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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20화 (120/229)
  • 120화 서열전(2)

    “2라운드는 고탑전이다.”

    단상에 당당히 선 서열 6위 파이는 크게 소리쳤다.

    현존 참가자를 아우를 정도로 가장 높은 서열에다 대회 감독관을 맡고 있어, 개회를 선언할 위치에 있었다.

    “자, 지금부터 이 거대한 탑을 올라가는 거야.”

    파이의 곁에서 검은 망토를 쓴 열 명의 심판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엄숙하고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조용했다.

    “탑에는 많은 과제가 있어. 그것들을 뚫고 제일 꼭대기에 도착한 녀석들만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다.”

    붉은 머리의 파이가 규칙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2라운드는 고탑의 최정상에 올라가는 게임이었다.

    “입장 순서는 추첨으로 정한다. 어느 문으로 들어가든 시작 위치는 달라져. 너희들은 흩어져서 시작하게 될 거야.”

    고탑에는 수많은 문이 있었다.

    어디로 가든 팀원들과 떨어져서 시작한다.

    개인 행동을 권장하는 방식이었다.

    “흩어져서 시작하는 건가.”

    조커는 가면을 만지작거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체 혼자 움직이기를 선호하는 터인데 자신한테 딱 맞는 규칙이라 만족스러웠다.

    반대로 에어리스는 울상이 되었다.

    “진하, 저 안에 들어가면 흩어진다고 하네요.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들어가서 살펴봐야 알 거 같아.”

    외부에서는 높다란 고탑만 보였다.

    탑에서 안개가 흘러나와 고풍스러우면서도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끝없이 하늘 높이 올라간 저 탑 너머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심판관은 곧바로 게임을 시작했다.

    “자, 대충 이해했으면 들어가라.”

    서열 7위 파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직접 겪어보는 거야. 재밌잖아.”

    묘하게 으스스한 분위기가 퍼졌다.

    모든 참가자들이 탑으로 들어갔다.

    도착하는 지점은 무작위였기에 어느 문으로 들어가든 다들 똑같은 입장이었다.

    “시작이다.”

    유진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세웠다.

    -고탑 최상층에 도달한다.

    -아홉 명의 동료들을 모두 되찾는다.

    고탑에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계획이었다.

    각오와 함께 연기를 내뿜는 무수한 문 중 하나로 유진하가 들어갔다.

    마치 괴물의 아가리를 향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깊고 음습한 불가사의한 세계로 들어섰다.

    * * *

    “여기는……?”

    탑에 들어오고 처음 본 것은 넓은 방이었다.

    방은 돌벽으로 만들어진 평범한 방이었는데 돌벽)사이에는 이끼나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특별한 장식 없는, 모래와 돌멩이만 가득 찬 메마른 장소였다.

    “어?”

    갑자기 하얀 창이 생성됐다.

    감독관이 보낸 메시지가 모두에게 전달된 것이다.

    -탑 곳곳에는 미션이 존재하며, 해당 과제를 통과해야 지나갈 수 있습니다.

    -미션 중에는 보상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해당 보상을 받으면 앞으로의 과제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미션이 중요하구나.”

    유진하는 메시지를 보면서 하나씩 포인트를 잡아냈다.

    고탑 곳곳에 있는 미션 중에서 필요한 과제를 빠르게 클리어하는 편이 중요했다.

    그때였다.

    건너편의 문이 하나 열리더니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인간이 있었어?”

    짧은 머리를 한 코어 생명체가 당당하게 다가왔다.

    유진하는 긴장한 낯빛을 숨기고 상대를 맞이했다.

    때마침 이 방의 미션이 시작됐다.

    -지하의 방에서 미션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대일 대결로 상대를 제압하면 방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일대일 승부로 결판을 내라는 미션이었다.

    유진하는 첫 번째 단계부터 코어와 정면으로 겨루게 되었다.

    “당신의 서열은?”

    “나는 서열 927위다.”

    이전에 유진하가 목숨까지 걸어서 싸운 적이 서열 4021위였다.

    서열 927위라면 전체의 0.03%에 해당하는 강자였다.

    “처음부터 인간을 얻을 수 있을 줄이야. 운이 좋은데?”

    코어는 인간을 전리품처럼 취급했다.

    그래서 아홉 명의 인간을 모두 모으려고 들었다.

    인간을 노리는 코어들이 많은 터라, 그들에게 인간은 매력적인 가치품처럼 되었다.

    “당신을 이겨 내겠습니다.”

    유진하는 각오를 굳혔다.

    서열 1000위 이내만 참가하는 게임이었고, 누구와 맞붙어도 고전할 수밖에 없는 승부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빛의 힘…….”

    손등에 새겨진 태양의 문양이 하얗게 빛났다.

