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서열전(1)
서열전 1라운드.
조커는 100명의 신생 코어를 압도적으로 제압하다가 에어리스의 제지를 받게 된다.
“남은 시간 동안 막겠다면 너도 상대해 주지.”
“경기는 끝났어요. 무의미한 학살은 그만해도 돼요.”
두 사람은 팽팽하게 맞섰다.
조커는 게임의 규칙대로 신생 코어를 모조리 없애겠다는 의도였다.
반면 에어리스는 저들이 전의를 잃고 물러났으니 더는 싸울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
두 사람의 대결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이어지려는 찰나였다.
의외로 둘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전투가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서로 치열하게 싸웠던 적도 있었고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잠시만요…….”
유진하는 에어리스와 조커의 다툼을 옆에서 지켜봤다.
에어리스가 곁눈질로 옆을 살짝 바라봤다.
두 사람의 대결을 말리는 기색도 특별한 반응도 없었으나, 손등에 있는 태양의 문양이 살짝 빛났다.
“에어리스와 조커 둘 다 맞는 소리야. 7분이 남은 것도 그렇고 아직 경기가 끝난 건 아니니까. 물론 더 신생 코어와 싸울 필요는 없고.”
“진하…….”
“남은 7분 동안 둘이 대련으로 연습하면 어떨까?”
대결이 아니라 대련이었다.
유진하는 신생 코어들이 있는 쪽을 가볍게 쳐다봤다.
저들은 전의를 잃었으나 틈이 생기면 대항할 것이다.
“둘이서 실력을 보여 주자.”
결사대의 멤버 중 에어리스와 조커는 전투력 U등급의 최고 실력자였다.
두 사람은 3백만 코어 중에서도 최상위 0.1% 해당하는 실력자였다.
갓 태어난 신생 코어들과 겨룰 실력이 아니었다.
“지켜보는 눈이 있어. 쇼케이스를 보여 주는 거야.”
서열 7위가 인간을 확보한 후로 세상에는 인간을 차지하면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다른 코어들은 인간을 비싸게 팔아먹거나 협상에서 유리하게 이용할 가치품으로 여겼다.
그런 뜨내기들이 계속 덤벼들면 일일이 상대하느라 진땀을 흘릴 터였다.
‘무력시위.’
게임을 지켜보는 코어들이 많은 지금, 에어리스와 조커가 막강한 전투력을 선보이면 충분한 광고가 되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들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 주기에 지금 이자리가 가장 적절했다.
“그러지.”
조커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남은 시간 7분 동안에 전력으로 에어리스와 겨루도록 허락을 받았다.
“최근에는 우리끼리 승부를 겨뤄본 적이 없지.”
“그렇긴 해요.”
에어리스는 숨을 크게 내쉬더니 긴장한 상태가 되었다.
조커의 실력은 나날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연습이라도 전투에서 사정을 봐줄 리가 없었다.
“최선을 다할게요.”
에어리스가 온몸에서 강한 오오라를 발휘했다.
손등에 새겨진 검과 방패가 교차된 문양에서 푸른빛이 감돌았다.
“제대로 간다.”
조커도 기운을 발산했다.
손등에 새겨진 쌍단검의 문양에서 붉은빛이 피어올랐다.
조커와 에어리스는 정면에서 격돌했다.
대검과 쌍단검이 맞부딪치자 충격파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앙!
서로 맞부딪친 오오라의 기운이 강렬하게 퍼져 나갔다.
숱한 사투를 거친 두 사람은 코어들의 세계에서도 최정상에 도전하려는 인간들이었다.
갓 태어난 피라미들이 상대할 수준은 아니었다.
1라운드에서의 무력시위는 예상보다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인간들이 약하지 않다.’
지켜보던 코어들은 모두 놀랐다.
조커와 에어리스가 발휘하는 위력은 일반 코어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거세게 맞부딪치는 조커와 에어리스는 7분간의 접전을 벌였다.
별거 아닌 듯한 행동 하나가 훗날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는 법이다.
장기나 체스에서도 한 수가 전체 판세를 가른다.
‘하나의 수가 전황을 좌우한다.’
아홉 명의 결사대를 이끄는 리더 유진하는 때로는 과감하게 행동했다.
조커와 에어리스의 무력시위는 제대로 성공했다.
지켜보던 코어들을 힘으로 눌러 버렸고 이제 인간들에게 도전할 자들은 강자들만 남았다.
“인간이라…….”
두 사람의 전투를 지켜보던 코어 중에는 최상위 등급도 있었다.
서열 7위였다.
머리카락에는 검고 푸른 알갱이가 감돌았다.
“서열전에 참가하다니…….”
유진하 일행은 도망치지 않고 태초의 요람에 들어왔다.
자신의 본거지를 기습한 후에 예상치 못한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이제 모두가 인간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걸 자청한 걸 테고.”
서열 7위는 이미 D와 J 두 명의 인간을 얻은 상태였다.
나머지 일곱 명의 인간도 전부 얻을 계획이었는데 이번 쇼케이스 덕분에 세상의 이목을 모두 끌었다.
