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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25화 (125/229)
  • 125화 결사적인 하루(1)

    고원은 적막했다.

    하루가 지났음에도 마치 아무도 없다는 듯이 조용했다.

    넓은 평원 중앙에는 오각형의 기지 하나가 세워졌는데, 서열 7위가 불과 하루 만에 만든 본거지였다.

    내부가 아직 정돈이 덜 되어 거친 돌무더기 같은 로비에는 검푸른 머리의 소년 같은 외모를 가진 서열 7위가 있었다.

    “이곳에서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면 되겠어.”

    서열 7위는 푸른 알갱이의 오오라를 머금은 채로 돌무더기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어두운 공간에서 정적과도 같은 고요가 흐르는 동안, 서열 7위는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인간은 아홉 명이고 내게 두 명이 있다.”

    D와 J 자매는 이미 확보한 자원이었다.

    두 명을 확보했지만 나머지 일곱 명의 인간들도 모두 잡아서 테스트 실험을 하고 싶었다.

    “서열 1위…….”

    최고로 높은 자리를 원했다.

    야망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세계의 정상이 되고 싶은 법이다.

    공간의 주인인 서열 1위를 힘으로 제압하여 지배권을 위임받는다면 이곳을 차지할 수 있다.

    “가능성은 있다…….”

    자신보다 높은 서열을 가지고 있는 코어는 총 여섯 명이다.

    서열 1위를 꺾으려면 먼저 이들을 모두 넘어서야 했다.

    ‘강해져야 한다.’

    고탑전의 게임은 원대한 도전을 향한 첫 발걸음이었다.

    마침 이곳의 감독관은 6위였고, 눈엣가시처럼 자신의 자리를 노리던 8위도 여기 있었다.

    “이번 기회에 둘 다 없애고 서열을 올릴 것이다.”

    고탑전의 승부는 이곳에 벌어진다.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서 일대일로 결판을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인간에게서 더 강해질 가능성을 찾는다.”

    서열 7위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만든 본거지에 들어갔다.

    로비로 들어가며 다음 단계의 계획을 하나하나 구상할 즈음이었다.

    낯선 자의 발자국이 느껴졌다.

    “누구지……?”

    게임상이지만 이곳은 서열 7위가 지배하는 구역이었다.

    오각형의 본거지를 굳이 만든 이유는 힘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건축물이나 조각을 세워서 권력의 상징으로 삼는 일은 태초부터 약자를 굴복시키는 상징이었다.

    내 건축물에 고개를 숙여라.

    총 97명의 참가자 중 42명이 휘하에 굴복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밖에 깔린 녀석들이 있었을 텐데…….”

    “42명의 보초들 말인가요?”

    어두운 로비에 나타난 자는 가볍게 응수했다.

    한 걸음.

    그가 조금 더 앞으로 나왔다.

    “전부 제압했어요.”

    나타난 사람은 유진하였다.

    서열 7위의 새로운 본거지에 대범하게도 혼자 나타났다.

    “밖에 있던 녀석들은 전부 서열 100위 안에 있다. 인간들이 그걸 이겼단 말이냐? 그것도 너희는 다 해 봐야 겨우 일곱 명인데?”

    “가능해요.”

    유진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대답은 진심이었다.

    “싸우는 방법을 당신들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기술적으로 이런 전술에 최적화된 사람들도 있고요.”

    “…….”

    서열 7위는 잠시 말을 멈췄다.

    “본거지를 만들어서 방어적으로 움직인 게 실수였군…….”

    “그렇죠. 어떤 철통같은 방어라도 빈틈은 존재하거든요.”

    난공불락의 성이란 없다.

    어떤 성도 하나의 틈이 거대한 성벽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결국에는 무너뜨리기 마련이었다.

    “거점은 땅에 박힌 곳이에요. 공략할 부분이 있어요.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기도 하고요.”

    사실 본거지 공략은 굉장히 면밀한 분석으로 시작했다.

    상대는 전 방향을 방어해야 하기에 동서남북으로 병력이 분산된다.

