.

    황폐한 고원에는 풀 한 포기조차 없이 고요했다.

    잡초조차 자리지 못한 죽은 땅.

    곳곳에 패인 상흔은 그동안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긴장된 상황에서 에어리스는 잠시 주변 광경을 바라봤다.

    “진하, 여기가 정말 거인족의 공간인가요?”

    “그럴 거야. 아마 이곳은 멸망하기 직전의 세계이겠지.”

    유진하는 짐작했다는 듯이 바닥에 있는 흙을 손으로 만져 봤다.

    거친 흙더미가 손아귀에서 바람에 휘날려 흩어졌다.

    이곳은 죽은 땅.

    하늘마저 붉은빛이 되어, 종말을 앞에 둔 세계였다.

    “저기 생명체가 있어요.”

    에어리스는 먼발치에서 살아 있는 거인들의 거처를 발견했다.

    무너진 성벽과 폐허 속에 천막만으로 대충 설치해 놓은 본거지가 있었다.

    그곳에는 생존한 거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당신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수염이 많은 거인 하나가 등이 굽어 힘겨운 듯이 커다란 지팡이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보니 수명이 거의 다한 거인으로 보였다.

    “그쪽이… 이번에 우리의 상대였나.”

    늙고 병든 거인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마치 체념한 듯한 그 노인의 눈빛은 하나의 희망조차 없이 절망의 그림자에 짓눌리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거인족의 장로일세. 자네들은 인간으로 알고 있지.”

    장로는 말을 하고는 잠시 쉬었다.

    절망적인 환경에 남은 그들은 최후의 거인들이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아마 타가르와 최후의 용사들은 실패한 모양인 듯하구먼.”

    “…….”

    이곳은 유일하게 남은 거인들의 본거지였고 늙고 병약한 노인이나 어린아이, 여성까지 모두 해서 겨우 100명 남짓만 남았다.

    “당신들이 전부인가요?”

    “보시다시피. 굳이 숨길 생각은 없네. 어차피 우리는 저항할 힘도 없고.”

    장로는 현실을 인정한다는 듯이 길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에어리스는 이들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말을 잊지 못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건가요?”

    “그게 우리가 처한 섭리이기 때문이네.”

    “섭리?”

    “그렇다네. 자네들이 겪은 성운전은 우리에게 수천 년 동안 반복되었던 과정이었으니까.”

    장로는 거인족이 겪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알려 주었다.

    모든 것을 체념했기에 오히려 술술 풀어 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우리도 자네들처럼 한때는 패기 넘치는 세력이었다네. 용감한 영웅과 전사들이 많았고 거인족의 상징이기도 했지.”

    “지금은 왜?”

    “성운전은 우리가 맞서기에 광활한 세상이었네. 신적인 존재들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어.”

    신좌들은 성운전의 틀을 법칙처럼 만들어 모든 성운들과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 거인족도 성운전을 참여했으나 결국에는 계속된 전투에서 용맹한 거인들을 모두 잃었다네.”

    “패배했다는 겁니까?”

    유진하가 되물었다.

    그에게서 성운전의 흐름을 듣는다는 건 앞으로 우리가 처할 미래를 알게 되는 것과 같았다.

    중요한 정보였다.

    “패배하지는 않았으나 한계에 부딪쳤지. 우리는 3회전에서 가까스로 전멸을 피했다네.”

    3회전에서 거인족은 한계에 부딪쳤고 궤멸적인 피해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 후로는 다음 단계에 도전하지 못했네. 신좌들에게 복종하기로 결정했지.”

    성운전에서 복종한다.

    그 의미를 이제 알 수 있었다.

    신좌들의 게임에서 부속품처럼 취급받게 된다.

    그 여파로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거처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할 만큼 황폐해진 고향별만 남았다.

    “우리는 힘을 잃었네. 그래서 신적인 존재들에게 부탁하여 그 아래에서 맴돌게 되었고 1회전에서 상대 성운들과 끝없이 싸우는 운명을 부여받았다네.”

    장로는 처연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1회전을 반복하는 거야. 새롭게 등장하는 신생 성운의 상대가 되면서 말이야.”

    거인족의 운명은 성운전 속에 맴도는 유령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강해지고 성장하지 못한 공간이 처해지는 운명이라기에 너무나 가혹했다.

    에어리스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이 싸움의 결말을 끔찍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까지 된다는 건 너무나 비참해요.”

    “아가씨의 마음은 알겠네만 그게 힘을 잃어 가는 성운이 처하는 운명이라네.”

    씁쓸한 눈망울로 세 사람을 바라보던 장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하 역시 이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이 슬픈 눈빛을 머금었다.

    “그래서 정찰대로 단 한 명이 왔고, 정예 병력은 겨우 열 명이었던 거야.”

    부족한 병력을 보고 유진하는 거인족이 쇠락한 세력이라고 추측했다.

    그 생각은 정확했다.

    “하지만 둘 중 하나의 성운만 남아야 한다.”

    조커는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삶과 죽음이 반드시 결정되는 전투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서는 생존과 멸망도 그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진하, 우리는 다음 2회전도 준비해야 한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1회전의 규칙은 1점을 소모하여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있다.

    상대 성운의 생명체를 죽이면 1점을 획득하는데, 병약하거나 어린 거인들이 이곳에 100명이나 남아 있었다.

    조커는 저들의 현실은 안타까우나 우리 역시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인 백 명은 우리에게 100점이다. 우리는 그 점수로 100명의 영웅들을 더 살려 낼 수 있어.”

    거인들의 생명을 죽여서 인간들의 생명을 되살린다.

    잔인하지만 현실적인 방안이었고 다른 대안은 없었다.

    “승산을 늘리려면 선택해야 한다. 성운전의 설계를 맡은 신좌 녀석들에게 닿으려면 그만한 결단이 필요해.”

    “…….”

    유진하는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거인족의 장로와 눈을 마주쳤다.

    희뿌연 눈썹, 총명함을 잃고 체념한 듯한 장로의 눈동자를 보면서 멸망해가는 세계의 운명을 보았다.

    그의 뒤에는 병약한 거인족의 여인과 아이들이 남았고, 최후의 생존자로 남은 그들의 생사여탈권이 우리의 손에 있었다.

    승자와 패자의 세계는 잔혹했다.

    성운전은 약자의 종말을 용인한다.

    “저는…….”

    누구보다 이 잔인한 결말을 알았다.

    그렇기에 유진하는 그 법칙을 거부하고 싶었다.

    “1회전은 우리가 이기지만 이들을 이대로 멸망시키지도 않겠습니다.”

    이 세계에서 다른 결말을 내고 싶었다.

    단 한 사람의 거인도 희생시키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1회전에서 패한 성운은 멸망한다는 규칙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성운의 멸망이지 거기에 살던 생명체 전원의 죽음을 뜻하는 건 아니에요.”

    걱정스럽고 불안하게 지켜보던 에어리스의 표정이 희미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진하…….”

    태양조차 사라지고 멸망해 가는 죽음의 땅에서 유진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멸망해 가는 세계라도 생명체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어요.”

    멸망에서 벗어나는 법.

    전권을 위임받은 리더의 결정이 내려졌다.

    “거인들을 우리 세계로 데려오겠습니다. 1회전은 그들이 원하는 결말로 가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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