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섬멸전(4)
“이곳이 성벽이라…….”
조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안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방에 막힌 장벽은 천년 제국의 성벽을 자랑하듯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팔진도의 복잡한 미로는 어쩔 수가 없겠지.”
천재적인 책사 제갈공명이 준비한 진법이었다.
군대의 진법으로도 사용 가능하나, 미로의 활용으로도 사용 가능한 다재다능한 술책이었다.
더 놀라운 부분은 이 팔진도가 제갈공명이 가진 진짜 특성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뛰어난 두뇌는 또 하나의 무기라는 건가.”
강력한 힘은 한계가 있지만, 뛰어난 두뇌는 전장의 수천수만 명을 잡아낼 계책을 만든다.
“지금도 내가 갈 길은 알아서 보여 주고 있군.”
제갈공명은 팔진도 안에 있는 아군들의 길을 알아서 만들어 줬다.
그래서 전투 팀으로 들어간 조커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자동으로 길안내를 받고 있었다.
“후후, 내 역할은 힘으로 제압하라는 거지.”
손에 든 조커의 단검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더니, 백가면을 다시 얼굴에 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사냥을 더 가 볼까.”
벽과 바닥은 조각난 거인의 시체와 핏자국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때, 안내가 들려왔다.
-1점을 획득하였습니다.
거인 한 명을 해치운 조커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너무 몸이 크니 다 베어 버리는 것도 힘에 부치는군.”
이미 거인 셋을 해치운 조커는, 거인의 피로 범벅이 된 옷을 털어 내면서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남은 거인들은 일곱…….”
팔진도가 스스로 열어 주는 길을 보면서 천천히 그쪽으로 향했다.
조커의 그림자는 좌우로 열리는 길을 따라 오래도록 걸어갔다.
* * *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활용한 팔진도에 빠진 거인들은 흩어지는 바람에 하나하나 각개격파를 당했다.
전투 팀에는 조커를 비롯해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부활한 서초패왕 항우.
부활한 유진하.
특히 유진하는 팔진도의 흐름이 변하기도 전에 압도적인 속도로 미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 속도를 보던 제갈공명도 감탄할 따름이었다.
“눈에 띄는 움직임입니다.”
벼랑에서 지휘하던 제갈공명은 성벽의 팔진도를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하나의 흐름에 집중했다.
빛줄기는 팔진도 미로의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했다는 듯이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굳이 제갈공명이 길을 만들어 주기도 전에 알아서 정확한 방향으로 지나갔다.
“과연 팔진도의 진형을 알려 준 보람이 있군요. 복잡한 진법을 완벽하게 이해한 듯합니다.”
뿔뿔이 흩어진 거인들을 각개 격파 하기 위해서 유진하는 속도전을 준비했다.
이번 전략의 핵심은 유진하와 제갈공명의 연계였다.
음양오행의 이치와 우주의 궤도를 분석하여 만든 팔진도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한 작전이었으나, 유진하는 자신만만했다.
“해 보겠습니다, 선생님.”
유진하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제갈공명의 팔진도 안에서 유진하가 빛의 속도로 적들을 각개 격파 했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성된 작전이었다는 게 훌륭합니다.”
제갈공명은 작전이 완벽하게 수행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촤아악!
유진하는 잠시 고개를 숙였고, 그 순간 이마에서 흘린 땀이 살짝 허공에서 흩어지듯이 뿌려졌다.
땀방울이 지면에 닿기도 전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정면에 거인이 있었다.
‘이긴다.’
유진하는 눈빛을 번뜩였다.
그리곤 섬광처럼 거인의 몸체에 달려들었다.
인간의 수명은 백 년.
짧은 불꽃같은 삶 속에서 죽음이란 가장 큰 공포였다.
하지만 공포를 극복할 때마다 유진하는 성장했다.
‘감정은 살아남기 위할 때 가장 강렬하다.’
패러사이트 기생충과 싸울 때도.
코어 생명체와 맞설 때도.