    42명을 나눠서 경비를 서려면 한 방향마다 10명씩 배치해야 하는데, 7명의 인간이 한곳에 집중한다면 공략할 기회가 생긴다.

    42 대 7이 아니라, 10 대 7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인간들을 너무 얕봤던 건가?”

    서열 7위는 눈꺼풀을 내리깔고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선택과 집중에서 실책을 범해 로비까지 인간의 침입을 허용한 것에 불쾌감이 강하게 치밀었다.

    전략의 승리를 거둔 유진하는 당당하게 이곳에 들어섰다.

    “모략과 기습. 암살에 전문가급인 사람이 있어서 이 정도면 공략이 가능해요.”

    조커, 에이스, 괴도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대가들이었다.

    출중한 전투력을 지닌 코어들이라도 저 셋이 힘을 합치면 배후를 찌르고 속여 넘기면서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은밀하고 조용하게.

    모략과 암계의 영역에서 그들은 전문가였다.

    “만약 당신이 진영을 옮겨 다녔으면 우리는 일주일이 걸려도 당신을 따라잡기 어려웠을 거예요.”

    “인간의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는데… 불찰을 인정하겠어.”

    서열 7위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루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인간에게 무려 42명의 코어 생명체가 제압당하고 본거지 침입을 허용했다.

    눈앞에 나타난 인간의 실력을 인정해야 했다.

    “서열 8위가 있다. 여기서 싸운다면 녀석이 끼어들겠지.”

    “거긴 감독관에게 맡겼어요. 아마 여기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거예요.”

    고탑전의 감독관은 서열 6위 파이였다.

    이소민과 함께 지냈던 파이와 연합하면서 그에게 서열 8위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럼 안심이군.”

    서열 7위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가장 신경 쓰이는 적은 자신과 동급인 최상위 서열들뿐이다.

    애초에 인간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지금이 모두를 한 번에 차지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로 여겨졌다.

    “인간들이 제 발로 들어왔으니 나쁘지 않아.”

    검은 오오라가 서서히 알갱이가 되어 사방에 깔렸다.

    안개처럼 사방을 뒤덮어 가는 검은 기운이 장내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이 싸움… 받아 주지.”

    서열 7위는 유진하가 최초로 만난 강적이었다.

    에어리스와 이소민이 완패를 당했고, 그 결과로 D와 J 자매를 빼앗겼다.

    “당신에게 있는 두 사람을 되찾겠어요.”

    “인간을 원하나?”

    서열 7위는 냉정한 눈빛으로 가만히 쳐다봤다.

    검은빛의 기운으로 물들어 가는 이곳에서 두 명의 존재가 기둥 뒤에서 서서히 나타났다.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라.”

    서열 7위의 양옆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D와 J 자매였다.

    검은 오오라를 머금은 두 사람은 가슴에 코어가 박힌 채로 무섭게 다가왔다.

    “두 사람…….”

    유진하는 마침내 둘과 만났다.

    자매 요원은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이 사라진 듯한 눈빛으로 죽음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태도(太刀)를 든 D.

    한 손 검을 든 J.

    두 사람은 자신들이 애용하던 무기까지 들고 나타났다.

    “역시 기억은 없나요?”

    D와 J는 크리스탈 속에 갇혔던 자매였다.

    서열 7위에게 붙잡힌 두 자매는 녀석이 시키는 명령을 따르는 인형이 되어 나타났다.

    인형이 된 두 자매는 오오라를 뿜어내며 강한 적의를 보였다.

    “괜찮아. 어차피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유진하가 있던 로비 쪽에서도 두 사람이 나타났다.

    기둥 뒤에서 한 명씩 나타난 그들은 에어리스와 이소민이었다.

    “이번 승부는 우리가 맡기로 했잖아.”

    이소민은 어깨를 툭툭 털면서 기운을 으쌰으쌰 끌어올렸다.

    전투에서 항상 특유의 쾌활함으로 당당하게 나서곤 했는데, 이번에는 자매 요원을 되찾기 위해서 더 기운을 내었다.

