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서열전(3)
조커는 방안에서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조커가 있었네요.”
에어리스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조커와의 재회를 기뻐했다.
벌써 첫 번째 인간을 만나다니… 그것도 전투에서 가장 강한 조커를 만났기에 자신의 운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다.
“다행이에요. 벌써 인간을 만날 줄은 몰랐거든요.”
“그런가. 나는 유진하를 만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네?”
에어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1000명이 참가한 게임에서 두 명이 초반에 만났다면 굉장한 운인데도 조커의 반응이 너무 침착했다.
“탑에 들어가는 순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정말인가요?”
“규칙이 나름대로 있었지. 유진하가 알려줬어.”
유진하는 입장하기 전에 밖에서 고탑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커, 들어갈 차례를 알았어요.”
“뭐라고?”
유진하가 조심스레 눈짓으로 고탑의 비밀을 알려 줬다.
“잘 살펴보면 참가자가 문에 들어갈 때마다 고탑의 일부분에서 빛이 살짝 새어 나와요.”
그 말을 들은 조커도 자세히 고탑을 살펴보다가 유진하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출입구에 들어가면 고탑의 여러 부분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워프 같은 건가?”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참가자들이 이동해서 전혀 다른 곳에 시작하는 거죠.”
출입문에 따라 차원문에 들어가듯이 이동에는 일정한 규칙성이 있었다.
고탑에 도착하는 곳마다 작은 빛이 새어 나왔다.
몇 번 살펴보니 순서가 있었다.
“처음에는 1층 서쪽. 다음은 1층 동쪽…….”
다음에는 북쪽과 남쪽을 거쳐 그 후에는 불빛이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빛이 안 보이는데?”
“그건 1층이 아니라는 걸 거예요.”
“1층이 아니라면…….”
“지하가 있다는 거죠.”
아아.
조커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에서 시작한다면 빛이 새어 나올 곳이 없었다.
“이걸 알아내다니 대단하다. 눈썰미와 판단력이 좋았어.”
“일부러 저렇게 한 걸 거예요.”
유진하는 다음 수도 예측했다.
무작위로 배치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규칙성이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은 같은 곳에서 시작해서 빠르게 팀을 꾸릴 수 있었다.
“치사한 수였어.”
조커는 이를 갈았다.
게임의 입장부터 치열한 두뇌전이 시작됐다.
유진하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인간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게임을 시작했을 것이다.
각개 격파.
저들이 가장 원하는 구도였다.
“이제 알았으니까 우리도 순서를 맞춰야죠.”
유진하는 조커에게 다음 계획을 알려 줬다.
조용히 은밀하게 속삭이며 지하에서 함께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층은 동서남북으로 배치되어 경쟁자들이 많이 시작하는 구도였다.
그렇기에 유진하는 지하에서 일단 인간들끼리 팀을 구성하는 편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지하에서 시작하면 1층보다는 아래라는 페널티가 있지만 빠르게 모일 수 있어서 유리해요.”
유진하는 결단을 내렸다.
에어리스에게도 설명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에어리스에게는 언제 들어가라고 지시만 하고 보내야 했다.
뒤늦게 모든 계획을 알게 되자 에어리스는 손뼉을 쳤다.
“아, 생각이 있던 거군요.”
“후후, 유진하가 먼저 나를 찾아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조커는 백가면 속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전투태세로 들어간 그는 가면을 쓰고 얼굴을 가렸다.
에어리스와의 재회를 자기 나름대로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첫 번째는 클리어했을 테고.”
“네, 코어들의 에너지 흐름을 이제 알았으니까요. 쉽게 당하지 않을 거예요.”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정보를 얻으면 모두가 공유해서 터득한다.
소수 정예의 팀으로서 그들의 적응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 팀은 기민하게 협력했다.
“그런데 이 방에서는 이제 뭘 해야 하는 거죠?”
에어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션을 안내하는 하얀 창이 나타났다.
-지하 중앙의 미션.
제한 시간 10분 동안 몰려오는 적들에게서 살아남으십시오.
-참가자 2.
-보상> 1층 계단을 확보합니다.
“10분 동안 무슨 적이 온다는 걸까요?”
에어리스는 대검을 움켜쥐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사방을 응시했다.
조커는 쌍단검을 들었다.
