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서열전(4)
유진하와 에어리스, 조커가 1층 서쪽에서 재회했을 무렵.
1층 북쪽 지역에서는 미션이 시작되었고, 방에 모인 18명의 코어 생명체들은 이질적인 두 사람을 의식했다.
“인간이 두 명이다.”
두 사람은 괴도와 에이스였다.
이 방의 유일한 인간이었고 차별화된 존재였다.
외부인을 경계하는 코어 생명체들의 눈빛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우리가 목표군요.”
괴도는 모자챙을 잡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옆에 있던 에이스는 A문양이 새겨진 백가면을 쓴 채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저들의 생각은 상관없어.”
에이스는 양복의 깃을 잡으며 정돈했다.
“출입구의 규칙은 이미 정해져 있었어.”
“그렇죠. 뻔한 방식이었습니다.”
출입문에는 트릭이 있었다.
입장 순서에 따라 시작 지점이 규칙적으로 바뀌어, 트릭의 규칙을 알아내면 서로 만날 지점을 맞출 수 있었다.
“유진하도 알고 있겠지?”
“나와 당신이 쉽게 알아낼 정도면 당연하겠죠.”
괴도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지력 U등급으로 평가받은 리더 유진하는 괴도와 에이스를 압도하는 지력을 가졌다.
결사대의 리더다웠다.
“우리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웃음을 싹 멈춘 괴도가 눈빛을 강하게 번뜩였다.
이미 그들만의 계략을 따로 준비해 둔 터였다.
지잉.
코어 생명체와 인간을 포함해 참가자가 전원 모이자 하얀 창이 생성됐다.
마침내 1층 방의 미션이 시작된 것이다.
-1층 북쪽 7번방에서 미션이 시작되었습니다.
-20명의 참가자가 대결해서 상대를 제압하면 방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통과자는 최소 1명부터 최대 3명까지입니다.
-보상> 2층 계단을 확보합니다.
“간단한 룰이야.”
에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력이 SSS 등급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두뇌전에 자신감이 있었으나 원래 전투적인 리더에 속했다.
고대로 치면 문무겸전이자 선봉에서 적진을 직접 돌파하는 지휘관이었다.
“저도 괜찮게 여기고 있습니다.”
괴도 역시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서서히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훔치기를 특기로 하는 도둑이었으나 전투와 지략에서도 뛰어난 실력자였다.
“다 이기면 되는 거니까요.”
상대는 18명의 코어 생명체였다.
전원이 서열 1000위 이내의 강자들이었고 즐비하게 자리 잡았다.
막강한 코어 생명체 집단을 향해서 먼저 움직인 쪽은 두 사람이었다.
괴도와 에이스가 당당하게 코어 무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주저함이 없는 발걸음이었다.
“크크크크.”
인간이 선제적으로 다가오자 코어 생명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비웃었다.
“먼저 잡는 쪽이 차지하는 걸로 할까?”
“그러지.”
이 특별한 대회에서 코어들의 목표는 모두 같았다.
‘아홉 명의 인간을 전부 차지한다.’
에어리스와 조커의 쇼케이스 전투를 통해서 코어들은 인간들의 실력을 어렴풋이 알았다.
하지만 이곳에 참가한 코어들은 당연히 인간들을 잡아낼 수 있다고 여기는 강자들이었다.
인간을 하나라도 차지하는 쪽이 협상이나 거래로 이득을 차릴 기회가 생긴다.
또, 자신의 서열을 올릴 수도 있었다.
인간은 귀중한 상품이었다.
“후후.”
결사대 멤버에서 괴도와 에이스는 전투 팀이 아니라 유인 팀을 맡았다.
리더 유진하는 두 사람이 전투력 면에서 에어리스나 조커에 비해서 밀린다고 평가 내렸다.
당연히 두 사람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하는 처사였다.
“우리 실력을 증명하도록 하지.”
에이스는 회심의 수를 꺼냈다.
전투 단계로 강해지는 코어 생명체에게 맞서기 위해서 비장의 수를 준비한 것이다.
“저건……?”
에이스와 괴도는 알 수 없는 뭔가를 스르륵 꺼냈다.
천천히 소환되는 그것의 정체는 뜻밖의 물건이었다.
코어였다.
“코어라고?”