    에어리스 역시 대검을 꺼내어 전투태세를 갖췄다.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그때였다.

    태도의 장검을 든 D는 서서히 손잡이를 잡았다.

    “발도술…….”

    D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가슴에 박힌 코어는 차츰 강한 빛을 내며 힘을 발휘했다.

    일섬.

    검은빛의 오오라가 검에 불길처럼 옮겨붙었고 온몸에는 얇은 띠 형태로 감돌았다.

    레벨4 내재화였다.

    “내가 맡겠어.”

    에어리스가 대검을 쥐며 나서려는 순간, 유진하가 먼저 치고 나왔다.

    유진하의 손등에 새겨진 태양의 문양에서 하얀빛의 오오라가 감돌았다.

    ‘같은 단계에 도달한다.’

    코어들은 동력원을 통해 에너지를 온몸 구석구석까지 보냈다.

    에너지 순환이 그들의 강함에 숨겨진 비결이었다.

    유진하를 비롯한 인간들은 에너지 축적만 사용하다가 코어에게 흐름을 배웠고, 배운 방법으로 문양의 힘을 순환시켰다.

    문양의 힘을 순환시킨 결과 유진하의 전신에 하얀빛의 오오라가 가득 차올랐다.

    “D…….”

    그녀는 간부 요원 중에서도 최정상 실력자였다.

    항상 책임감이 넘쳤으며 임무를 수행하는 데 목숨까지 걸었던 정예 요원이었다.

    알카트로스 소탕전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일행과는 자주 같이 연습하고 수련했다.

    신뢰하는 동료였다.

    “반드시 되찾겠어요.”

    유진하와 D.

    두 사람은 서로의 기세를 느끼며 전투에 들어갔다.

    “진하, 괜찮겠어요?”

    “에어리스가 나서면 검으로 상대하느라 버거울 거야. 내가 맞서는 편이 차라리 나아.”

    빛 대 일섬.

    폭풍우 같은 기운이 점점 더 치솟을 즈음.

    무섭게 몰아치는 오오라 기운이 마치 날개처럼 등 뒤에 발현됐다.

    레벨5. 초월화.

    빛의 날개의 유진하.

    검은 날개의 D.

    두 사람의 승부는 찰나에 판가름이 날 터였다.

    기세는 백중세였다.

    ‘모두가 함께 돌아간다.’

    유진하는 D를 제압해야 했다.

    그녀를 압도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일격으로…….”

    빛의 오오라가 하얀 띠처럼 온몸을 감싼다.

    날개처럼 펼쳐진 빛은 좌우로 퍼져 나갔다.

    “하아압!”

    코어의 에너지 흐름을 터득한 지금 유진하의 기력은 한층 성장했다.

    에너지 흐름을 통해 힘을 제대로 사용하자 온 사방에 충격파가 발산되며 로비의 바닥을 무너뜨렸다.

    “…….”

    D는 차분했다.

    한 번의 기술로 끝장을 내려고 발도술 자세를 유지했다.

    매서운 눈빛을 교환하며 서로 탐색전을 끝내고 동시에 달려들었다.

    ‘기억이 없다면… 아니, 조종을 당하는 거라면…….’

    무슨 이유이든 간에 반드시 되찾아야 할 동료였다.

    그녀의 심장 부근에서 이식된 코어가 오오라를 내뿜었다.

    D는 마침내 검을 뽑아서 강하게 휘둘렀다.

    7연속 일섬.

    좌우를 번개처럼 연속으로 지나치면서 일곱 번 연속으로 베는 기술.

    향상된 D의 일격이었으나 유진하는 미리 알고서 대처했다.

    ‘피할 수 있다.’

    아무리 재빠른 검술이라도 빛의 힘을 머금은 유진하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유진하는 차원을 가르듯이 날아오는 검을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피했다.

    하지만 D는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레벨5. 초월화.

    일곱 번이 아니었다.

    열 번.

    열두 번.

    스무 번.

    검기가 사방에서 속도를 올리며 계속 몰아쳤고 초월적인 기운으로 유진하를 몰아붙였다.

