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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38화 (138/229)
  • 138화 관문의 저편(5)

    조커가 사라졌다.

    본체에 이어 분신체마저 완전히 소멸했다.

    “진하…….”

    에어리스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며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손등으로 막았다.

    이소민도 측은한 눈빛을 머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유진하는 입술을 깨물며 부서진 잔해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쩔 수 없었어.”

    상대는 막강한 존재였다.

    수십억 년을 거쳐 관문을 지켰고, <영겁의 세월을 지키는 자>라는 수식언까지 얻은 자였다.

    그런 자를 상대하다 조커는 죽었고, 분신을 /남겨(@통해)/ 복수를 완료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이 전투에서 조커는 처음부터 녀석을 혼자 상대할 작정이었다.

    ‘날 죽인 자는 내 손으로 반드시 죽이겠다.’

    조커다운 생각이었다.

    세 사람은 우두커니 서서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소민은 허리춤에 손을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악연이었어.”

    그는 이중간첩이었다.

    정부의 요원이었고 알카트로스 조직의 조커였다.

    “그래도 다음에는 악인들의 원정대가 되었고, 결사대로도 함께 했는데…….”

    말끝을 흐린 이소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가면이 있어요…….”

    에어리스는 부서진 백가면을 들었다.

    피에로가 그려진 조커의 백가면은 반쯤 부서진 채로 남아 있었다.

    “조커의 얼굴…….”

    조커는 항상 가면을 쓴 채로 적에게 맞섰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에어리스는 백가면을 손에 든 채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제서야 비로소 어지러운 세상이 보였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차분한 표정의 유진하는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조커의 죽음이 가진 의미가 있었다.

    관문이었다.

    “관문의 문지기가 사라졌어.”

    차원문을 능가하는 관문이었다.

    우리 세계에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으로 조금 열렸다.

    조커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관문의 입구를 열어 버린 거였다.

    “더 열어도 되는 걸까?”

    이소민은 떨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관문을 뚫어지도록 쳐다봤다.

    관문에는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토로하는 인간과 공포에 질린 천사, 분노한 악마가 어지러이 뒤엉켜 있었다.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에는 열어 보는 수밖에 없어.”

    저 관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있거나 상대하지 못할 적들이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아니면 관문의 문지기를 넘어선 진짜 주인이 있을 수도 있었고.

    “진하…….”

    에어리스가 손에 든 백가면이 스스로 부서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가면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세 사람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열어 볼게.”

    유진하는 결심을 굳혔다.

    누군가 문지기를 두어 관문을 지키도록 했다면 결국 그자와는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 달 뒤라는 시한이 아니라 지금 관문의 주인과 만나는 건 어떨까.

    유진하는 천천히 문지기를 잃은 관문을 향해 나아갔다.

    “관문…….”

    이 문을 열어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감수하겠다고 결정했다.

    긴장과 두려움이 뒤섞인 지금.

    유진하는 관문에 최초로 손을 댔다.

    쿠웅.

    손가락이 관문에 닿은 순간.

    심장에 전율이 전해졌다.

    마치 관문 스스로 경고를 보내듯이 강한 압박감을 보냈다.

    “그만.”

    낯선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관문에서 내뱉는 음성은 아니었다.

    “어?”

    유진하가 고개를 돌려 조금 떨어진 곳에 나타난 사람을 바라봤다.

    낯선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망토를 둘러썼는데, 전신에서 풍기는 오오라가 심상치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여자가 서서히 망토를 열어젖히자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금발의 아름다운 외모.

    푸른 눈의 여성은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에어리스와 꼭 닮은 그녀가 예상치 못한 이곳에 나타났다.

    “에어리스? 아니, 쌍둥이처럼 닮았던…….”

    멀리서 지켜보던 에어리스도 그녀를 목격하곤 놀라서 멈칫했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그녀가 스스로 이곳에 나타나다니.

    뜻밖의 재회였다.

    “에어리스라고 불린다고 했죠?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아, 저도 당신을 찾았어요.”

    에어리스는 손을 가슴에 올리며 멈칫거렸다.

    그녀를 만나자 당황스러운 마음과 떨리는 감정이 공존했는데, 눈앞의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밝혀 줄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겠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사람이 있네요.”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을 가르켰다.

    망토를 눌러쓴 그자는 서서히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짙은 눈매의 날렵한 콧날과 깊은 눈매를 가졌고 딱 벌어진 어깨에 듬직한 체구를 가진 미남형의 남자였다.

    “당신은?”

    유진하는 한눈에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처음에 자신과 함께한 사람.

    항상 전투에서 모범이 되었고 도전적이었으며 강렬한 카리스마를 겸비한 리더.

    뛰어난 검술 실력과 판단력을 겸비한 실력자.

    <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을 쓴 사람이었다.

    “유성하… 형?!”

    유진하의 형.

    유성하.

    모든 여정을 헤치며 반드시 찾고 싶었던 그 사람이 나타났다.

    “형? 정말 형이야?”

    “…….”

    유성하는 말없이 깊은 눈빛으로 유진하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고, 그렇게 멀었던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스무 걸음 정도만 남았다.

    한 걸음.

    유진하는 형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실망스럽구나.”

    그의 첫 마디는 충격적이었다.

    유진하는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듯이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감정에 빠지려던 순간에 환상처럼 품어 왔던 기대가 산산이 깨져 버렸다.

    부서진 감정이 유리 조각처럼 바닥에 깔린 듯했다.

    “에어리스라고?”

    “아, 네.”

    유성하는 동생보다 에어리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는 냉철한 눈빛으로 에어리스의 상태를 차분히 바라보는 듯했다.

    마치 원정대의 리더처럼 멤버들을 확인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유진하, 너는 에어리스를 제대로 성장시키지 못했어.”

