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내분의 씨앗(1)
사막처럼 붉은 고원이 펼쳐졌다.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는 터전이었다.
물과 음식을 필요로 하는 생명체는 절대 살아갈 수 없는 곳이지만 코어는 버려진 땅에서도 존재했다.
코어는 동력원이라서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내려앉은 듯한 이 땅에도 지배자는 있었다.
각각의 땅에는 땅을 차지하고 지배하는 세력권이 있었고, 붉은 고원은 그 중 서열 6위였다.
고원의 중앙에는 별 모양의 방어 진지가 자리했다.
“하암, 심심하다.”
서열 6위는 바위를 깎아서 평평하게 만든 돌침대에 누워 있었다.
화염이 항상 보호막처럼 온몸에 흐르고 있어 붉은빛의 머리카락에는 불꽃이 번뜩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디 재밌는 일이 없나?”
돌침대에서 빈둥거리던 서열 6위는 심심해서 죽겠다는 듯이 하품하며 온몸을 비틀어댔다.
“야, 밖에 누구 있냐.”
지배자의 부름에 보초를 서던 자가 방으로 잽싸게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너 이리 와라.”
서열 6위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보초를 불렀다.
보초는 신호에 맞춰 눈치껏 다가왔다.
“심심하니까 공놀이나 하자. 지금부터 너는 공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열 6위는 보초에게 주먹을 한 방 날렸다.
보초는 순간적으로 레벨4의 힘을 발휘했으나 주먹 한 방을 버티지 못하고 벽을 뚫고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흐음. 어디까지 갔냐.”
서열 6위는 눈가에 손을 대고 벽이 뚫린 방향을 바라봤다.
한 방 맞은 보초는 대략 10킬로 너머로 날아가서 붉은 땅에 처박혔다.
“크억.”
잠시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버둥거리던 보초가 이내 재생 능력으로 피해를 복구했다.
얻어맞은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빠르게 날아와서 제 위치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돌아왔습니다.”
“그래. 잘했다.”
서열 6위는 칭찬 한마디를 날린 후에 재차 주먹을 날렸다.
“한 번 더 갔다 와라.”
또다시 주먹 한 방을 맞아 옆의 벽을 뚫고 날아가는 보초.
레벨4의 힘으로는 서열 6위가 내리치는 가벼운 주먹 하나도 받아 내기 어려웠다.
“캬캬. 웃기고 있네.”
서열 6위는 만족스러웠는지 킬킬거리다가 풀썩 돌침대에 다시 누웠다.
등이 딱딱하지만 일단은 튼튼해서 쓰기 좋은 물건이었다.
다시 돌아온 보초에게는 수고했다는 말만 남기고 오늘 휴식을 주었다.
“진짜로 재밌는 일이 없나.”
공허하고 심심한 하루였다.
이 넓은 요새에서 장난이나 치는 삶을 매일 반복하니 공허하고 심심했다.
“하나 알려 줄까요?”
천장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서열 6위는 번뜩 눈빛을 빛내며 위를 경계했다.
“누구냐?”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타입인 서열 6위는 강하게 뛰어 천장을 부수고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다시 밑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난폭하네. 나는 여기 밑에 있는데.”
서열 6위는 약이 바짝 올랐는지 곧바로 다시 내려왔다.
다시 내려온 곳에는 자신을 부른 듯한 두 명의 존재가 있었는데.
주변이 먼지로 가득 차 있어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나한테 찾아온 거냐? 너희는 누구지?”
먼지가 걷히자 서서히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유진하와 이소민.
두 사람이었다.
“소개할게요. 저는 유진하이고 이쪽은 이소민입니다.”
“뭐라고?”
서열 6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서열이 아니라 이름을 소개하는 경우는 꽤 생뚱맞았다.
서열 6위는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주먹을 손바닥에 툭 치면서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 너희는 우리 코어가 아니구나. 다른 공간의 생명체냐?”
“인간이라고 해요.”
유진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상대는 서열 6위.
이곳에서 여섯 번째로 강한 괴물 같은 자였다.
“그래, 인간들이라고? 여긴 어떻게 왔지? 요새에서 내 방까지 오는 길을 복잡하게 꼬아 놨는데 말이야.”
“미로 말인가요? 대단한 수준은 아니던데요.”
유진하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여유를 보였다.
지략가인 자신에게 이런 미로는 심심풀이 퀴즈에 불과했다.
“제가 설계했으면 절대 길을 못 찾게 만들 수 있거든요.”
“후후, 너 재밌는 녀석이구나.”
서열 6위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면서 호기심을 드러냈다.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서 조금은 관심이 생긴 듯했다.
“나를 찾아왔다는 건 용건이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너희들은 서열이 없어 큰 가치가 없어.
“서열 말고 이름이 있다고.”
이소민이 옆에서 발끈하며 소리쳤다.