    하얀빛이 손등에서 피어올라 전신에 오오라가 감돌았다.

    “조금은 힘이 있나.”

    서열 927위는 유진하가 발휘하는 힘을 지켜보다가 전투 단계를 끌어올렸다.

    “레벨4.”

    내재화 단계였다.

    실루엣처럼 온몸에 씌워진 기운이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저 오오라의 기운과 상대하기에 빛의 힘은 파괴력이 부족했다.

    “정면 승부…….”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코어는 동력원이었고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를 발휘했다.

    막강한 코어에 비해 심장은 한계가 있었다.

    뿜어낼 수 있는 피와 에너지가 부족했다.

    ‘녀석의 오오라를 뚫을 수 없어.’

    이기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5단계가 초월이라고 했지?”

    유진하는 차분했다.

    서열 4021위를 상대하면서 4단계 내재화를 이겨 낸 경험을 얻었다.

    그 경험은 이번 싸움을 앞두고 값진 교훈이 되었다.

    “심장. 그리고 빛.”

    심장은 유한하나 빛은 무한했다.

    심장이 뿜어내는 피는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었고, 그 속에는 이성과 감정이 담겨있다.

    전투에만 심취한 코어는 기계적인 동력원을 가졌으나 그뿐이었다.

    숙적이던 서열 7위가 인간을 모으려고 애쓴 이유 역시 스스로 느끼는 한계가 있기 때문아닐까.

    초월을 넘어서는 단계.

    유진하는 처음으로 그 너머를 인식했다.

    “…넘어서겠어.”

    수십억 년의 시간을 걸쳐 인간은 수많은 진화를 거쳤고 발전했다.

    인간은 학습하면서 진화하는 생명체였고, 지금은 코어의 에너지 흐름을 배웠다.

    유진하는 죽음의 고비에 닿을 때마다 기적처럼 한계를 넘어서려고 들었다.

    “무한의 빛.”

    저번 전투에서 죽음의 고비를 거치며 가까스로 깨달은 노하우였다.

    몸 안으로 빨아들인 빛의 에너지를 전신으로 흘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피를 순환시키듯이 빛도 따라서 흘러갔다.

    -대류의 흐름처럼 몸 안에 빛을 흘린다.

    예전에는 빛이나 오오라를 저장하는 방식만 활용했다.

    빛을 모으는 데만 집중하니, 빛의 카드가 각인된 심장 중심으로만 모였고 양도 한정됐다.

    반면 코어는 동력원에서 발산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흘린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생명체들이 코어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피의 순환.

    공기의 대류.

    바다의 해류.

    육체에 저장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순환하는 흐름에 따라 온몸에 스며들게 한다.

    에너지 순환과 빛의 흐름.

    그것이 코어가 에너지를 활용하는 비결이었다.

    ‘에어리스가 봤던 에너지의 흐름이 힌트가 되었어.’

    테두리를 두르듯이 하얀 띠가 온몸을 감쌌고, 이어서 강한 기운이 양 날개처럼 발산되었다.

    육체는 차츰 완전한 빛을 머금어갔다.

    레벨4 내재화를 넘어서 레벨5가 발현되었다.

    “초월화?”

    초월화 단계는 서열 100위 이내만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경지였다.

    “인간이 가능하다고……?”

    서열 927위는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유진하가 발휘하는 빛의 오오라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초월이라는 힘이었다.

    밝은 빛은 태양 자체가 되었다.

    “으아아아아!”

    서열 972위는 양손에서 막강한 오오라를 발휘했다.

    두 손에 모은 오오라가 하늘까지 치솟아서 마치 명검처럼 빛났다.

    “…….”

    유진하는 가만히 기다렸다.

    상대의 검기는 마치 거대한 불길처럼 강하게 솟아올랐으나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었다.

    촛불이 약할수록 바람에 흔들리듯이.

    유진하가 보기에는 미흡해 보였다.

    “승부다…….”

    서열 972위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몸에서 뽑아낸 검기가 유진하의 심장을 노렸다.

    격렬한 굉음이 발생했다.

    두 사람이 맞부딪친 충격으로 발생한 파동이 사방에 뻗어 나갔다.

    파편이 튀기는 혼란한 상황 속에 두 사람은 그 파동의 흐름을 버텨 내고 있었다.

    “크윽!”

    서열 972위는 자신이 발휘한 검기가 산산이 흩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검기가 빛의 오오라를 실루엣으로 두른 유진하에게 피해를 전혀 주지 못한 것이다.

    하얀빛으로 둘러싸인 유진하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눈빛이 빛날 즈음이었다.

    유진하의 손이 서열 972위의 상체로 향했다.

    콰앙!

    순간 폭발력이었다.

    유진하가 발휘한 빛의 기운은 일격으로 상대에게 작렬했다.