    “형?”

    유진하는 당황했다.

    오랜만에 나타난 유성하는 서로의 안부가 아니라 에어리스의 실력에만 관심을 가졌다.

    형의 평가는 냉정했다.

    ‘에어리스의 실력이 부족하다. 잘 성장시키지 못했다.’

    유진하는 그 말을 듣기만 했다.

    형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를 잠시 미루고, 현재 상황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유진하에게 에어리스가 있다.’

    ‘유성하에게 에어리스가 있다.’

    두 사람은 에어리스와 똑같이 닮은 사람을 곁에 두고 있었다.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형은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네가 할 수 없는 일이지.”

    유성하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동생과의 만남에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듯이 선을 그었다.

    “에어리스가 제대로 성장했으면 조커가 죽을 리 없었다.”

    “…….”

    유진하는 말문이 막혔다.

    차원문을 넘어선 관문이라는 존재.

    수십억 년을 보낸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음에도 에어리스가 막을 수 있다고?

    “…….”

    순간적으로 마스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공간 너머에는 S등급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신화라 불리던 존재가 실존해.’

    유진하는 그 말을 이번 관문과 연결 지어서 생각했다.

    “S등급의 공간. 형은 그것 때문에 온 거야?”

    “…그건 하나일 뿐이다.”

    유성하는 부정하지 않았다.

    관문 너머의 세계와 존재들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차이를 보여 주지.”

    그 말이 끝나자 유성하는 옆에 있는 금발의 여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내가 붙인 그녀의 이름은 레다.”

    레다라고 불린 그녀가 서서히 앞으로 걸어왔다.

    금발을 휘날리며 천천히 걸어가더니 건너편에 있는 에어리스에게 향했다.

    “서로 실력을 겨뤄 봐요.”

    “네?”

    에어리스는 크게 당황했다.

    레다라고 불린 그녀는 자신과 쌍둥이처럼 빼닮았고, 이들의 싸움이 벌어진다면 마치 거울 속의 자신과 싸우는 기분이 들 거 같았다.

    “저는 싸우고 싶지 않아요.”

    “짧은 대련에 불과해요.”

    레다는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에어리스를 온전히 담고 있었다.

    “흥미가 없다면 조건을 걸어 드릴게요. 에어리스, 당신이 이기면 과거를 알려 줄게요.”

    “네?”

    “그쪽이 진다고 대가를 요구하진 않겠어요. 이러면 어떤가요?”

    머뭇거리던 에어리스의 눈동자가 크게 커졌다.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은 레다는 손에서 창을 하나 소환했다.

    방금 말은 진심이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해요.”

    “아, 네.”

    에어리스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대검을 쥔 양손에 기운을 강하게 발휘했다.

    자신과 닮은 그녀와의 승부는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으나, 피하지 못한다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진하, 저는 괜찮아요.”

    유진하가 걱정하듯이 바라보자 안심시켜 주려고 조심스레 대답했다.

    에어리스 대 레다.

    두 금발 여자는 서로의 기운을 강하게 발산했다.

    “서로 견제할 필요는 없어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는 편이 나아요.”

    한 손으로 긴 창을 쥔 레다는 오오라를 발산하며 여유를 부렸다.

    강한 기세를 발산하면서도 차분한 눈빛으로 에어리스를 응시했다.

    “하아아압!”

    에어리스는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동안 무수한 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성장해 왔다.

    레벨4. 내재화.

    온몸에 오오라를 집결시키자 푸른빛의 얇은 띠가 보호막이 되어 온몸을 감싼다.

    레벨5. 초월화.

    넘치는 에너지가 초월적인 오오라를 발현된다.

    레벨6. 영원의 영역.

    한계 너머 아우라의 영역에서 무수한 가능성을 향한다.

    “6단계.”

    에어리스의 전신에서 막대한 기운이 치솟았다.

    영원의 영역에 갓 도달한 에어리스가 최대로 발휘하는 힘이었다.

    “저도 보여 드리죠.”

    레다는 차분한 눈빛으로 온몸에 서리는 기운을 모았다.

    작고 미세한 오오라가 순식간에 증폭해서 매섭게 주위 반경으로 뻗어 나갔다.

    대지를 덮어가던 그 기운은 아까 문지기가 발휘하던 파괴력을 가뿐히 능가했다.

    “영원의 영역. 그 안에는 자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있죠.”

    휘날리는 금발 속에서 레다는 빈손을 들어 가만히 쳐다봤다.

    “내가 도달한 경지는… 아직 당신이 따라올 수 없습니다.”

    레다가 호흡을 한 번 내쉬었다.

    그 작은 숨결은 마치 에어리스를 향한 이야기 같았다.

    <별자리에서 탄생한 자>

    영원의 영역에서 도달한 경지.

    자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

    레다는 그 경지를 터득한 자였다.

    “문지기가 가졌던 힘?!”

    관문의 문지기는 <영겁의 세월을 지키는 자>를 얻었다.

    관문을 지키는 대가로 수십억 년의 세월을 보낼 수 있는 영생을 받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

    조커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분신체를 소환하면서 자신의 길을 깨달았다.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특성을 개화시켰다.

    “당신은…….”

    쌍둥이처럼 닮은 금발의 그녀, 레다도 새로운 특성에 도달했다.

    영원의 영역.

    <별자리에서 탄생한 자>

    레다는 우월한 위압감을 발휘하며 원형의 금색 아우라를 발산했다.

    그 강렬한 기세에 밀려 에어리스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듯이 물러났다.

    “설마…….”

    저 힘을 목격하면서 에어리스의 뇌리에는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곧 레다가 누군지 떠올랐다.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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