“뭔가 온다…….”
무엇이 오는 걸까.
괴물일까?
아니면 코어 생명체?
잔뜩 긴장한 얼굴이 되어 지켜보는데 아무것도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음산했다.
“…뭔가 있어요.”
보이지 않는 무언가 그들을 지켜보는 듯했다.
파앗!
갑자기 조커가 단검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에어리스가 바라보자 조커의 칼끝에는 어느새 피가 묻었다.
“괴물이다.”
조커는 짧게 중얼거렸다.
방금 벤 일격 탓에 사방에 괴물의 핏자국이 튀었다.
덕분에 투명했던 괴물도 핏물에 묻은 부분만 어렴풋이 드러났다.
“…투명화인가요?”
에어리스는 사태를 깨달았다.
이곳은 투명화 처리된 괴물들이 있었다.
아까는 일부러 울음소리와 살의를 줄이고 살금살금 다가왔다.
“조커는 알고 있었어요?”
“감각이다.”
조커는 차분하게 핏물이 묻은 투명 괴물을 응시했다.
전투에 심취했던 조커는 살의를 숨긴 괴물의 보이는 기슭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아무리 잘 숨겨도… 사냥꾼은 본능적으로 먹잇감이 근처에 있음을 감각적으로 깨달았다.
“감각으로요? 대단해요.”
에어리스는 대검을 강하게 쥐었다.
상대가 투명 몬스터라는 사실을 안 지금은 상대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핏물이 다리에 묻어 위치까지 알 수 있어서 더욱 쉽게 대처할 수 있었다.
“하아압!”
에어리스의 손등에 새겨진 문양에서 오오라가 발휘되었다.
검과 방패가 교차된 문양이 푸른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에너지 순환.
코어들의 강함에 숨겨진 비결이었다.
‘코어들과 같은 단계에 도달한다.’
에어리스는 코어들과 같은 방식으로 문양의 힘을 순환시켰다.
전신에 기운이 가득 차올랐다.
“제법이군.”
조커 역시 손등에 새겨진 쌍단검의 문양을 발휘했다.
붉은빛으로 발산되는 오오라는 에어리스와 마찬가지로 순환되며 체내에서 퍼져 나갔다.
에어리스의 푸른빛.
조커의 붉은빛.
두 사람은 최대로 발휘한 에너지를 온몸에서 둘렀다.
얇은 오오라의 띠가 그들의 몸에 서렸다.
레벨4.
내재화 단계였다.
에어리스는 투명한 괴물을 상대하며 과거의 악몽을 떠올렸다.
뉴욕 센트럴 파크 공원에서 차원문이 열릴 적에 무수한 괴물 떼가 뉴욕에 난입하려고 했다.
그때 한 마리의 뱀 괴물에게 정예 팀이 크게 고전했던 기억이 났다.
“이제는 달라요.”
에어리스는 온몸에 오오라를 머금은 채로 괴물들에게 달려들었다.
대검으로 일격을 내리치자 투명화 괴물이 단번에 갈라졌다.
촤아악!
쿵 소리와 함께 괴물은 이등분으로 잘려 쓰러졌다.
괴물이 죽었음에도 투명화 효과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후우.”
숨을 가다듬은 에어리스와 달리 조커는 쌍단검을 살짝 들어 주변을 경계했다.
“하나둘… 적어도 수십 마리가 더 있어.”
투명화 괴물은 집단 무리였다.
완벽한 은신이라 눈에 걸리지 않으니 놓친다면 당할 수 있었다.
“내가 하나씩 베어서 핏물로 자국을 남기겠다. 그 뒤에는 네가 단칼에 베어 버려라.”
조커는 연계를 제안했다.
에어리스는 받아들였다.
“부탁할게요.”
“시작한다.”
조커는 전투의 감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자였다.
순간 회피력은 이미 정평이 난 만큼 근접전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드러냈다.
수십 마리의 괴물은 조커의 반응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레벨4 내재화 단계까지 성장했으니 근접전의 속도가 한계를 모를 만큼 더 빨라졌다.
촤아악!
단검이 벨 때마다 괴물의 피가 솟구쳤다.
핏물이 표식처럼 뿌려지자 투명화된 괴물들이 하나하나 정체를 드러냈다.
이어서 에어리스의 대검이 녀석들을 하나씩 내리쳤다.