“인간 중에서 저 셋이 가장 강하다는 건가. 지켜보겠어.”
무감각한 코어와 달리 인간들은 인간만의 ‘감정’이 존재했다.
극한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말하는 희생과 저력에 관심이 생겼다.
서열전은 순위가 정해지지 않은 자들만 참가하는 대회였다.
서열 7위는 참가 자격이 없어서 지금은 지켜봐야 하지만 순순히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너희 생각대로 순순히 되지는 않을 거다.”
머릿결에서 검푸른 알갱이가 아른거렸다.
알갱이는 서열 7위가 걸어갈 때마다 가루처럼 떨어졌고 오오라의 흐름에 따라 그 크기가 조금씩 커졌다.
서열전은 인간들의 참전으로 급변 사태를 맞이했다.
1라운드.
조커와 에어리스의 무력시위가 화제가 되며 마무리되었다.
* * *
서열전에 참가한 인간 팀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신생 코어가 시작하는 대회였는데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바람에 무수한 시선이 이곳으로 쏠리게 되었다.
“인간들이 강하다…….”
신생 코어만으로는 승부가 되지 않았다.
수백만 코어의 세계에 단 아홉 명뿐인 인간들이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2라운드에서는 새로운 양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대회를 확대 개편한다고 하더라.”
서열 6위는 절벽 정상에 서서 가만히 먼 곳을 바라봤다.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에는 불꽃이 감돌았다.
“신생 코어만이 아니라 모든 코어가 참가할 수 있게 바꿨어. 대신 대회 운영을 나한테 맡겼다.”
새롭게 개편되는 대회의 운영을 맡은 서열 6위 파이는 기분이 꽤 좋은 듯했다.
옆에서 허리 운동하던 이소민은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대회가 커졌다고?”
“그렇다고 하네. 나도 처음 보는 일인데 아마 인간들이 참여해서 관심이 늘어난 탓일 거야.”
이소민은 바로 유진하를 떠올렸다.
여기서 이런 작전을 꾸밀 사람은 그 녀석밖에 없었다.
또 어떤 꿍꿍이를 꾸몄나 했는데 유진하의 소식을 듣자 살짝 미소가 흘러나왔다.
“파이, 네가 대회를 맡았다고?”
“지시를 받았거든.”
파이는 가만히 웃었다.
최상위 서열 6위인 녀석에게 대회 운영을 맡으라고 명령할 자는 거의 없었다.
“1위가 내린 명령이야. 나보고 대회를 잘 맡으란다.”
“서열 1위?”
이소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열 6위 파이가 가진 힘은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이소민은 파이와 수련하는 와중에 거대한 장벽에 맞서는 좌절감을 맞았다.
서열 6위는 하늘 높게 솟은 태산 같은 존재였다.
“너 같은 녀석들이 다섯 명이나 더 있다는 거잖아.”
“괜찮아. 그 다섯 괴물들은 따로 중심부에서 사는데 거기서 절대 안 나와. 이번 대회를 나한테 맡기고 뒤치다꺼리를 시킨 건 내가 6위이기 때문이야.”
“아, 그런가.”
“녀석들은 바깥 세계에 별 관심도 없지.”
파이는 킥킥거리면서 눈빛을 가늘게 떴다.
녀석은 서열 5위 이내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정말 차원이 다른 존재일까.
“서열 1위는 대체 어떤 괴물이야?”
“후후, 그자한테는 감히 다가가지도 못해.”
파이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강자 위에 강자가 존재했다.
인간이 저런 경지의 존재와 맞설 수 있을까.
이소민은 숨을 크게 들이쉰 후에 다시 내뱉었다.
고민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할 따름이었다.
“대회 운영은 할 거냐?”
“나한테 지시를 내렸으니 따라야지. 물론 인간들한테 관심도 있고.”
파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진하와 동맹을 맺은 터라 다른 인간들에게도 관심을 가진 상태였다.
“어차피 내가 맡은 대회다. 규칙은 내 멋대로 정할 수 있지.”
즉석에서 새로운 규칙이 제정됐다.
“신생 코어가 아니라 기존의 코어들도 참가할 수 있다. 여기에 조건을 더 붙여 볼까나.”
뭔가 꿍꿍이가 있는지 파이는 크게 웃었다.
“모든 인간이 참여해야 새로운 대회가 시작된다.”
“뭐라고?”
이소민은 화들짝 놀랐다.
파이의 결정은 의외이지만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인간들이 전부 모여야 다 찾기가 편하잖아. 대회에서 이기면 전부 가지는 거지.”
인간들을 한군데에 집결시켜서 대접전을 일으킨다.
대회 규모를 본격적으로 키우겠다는 말이었다.
-인간을 전부 차지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그럼 나도 가는 거네?”
이소민이 생각해보기에 괜찮은 제안이었다.
어차피 여기에 가만히 갇혀 있는 편보다는 대회에 참가해서 유진하와 에어리스를 만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잠깐만. 그럼 아홉 명이 다 모인다면?”