죽음의 저편에서 싸워 왔던 유진하는 이번에는 별똥별처럼 산산이 부서졌다가 기적처럼 부활했다.
영원의 영역.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
마침내 개화한 유진하의 고유 특성이었다.
빛의 아우라는 거인들의 힘을 제압했고 광활한 빛으로 그들의 존재마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 갔다.
한 명, 두 명.
제갈공명에게 배운 팔진도의 길을 따라 단숨에 거인들을 하나하나 제압했다.
다섯 명, 여섯 명.
순식간에 정예 거인들을 제압하고 착지했다.
“후우.”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팔진도로 이루어진 방어 체계는 철옹성처럼 완벽했다.
조커와 유진하도 침입자를 제압할 만큼 성장했고.
“남은 건 한 명…….”
열 명의 거인 중에 남은 사람은 하나였다.
거인들의 영웅이자 리더인 타가르가 남았을 따름이었다.
푸른 몸체의 거인은 다른 거인들보다 훨씬 거대했으며 그만큼 무력도 뛰어났다.
“당신이 내 상대인가?”
타가르의 앞에는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인간 한 명이 있었다.
부활한 서초패왕 항우였다.
“일대일을 원하는 것인가?”
거인 타가르가 재차 물었다.
항우는 망부석처럼 고요하게 버티고 있었다.
“나는 결전을 원한다. 혼자서 당신과 말이야.”
“인간들에게도 훌륭한 영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는지 타가르는 헛웃음을 짓다가 이내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거인의 크기를 넘어선 거대한 창이 나타났다.
“인간이여, 결판을 내겠다면 승부를 보자.”
“그러지.”
항우는 침착하게 전신을 감싸는 아우라를 발현했다.
2천 년 전에 수많은 전투에서 수십만의 군대를 녹여 버리던 패왕은 다시 한번 전장의 부름을 받았다.
“바라던 싸움인가….”
<역발산기개세>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다.
영원의 영역에서 도달한 막강한 완력을 발산하는 항우의 고유 특성이었다.
“인간의 아우라, 아니 영웅에 해당하는 힘인가?”
타가르 역시 전사였다.
자신의 고향 거인족의 세상에서 최고의 용사로 불렸던 영웅이었고, 힘으로는 누구에게 밀리지 않았던 괴물 같은 힘의 소유자였다.
<전사의 심장을 가진 자>
고대부터 가장 훌륭한 자세를 가진 용사다운 아우라였다.
거인 타가르는 숱한 전장에서 가장 선두에서 싸우고 이겨 나갔으며, 완력에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힘에서는 최강이라 자부하는 자.
그들의 격전이 시작됐다.
쿠웅.
항우와 타가르가 동시에 내민 창이 정면에서 격돌했다.
그 힘의 충돌은 거대한 파동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쿠구구구.
양측의 창끝이 맞붙어 뭉툭하게 무뎌지면서 구부러졌다.
항우의 힘.
거인 타가르의 힘.
그들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창을 무수히 휘둘렀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파동과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반경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둘만의 격전이었다.
콰과광.
철옹성이라는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에 흠집이 생길 만큼 거대한 힘이었다.
“훌륭하다.”
거인 타가르는 항우의 힘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영원의 영역에서 그 둘은 힘에 치중한 고유 특성을 가졌다.
<역발산기개세>
<전사의 심장을 가진 자>
힘과 기세를 머금은 영웅들의 정면 승부는 치열하게 펼쳐졌고, 그들의 완력에 못 이긴 창은 점점 구부러지더니 이내 부러졌다.
와지끈.
부서진 창의 파편은 충격파에 휩싸여 사방으로 튀어 나갔고, 일부는 항우에게 향했다.
항우에게 날아간 파편들이 오오라에 튕겨 나가면서,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전투가 재개되었다.
“크아아아!”
무기를 잃은 둘은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타가르의 주먹을 항우는 피하지 않았다.
저 주먹을 회피하는 순간.
소수 정예 기병의 돌격만으로 수십만의 군대를 깨부순 패왕의 자존심에 금이 가기 때문이었다.
콰아앙!