일도양단.
한 마리씩 완벽하게 처단했다.
쿠웅.
거대한 괴물들이 하나둘 바닥에 쓰러져갔다.
죽어서도 몬스터들의 투명화 효과는 유지했으나 핏물이 묻은 몸체가 그대로 뻗어 버렸다.
“이야아아압!”
에어리스가 사정없이 대검을 휘둘러서 괴물들을 베어 버렸다.
수십 마리의 괴물이 겹겹이 쓰러지며 모조리 나뒹굴었다.
-제한 시간 종료.
-미션을 통과했습니다.
미션 종료를 알리는 하얀 창이 나타날 즈음에는 상황이 종료되었다.
쓰러진 투명화 괴물들의 잔해 위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대검을 손에 든 에어리스.
죽은 괴물의 등에 쌍단검을 꽂고 가면을 벗은 조커.
두 사람은 좌우에 앉아 서로 반대편을 보고 있었다.
서로 쉬면서 자신이 맡은 방향을 미션이 종료할 때까지 경계했다.
“끝이다. 더는 나타나지 않아.”
조커는 가볍게 중얼거렸다.
더는 위협적인 존재가 없자 가면을 벗고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에어리스는 그런 조커가 문득 신경이 쓰였는지 물어봤다.
“그런데 가면은 왜 계속 쓰고 있는 건가요?”
“내 가면 말인가.”
“답답하지 않으신가요?”
에어리스의 순수한 의문에 조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웠다.
“오히려 쓰면 더 답답하지 않아.”
“가면을 쓰는 게 낫다고요?”
“그래.”
조커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감상에 잠긴 듯이 중얼거렸다.
“사람은 감정을 드러내지. 하지만 가면 속에 숨기고 싶은 것도 있거든.”
“…….”
그 말을 남기고 조커는 짧은 여운이 담긴 웃음을 보이며 다시 가면을 썼다.
피에로 문양이 새겨진 백가면.
조커는 가면을 다시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두르자. 이제는 1층에 올라갈 수 있다.”
“네, 그럴게요.”
무수한 괴물의 잔해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건너편 새롭게 나타난 계단을 발견했다.
고탑의 지하에서 시작해서 재회한 에어리스와 조커는 마침내 1층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1층에서 시작한 녀석들은 우리보다 훨씬 유리하다.”
“벌써 2층까지 간 코어들도 있을 수 있겠죠?”
“그렇겠지.”
에어리스는 조커가 잡담을 나누면서 계단을 올랐다.
처음에는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었으나 동료가 되면서 어색했던 둘의 사이는 한결 나아지게 되었다.
방금 전 연계에서도 손발이 맞는 호흡을 보였다.
결사대의 동료로 서서히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다.
“1층이에요.”
마침내 도착했다.
지하에서 시작하느라 남들보다 늦은 출발이었다.
“이제 왔어?”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곁에서 들었으나 지금은 더 반가운 그 사람이었다.
“진하!”
유진하가 1층 복도에 있었다.
무사한 모습으로 근처에서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하는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요?”
“금방 올 줄 알고 아까부터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늦었네.”
에어리스와 조커는 어안이 벙벙해서 유진하를 바라봤다.
혼자 복도에 주저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니.
“투명한 방에서 힘을 합쳐서 올라왔어요. 우리도 나름 빨리 온 줄 알았는데 진하가 먼저였네요?”
“그러게.”
유진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어렵지 않은 과제였어.”
“아, 네.”
조커와 에어리스가 연합해서 클리어한 투명 괴물을 제압하는 미션이었는데, 유진하는 가볍게 통과했는지 먼저 와서 쉬고 있었다.
“무작위 출입에서 패턴에 따라 지하로 셋이 왔어. 그래서 1층 복도에서 기다리면 반드시 모두가 만날 줄 알았어.”
첫 입장부터 1층까지.
유진하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돌아갔다.
과연 결사대의 리더이자 인간 최고의 지략가다웠다.
“다른 녀석들은 벌써 갔을 거야. 이제 우리도 서두르자.”
유진하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고탑의 과제에서 세 사람이 다시 모였고 찾아내야 할 인간은 아직 여섯 명이 남았다.
한편 현재 선두에는 유진하보다 앞서 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괴도와 에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