흩어졌던 인간들이 한곳에 모인다면 D와 J도 참가해야 한다.
그들을 구하는 방법도 되었다.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니, 훌륭한 계획이었다.
‘유진하, 설마…….’
대전략의 일부일까.
에어리스와 조커가 보인 무력시위는 나비 효과처럼 큰 변화를 일으켰다.
서열전이 큰 규모의 대회로 개편되며 인간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이긴다면?’
인간이 대회에서 이기면 모두 무사해진다.
대회로의 전면 개편은 유진하가 계획한 전략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서열 6위 파이와의 동맹도 녀석이 미리 손을 써둔 사전 계획이 아닐까.
‘유진하, 너는 정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소민은 소름이 쫙 끼쳤다.
하나의 수는 다음 수로 이어진다.
전략과 전략이 이어져서 대전략으로 만들어진다.
대단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좋아, 나도 갈래.”
이소민은 바로 결심했다.
유진하와 에어리스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식만으로도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꽉 막혔던 답답함이 뻥 뚫리듯이 상쾌하게 풀렸다.
“새로운 대회로…….”
파이와 이소민은 고원에서의 운동을 마치고 곧바로 대회 장소로 향했다.
이들이 연습한 장소는 광범위한 충격파의 자욱이 마치 유성이 떨어진 듯이 크게 남아 있었다.
“수련의 결과를 보여 주자고.”
이소민은 의지를 강하게 다졌다.
일주일 후 모든 참가자가 대회 장소로 몰려들었다.
그동안 참가자가 너무 몰려 서열 1000위 이내만 참여할 수 있는 제한이 걸렸다.
그렇게 코어와 인간이 참가하는 전면 대결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 * *
2라운드 직전이었다.
나무와 풀이 무성한 숲에는 1000명의 코어와 아홉 명의 인간이 모였다.
에어리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무수한 실력자들이 저마다 각오를 다지고 새롭게 개편된 대회에 참가했다.
“진하, 다들 강해 보여요.”
유진하도 천천히 코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서열 1000위 이내의 강자들이었다.
최정상급 괴물들이었고 서로 간의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인 경우가 많았다.
‘방심하면 당한다.’
그들은 서로를 매우 경계했다.
다들 경쟁자이자 숙적이라 분위기가 무거웠다.
그중에서 가장 경계할 대상으로는 서열 7위와 8위가 손꼽혔다.
“6위가 감독관이니 7위와 8위가 참가자 중에서 가장 높은 서열이야.”
유진하도 그들을 의식했다.
서열 7위와 직접 싸워본 에어리스와 조커 역시 상대의 강함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유진하, 조심해라.”
전투를 즐기던 조커조차 7위를 보고는 긴장했다.
서열 7위는 검푸른 머리에 얼음처럼 차가운 알갱이를 머금은 상대였다.
서열 최상위 강자는 오오라마저 자연스레 뿜어질 만큼 절대적인 위력을 가졌고, 인간들의 가장 큰 난적이었다.
주요 참가자는 다음과 같았다.
-유진하 일행.
에어리스, 조커, M.
-서열 7위.
D, J 자매. 그 외 정예 코어 팀.
-서열 8위.
괴도, 에이스. 그 외 정예 코어 팀.
인간들은 유진하 일행을 제외하고는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이번 대회의 중요 타깃은 당연히 인간들이었고, 그들을 전부 손에 넣으면 남은 라운드에 상관없이 끝나는 게임이었다.
‘누가 인간인지 모르게 숨긴다.’
서열 7위와 8위는 자신들이 확보한 인간을 대놓고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에어리스는 열심히 두리번거렸으나 나머지 사람들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했다.
“다들 어디에 있을까요?”
심지어 서열 6위와 같이 있는 이소민조차 모습이 안 보였다.
“분명히 있을 거야.”
유진하는 알고 있었다.
2라운드부터 대회가 진정한 시작이라고 확신했다.
서로가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단상에는 대회 감독관이 나타났다.
붉은 머리의 서열 6위였다.
녀석은 온몸에 불꽃의 오오라를 내뿜으며 강렬한 기세로 나타났다.
“이제부터 2라운드를 시작한다.”
모두가 순간적으로 숨을 죽였다.
“라운드마다 게임을 통과하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한다. 탈락자는 물러나는 거고. 어때, 간단하지?”
규칙은 간략했다.
서열 6위 파이는 당당하게 손을 들었다.
“간단한 거지만 룰을 어기면 즉결 처분이다. 알아서 하라고.”
협박 같은 소리지만 진심이었다.
파이는 모두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머리카락에 서리는 불꽃이 달아오르면서 단상을 강하게 휘감았다.
“이제 시작한다.”
갑자기 단상에 열 명의 검은 가운을 뒤집어쓴 자가 등장했다.
열 명의 심판단이 파이의 좌우에 장엄하게 늘어서자 분위기는 삽시간에 바뀌었다.
모두가 긴장한 낯빛이 되어 집중했다.
“2라운드는 고탑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