두 주먹이 맞붙었다.
“크으으윽!”
둘의 아우라는 서로 같은 뿌리를 기초로 한다.
‘내가 최고의 힘이다.’
초월적인 영원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고유 특성에 도달하려면 자존감이 중요했다.
그렇게 터득한 아우라는 명예와도 같았다.
자신의 완력보다 상대가 더 강하다고 잠깐이나마 불현듯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순간에 자존감은 무너진다.
‘아우라’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우라가 사라지면 한계 너머로 곤두박질치고 주저앉으며 완벽하게 패배한다.
항우와 거인 타가르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절대 정면 승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쿠구구구.
두 사람의 전투는 백중세였고 서로의 아우라가 상대를 집어삼킬 듯이 노렸다.
용호상박.
용과 호랑이의 싸움 같았다.
“으아아아아!”
항우는 기세를 더 끌어 올렸다.
재차 맨주먹을 휘둘렀고 거인 타가르 역시 반격을 날렸다.
무서운 연타가 서로에게 작렬했고, 서로 방어 없이 공격만을 날렸다.
쿠구구궁.
무수한 연타를 주고받는 와중에 하나의 빛이 다가왔다.
빛의 창살을 배후에 머금은 유진하였다.
“내 싸움을 방해하려는 거냐?”
항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함부로 끼어들면 용서치 않겠다고 소리쳤다.
“아니요, 저는 이 전투를 방해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거인 타가르 역시 눈부시도록 빛나는 존재를 주목했다.
서초패왕 항우와 견주어 전혀 밀리지 않는 태양의 기운이 느껴졌다.
항우는 잠시 숨을 고르면서 손가락을 들어 재차 경고했다.
“일대일 단독 결전에 끼어들 생각은 마라. 그랬다가는 너부터 날려 버릴 거야.”
항우는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
나아진 점이 있다고 본인 스스로 얘기했음에도 전투에서는 자신만의 고집이 있었다.
문제는 거인 타가르도 항우처럼 힘에 집중하는 영웅 부류에 속한다는 거였다.
“결판을 짓게 해 드리겠어요.”
유진하는 저 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자신이나 조커가 이 싸움에 끼어들면 쉽게 이길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저들 간의 자존심이 걸린 전투가 되어서 존중해 주기로 했다.
“여기…….”
유진하는 양손에 한 자루씩 검을 꺼냈다.
빛나는 하얀 검과 푸른 안개를 머금은 파란 검.
두 개의 검을 보자마자 항우는 바로 눈치챘다.
“용연 그리고 태아…….”
항우가 과거에 애용하던 두 자루의 검이었다.
공간의 주인, 마스터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긴 세월을 보내면서 영웅들의 유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빌려 갈게요.”
유진하가 두 자루의 검을 꺼내자 마스터는 아쉬운 기색을 슬쩍 내비쳤다.
“에휴… 내 보물과도 같은 수집품인데 꼭 필요하면 줘야지.”
마스터는 항우의 검을 순순히 내주었다.
용연검과 태아검.
그 두 개의 검이 이곳에 나타났다.
“하나씩 받아요.”
항우는 푸른빛의 용연검을 받았고, 거인 타가르는 하얀빛의 태아검을 쥐었다.
“그 검이라면 결판을 낼 수 있을 거예요.”
유진하는 둘의 자존심이 걸린 승부의 결말을 원했다.
서초패왕 항우는 오랜만에 쥔 자신의 명검을 바라보며 결의를 불태웠다.
거인 타가르도 전투 의지를 불태우며 거대한 기세를 발산했다.
“맘에 드는군.”
그들은 명검을 휘두르며 다시 격전에 들어갔다.
전투의 귀신과도 같은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면서 유진하는 새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이 싸움에서 두 사람이 원하는 결말과 유진하가 원하는 결말은 서로 달랐다.
‘그것을 위해 저 두 개의 검이 필요해.’
성운전 1회전은 최대 승부처에 진입했다.
빛의 아우라를 머금은 유진하는 자신이 생각한 전투의 끝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