참가자들은 의외의 물체가 나타나자 전원 경악했다.
소환된 열 개의 코어들은 공중에 자리를 잡았다.
괴도와 에이스는 코어를 둥둥 띄워서 그들의 반경을 호위하듯이 배치했다.
코어들은 마치 지구를 공전하는 달처럼 천천히 회전했다.
“우리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는 바로 코어입니다.”
괴도는 모자챙을 부여잡고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미소를 지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것이 긴박한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코어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코어들은 주의하는 눈빛으로 계속 다가오는 괴도와 에이스를 경계했다.
괴도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몸을 공전하는 코어 하나를 잡았다.
“코어는 무한에 가까운 동력원입니다. 이건 역으로 말하자면 훌륭한 에너지원이라는 거죠.”
손으로 움켜쥔 코어 하나에 오오라가 서렸다.
‘이 코어를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이런 생각에서 시작한 전략이었다.
코어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실이 연결되어 있었다.
코어와 연결된 실은 심장과도 연결되어 코어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보여 드리죠.”
괴도와 에이스는 두 사람만의 고유한 전략법과 공략법을 구상했다.
괜히 둘이 합치면 지력으로 유진하와 육박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레벨4.”
두 사람은 코어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받아들였다.
전신에 얇은 띠가 생겨나 보호막처럼 발현됐다.
전투 단계 레벨4를 발동시킨 것이다.
두 사람은 코어의 무한한 에너지를 받아들이며 천부적인 센스를 드러냈다.
하지만 코어 동력원을 통한 회심의 작전을 보였음에도 서열 1000위 이내의 코어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제법이긴 하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아.”
괴도와 에이스는 단 둘뿐이었다.
반면 코어는 18명이나 되었다.
같은 단계의 능력자라면 숫자가 많은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터였다.
“동의한다.”
에이스는 양손에 하나씩 물체를 소환했다.
고대의 페이퍼와 변형 펜이었다.
반경 100미터 이내에 법칙을 정할 수 있는 초레어 물품이었다.
“시작하지.”
슥삭.
에이스는 하나의 글귀를 일필휘지로 단숨에 적었다.
“됐다.”
에이스가 손에서 펜을 놓았다.
허공에 둥둥 뜬 고대의 페이퍼에서 새로운 규칙이 제정됐다.
간단한 규칙이었다.
-코어는 바닥에 떨어진다.
반경 100미터에 명령이 발동했다.
공전하던 열 개의 코어가 땅바닥으로 일제히 낙하했다.
동시에 건너편에 있던 모든 코어 생명체들도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코어를 가진 너희들에게만 적용하는 걸 적었다.”
인간은 심장이 있었다.
코어 생명체와는 다르게 코어가 몸에 있지 않았다.
“너희 코어들이 있어도 언제나 무릎 꿇릴 수 있다는 거다.”
에이스는 백가면 속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으면 고대의 페이퍼를 활용해도 극복할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수준의 전투 단계라면 개인 기량이 중요하다.
“다음은 제 차례군요.”
괴도는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빠르게 나아갔다.
바닥에 쓰러진 코어 생명체들이 억지로 다시 일어나려고 시도했다.
그 전에 기회를 잡아야 했다.
“내 주특기를 보여 드리죠.”
괴도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주특기 분야에 집중했다.
괴이한 도둑의 진짜 특기는 훔치기였다.
마치 급소를 찌르는 듯한 괴도의 손짓은 한 번에 하나씩 그들의 가슴 속 코어를 낚아챘다.
“크억!”
마치 수술하는 외과 의사처럼 재빠른 손놀림이었다.
“소중한 물건을 빼 가도록 하죠.”
괴도는 경이적인 손놀림과 반응 속도로 코어만을 깔끔하게 꺼냈다.
그 강한 코어 생명체가 두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사냥당한 것이다.
“후후.”
괴도는 18개의 코어 전부를 확보했다.
기존 10개의 코어만으로도 전투 레벨4에 도달했는데 18개나 더 수확했다.
그것도 서열 1000위 이내의 싱싱한 코어였다.
“미션 완료했습니다.”
코어들을 확보한 괴도가 돌아왔다.
에이스는 팔짱을 끼면서 괴도의 행동을 감상하듯이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카트로스를 재건하면 스카웃하고 싶군. 호흡도 잘 맞고.”