    한 단계 위의 힘.

    빛 자체로의 초월화.

    초월적인 빛의 파괴력이 발산됐다.

    “크억!”

    빛의 에너지가 파동처럼 발휘되어 일격만으로 상대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 버렸다.

    온몸에 빛을 순환시켜 초월적인 힘으로 발전시켰다.

    코어는 강하지만 인간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다.

    -상대의 전투 레벨을 보면서 빠르게 학습한다.

    초월적인 빛의 오오라 속에서 유진하는 서열 972위를 압도했다.

    “지금…….”

    유진하는 역습을 시작했다.

    첫마디를 남기고 쉴 틈 없이 빛의 공격이 휘몰아쳤다.

    마치 번개가 전후좌우에서 몰아치듯이 들어갔다.

    “빛처럼…….”

    섬광 같은 빛이 강하게 나돌았다.

    초월화 단계에서의 빛은 무수한 궤적을 그리면서 공중에 상대를 띄우고 내리쳤다.

    상대의 오오라 기운은 완전히 무너졌다.

    촤아악.

    하늘에서 빛으로 내리꽂은 유진하가 바닥에 착지했다.

    바람이 빠져나가 진공이 되듯이 사방에 먼지와 파편이 흘러갔다.

    치열했던 싸움이 단숨에 끝났고, 주변은 고요해졌다.

    유진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손안에 무언가를 쥐었다.

    코어였다.

    “이겼어…….”

    서열 972위는 사라지고 코어만이 남았다.

    그들에게 심장 같은 존재인 코어 동력원이 유진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해냈어…….”

    레벨5 단계인 초월화를 이뤄 냈다.

    저들의 장점인 전투 단계를 하나하나 배워 가고 있었다.

    그들과의 대결은 한계를 깨우치는 과정이었다.

    전투가 끝나자 몸에서 사라져 가는 빛의 알갱이를 보면서 잠시 감상에 잠겼다.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는 코어만이 아니었다.

    인간도 충분히 가능했다.

    “서열 7위가 인간을 원한 이유…….”

    그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았다.

    유진하 역시 코어의 모든 것을 배웠다.

    에너지의 흐름과 활용법.

    빛의 오오라를 순환시켜서 초월적인 에너지로 진화시키는 힘을 알아 갔다.

    이제는 자신감이 생겼다.

    “해내겠어.”

    유진하는 처음으로 희망을 보았다.

    무한한 빛과 가능성의 인간이 이루어 낸 힘을 믿게 되었다.

    그즈음 전투의 종료를 알리는 하얀 창이 생성됐다.

    -지하의 방의 미션이 종료되었습니다.

    -승자가 나갈 수 있는 방이 생성됩니다.

    문 하나가 생겼다.

    이제 저기로 나가면 새로운 통로나 방으로 갈 수 있었다.

    “에어리스와 다른 사람도 찾아야 하는데…….”

    고탑에는 아홉 명의 인간들이 있었다.

    코어가 인간을 확보하기 전에 서둘러 모두를 찾아내야 했다.

    이 고탑전에서의 승부는 최상층에 도달하는 목표도 있지만 누가 인간을 모두 확보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유진하가 결사대 멤버를 되찾느냐.

    서열 7위와 8위가 인간을 차지하느냐.

    “시간이 없어.”

    유진하는 출구로 빠져나갔다.

    기나긴 통로가 보였고 많은 문이 있었다.

    이 길 어딘가에서 인간들은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을 터였다.

    빨리 그들을 찾아내야 했다.

    * * *

    “허억. 허억.”

    에어리스는 대검을 등에 메고 복도를 달려가고 있었다.

    유진하처럼 지하 방의 첫 승부에서 승리하고 방금 길을 나선 거였다.

    “길이 너무 많네요.”

    복도에는 수많은 문이 있었다.

    어디로 가야 유진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지.

    아니면 최상층까지 올라가는 길을 찾아낼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넓은 통로의 양옆에는 똑같은 방이 있었다.

    어디가 좋은지 알 수 없어서 에어리스는 발걸음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심 끝에 새로운 방법을 떠올렸다.

    “운도 중요하다고 들었어요.”

    손아귀에 작은 돌멩이를 들었다.

    눈을 감고 돌을 던져서 더 가까운 방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나. 둘.”

    에어리스는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 돌멩이를 가볍게 던졌다.

    톡톡톡.

    몇 번을 구르던 돌멩이가 이윽고 멈췄다.

    “됐어. 이 방으로 가겠어요.”

    에어리스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윽고 용기를 내어 돌멩이가 점찍어 준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끼이익.

    작은 소리를 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낯익은 자와 마주했다.

    “에어리스인가.”

    “당신은……?”

    백가면의 남자.

    조커가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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