    공중으로 솟구친 유진하는 검날의 끝을 가까스로 피했다.

    동시에 D도 따라잡지 못하는 유진하의 속도를 압도하기 위해 모든 곳을 끝없이 베어 버렸다.

    40연속 일섬.

    폭풍 같은 베기가 끝난 후.

    유진하와 D는 공중에서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이 멈췄다.

    아래에는 D가 휘두른 검기의 궤적이 잔상처럼 남았다.

    파앗!

    D에 이어서 J가 달려들었다.

    공중에 뜬 유진하를 노리고 날리는 연계였는데 지금 순간을 노린 돌격이었다.

    ‘D. 그리고 J…….’

    유진하가 빛의 속도로 남아 있는 검기의 궤적 사이를 뚫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D와 J의 연계 속공은 무서웠으나 빛의 힘으로 성장한 유진하에게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래에 내려온 유진하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 높이 떠오른 D와 J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재차 검에 오오라를 모아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연계에 이어 최종 마무리.’

    하늘에서 모든 것을 갈라 버릴 각오로 자매는 최후의 일격을 내려쳤다.

    최후의 일섬과 한 손 검 일격.

    동시에 내려치기로 작렬했다.

    “유진하!”

    지켜보던 이소민과 에어리스가 소리쳤다.

    자매가 발휘하는 파괴력에 막강한 충격파가 일어나며 로비는 폐허처럼 무너져 갔다.

    일격의 승부가 모든 것을 갈라 버린 것이다.

    “좋은 검이었어요.”

    무너지고 흩어지는 로비 속에서 하얀빛이 나타났다.

    유진하는 두 사람의 베기를 피하지 않았다.

    만약 타이밍이 어긋났다면 완벽하게 자신의 몸체가 갈라졌을 치명적인 공격인데도 말이다.

    “…….”

    세 사람은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한 정적 속에서 두 개의 검이 멈췄다.

    유진하는 그 두 개의 검날을 하나씩 잡아냈다.

    “이제 되찾을게요…….”

    빛의 오오라가 서서히 검날을 타고 옮겨갔다.

    빛의 오오라는 D와 J가 내뿜는 검은빛의 오오라를 서서히 밀어내면서 두 자매의 몸을 완연한 하얀빛으로 뒤덮었다.

    두 자매를 되찾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아…….”

    검은 오오라 속에 있던 자매 요원은 온몸에 차오르는 하얀빛의 힘에 서서히 마음을 놓게 되었다.

    유진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당신은 인간에 대해 잘못 알고 있어.”

    “뭐라고?”

    서열 7위가 반문했다.

    유진하는 대답 속에 예리한 진실을 전달했다.

    “코어의 에너지와 인간의 감정이 가진 시너지를 알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려 한 거죠.”

    “…….”

    “가장 쉽게 꺼낼 수 없는 감정을 끌어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기 위해…….”

    서열 7위는 인간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D와 J는 오로지 분노의 감정으로 가득 찼다.

    적의가 가득한 감정으로 전투력을 올렸던 거였다.

    “적의와 적개심은 인간이 가진 감정의 최대치가 아닙니다.”

    빛의 힘이 검은 오오라를 몰아내자 그제야 자매는 온몸의 힘을 잃었다.

    “감정은 이런 게 아니야.”

    유진하는 쓰러져 가는 D와 J를 잡아 주며 잠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인간의 감정은 전투를 위한 영양제가 아니었고, 목적을 위한 재료도 아니었다.

    실체를 알 수 없지만 복잡하면서도 신비로운 마음이 감정이었다.

    “되찾겠다고 약속했고 그렇게 해냈어요.”

    유진하가 자매 요원을 되찾으며 마침내 아홉 명의 결사대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제 당신과 승부하겠습니다.”

    유진하는 건너편에 있는 서열 7위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결사대의 여정은 한계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와 맞서야 했다.

    서서히 전운의 기운이 감돌았다.

    “좋다.”

    서열 7위는 순순히 도전을 받아들였다.

    하나의 운명으로 시작한 결사대가 끝을 보기 위해 도전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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