“후후, 저 말인가요?”
눈을 가린 하얀 가면을 쓴 괴도가 흐뭇하게 웃었다.
기분이 좋았는지 모자챙을 가볍게 잡으며 미소를 계속 유지했다.
서로 경계하던 에이스가 처음으로 인정해 주었다.
괴도의 맘에 쏙 들었다.
“알카트로스의 리더에게 직접 스카웃 제의를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쪽 의향은 어떤가?”
“좋은 제안이지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군요.”
“…알겠다.”
괴도단과 알카트로스는 결이 다른 조직이었다.
다만 합류까지는 아니어도 협력 정도는 충분히 고려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살아서 우리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다.”
에이스가 새로 얻은 18개의 코어를 9개씩 반으로 나눠 분배할 때
두 사람의 눈앞에 하얀 창이 생성되었다.
-미션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납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지.”
에이스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최상층에 올라가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야한다.
“유진하보다 먼저 올라가야 한다.”
분명한 목적이었다.
에이스는 리더 유진하를 강하게 의식했는데 자존심은 물론 모든 면에서 능가하기를 갈망했다.
괴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다음 수를 고심했다.
“서열 8위는 어디에 있을까요?”
괴도와 에이스는 서열 8위와 연합을 맺은 상태였다.
숙적인 서열 7위를 견제하려고 만든 동맹이었다.
“연합은 맺었으나 서로 개인적으로 움직인다. 자유로운 행동은 약속된 거다.”
“그건 압니다만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1층에서 벌써 올라갔을 수도 있지. 서열 8위의 위치보단 오히려 우리가 잡아야 하는 서열 7위, 아니면 유진하가 어디에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유진하는 지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괴도와 에이스는 1층부터 시작했기에 유진하보다 한 걸음 앞서가고 있었다.
“2층으로 간다.”
고탑의 최상층을 향해서 괴도와 에이스는 2층 계단을 올라갔다.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공략법을 사용해 코어의 개수를 늘렸다.
조커와 에이스의 성장은 유진하가 이번 국면에서 가장 바랐던 결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따로 계획이 있을 거야. 지략전에 탁월하니까 계획을 세워서 잘 해낼 테고.”
유진하의 전략.
괴도와 에이스의 전략.
양측은 서로가 경쟁하듯이 두뇌를 쥐어 짜내면서 성장해 갔다.
예상대로 괴도와 에이스는 스스로 성장했고, 자신들만의 계획을 만들며 상황을 해결해 갔다.
고탑전의 승부에 참여한 주요 세력들이 서서히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현재 2층에 도달한 참가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괴도와 에이스는 가장 앞서서 올라가는 편이었다.
한편, 중요 세력들도 순조롭게 게임을 진행했다.
검푸른 알갱이를 온몸에 두른 서열 7위는 D와 J 자매를 데리고 1층 미션을 통과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매 요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림자처럼 서열 7위의 뒤를 따라다녔다.
서열 8위는 혼자서 2층에 도달했다.
그의 온몸에는 검은빛의 번개가 감돌았다.
두 명의 최상급 서열자들은 인간 확보와 대회 우승을 동시에 노렸다.
유진하와 에어리스, 조커도 1층 방의 미션에서 무난하게 상대를 물리쳤다.
M의 소식은 불명이었다.
서열 1000위 이내의 상대는 적수가 되지 않았으나, 문제는 100위 안의 최상급 코어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2층에 올라갔고 가장 마지막에서야 유진하 일행이 2층에 도착했다.
이제는 서열 100위 이내의 코어들을 상대해야 했다.
“진하, 이제 2층이에요.”
에어리스는 긴장한 얼굴로 계단을 올라갔다.
하나씩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샘솟았다.
유진하는 물론 조커도 말없이 상황에 집중했다.
저 멀리 2층의 커다란 철문이 보였다.
“다 왔다.”
고탑전의 승부는 서서히 본격적인 승부의 장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층수를 올라갈수록 서열 7위를 비롯한 강자들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들을 구할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대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지하와 1층 미션은 튜토리얼에 가까웠다.
2층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서 생존자 전원이 참가하는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고탑전이 진행되었다.
-2층 방의 미션이 시작됩니다.
-이곳의 미션은 사왕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