서열 6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소민을 한 번 쏘아봤다.
아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얼음장처럼 바뀌었다.
“이름은 아무 의미도 없어. 여기는 서열만이 너희의 가치를 유일하게 드러내는 거야.”
“…….”
이소민은 입을 다물었다.
서열 6위라는 이름에 걸맞게 말투만으로도 상대를 압박하는 기개가 있었다.
오오라를 억눌렀으나 언제라도 폭발할 만한 기세를 머금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불꽃이 서려서 다가가기도 어려웠다.
“인간들이 왔다는 건 알았다. 날 찾아온 용건이 궁금하네.”
“그런가요?”
“내가 흥미가 생기게 하는 편이 좋을 거야.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죽는다.”
서열 6위는 몇 마디의 이야기를 나누자마자 둘을 압박했다.
물론 저건 진심일 거다.
서열 6위는 현재 인간들이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의 강자였다.
서열 7위와 막상막하에 가까운 괴물이기에 그 실력은 확실했다.
“잘 됐어요. 마침 저는 당신이 흥미를 가질 제안을 가져왔거든요.”
유진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M의 조사에 따르면 서열 6위는 성급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강했다.
결단이 빠르며 성격이 급하니 미끼만 잘 던지면 쉽게 넘어올 타입이었다.
“동맹을 원해요.”
“동맹?”
서열 6위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예상하지 못한 제안을 받은 탓인지 의심의 눈초리를 지었다.
“너희들과 내가 왜 동맹을 맺어야 하지? 내가 무슨 이익인데.”
“이익은 몰라도 손해는 안 볼 수 있어요.”
서열 6위는 일대일을 선호하는 자였다.
머리를 쓰는 대결보다는 몸을 쓰는 승부를 선호했다.
“손해를 본다고? 무슨 말이지?”
“우리를 확보하려는 자가 있어요.”
유진하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동맹이란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서 이뤄진다.
가치가 있는 존재끼리 대등하게 이어지는 것이 동맹이지만 지금의 유진하는 어떻게든 동맹을 만들어야했다.
“서열 7위는 인간을 확보해서 차지하려고 하거든요.”
서열 6위는 라이벌이라 여기는 서열 7위의 얘기가 나오자 흥미를 느꼈다.
유진하가 던진 밑밥이었다.
“7위가 너희를 가지려고 한다고?”
“간단해요. 이득이 있거든요.”
상대의 관심사부터 던진 후에 협상을 이어가자, 서열 6위는 서서히 미끼를 물기 시작했다.
유진하는 뛰어난 지략가이자 능숙한 협상가였다.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거든요.”
“너희에게 가능성이라…….”
서열 6위는 유진하와 이소민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어떤 가치가 있는지 골동품을 감정하는 전문가처럼 인간을 분석했다.
“너희들 힘의 원천인 심장은 원시적이야. 코어를 활용하면 에너지 자체를 무한정 생산하고 활용할 수 있어.”
“그게 다일까요?”
“뭐라고?”
서열 6위의 눈빛이 변했다.
유진하는 차분하게 상대를 끌어들인 후에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
지금이었다.
“인간이 가진 감정…….”
“감정이 뭐지?”
“당신들에게 없는 거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졌다.
쉽게 알려 주지 않으면서 관심을 끌어들이는 어법이었다.
물론 너무 비비 꼬았다가는 역효과가 나올 수 있어서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했다.
“인간에게는 타인을 향한 희생이 있어요. 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마음이죠.”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서열 6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붉은 머리에서 뿜어지는 불꽃이 혼란스럽게 비틀렸다.
“희생 말고도 인간이 가진 감정은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감정들이 힘의 원천이 되는 거죠.”
“흐음?”
서열 6위는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심장이란 생체 기관이 가진 특성이라고 어설프게 받아들였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은 감정은 코어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낯설음의 영역이었다.
그것이 유진하의 무기가 되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서열 7위는 인간과 코어의 융합체를 구상하고 있어요.”
“뭐라고?”
이소민은 심장에 코어가 이식된 상태였다.
그런 이소민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서열 6위는 인간과 코어의 융합체라는 개념을 생각하며 고민에 휩싸였다.
“7위 녀석이 코어와 인간을 융합하는 실험을 하는 거구나.”
“그래요.”
“목적은 뻔하겠네?”
“서열을 높이려는 목적이겠죠.”
유진하는 부가 설명을 보충했다.
서열 7위는 차분하고 냉정한 존재였고,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간을 실험했다.
강해지자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서열을 높이겠다는 의미였다.
“내 자리도 넘어설 수 있겠네?”
서열 6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행동파에 화끈한 면모가 강점인 서열 6위지만 권모술수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10위 이내에 있는 실력자다웠다.
“좋은 정보였다. 마음에 들었어.”
서열 6위는 비로소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인간에 대해서 관심이 생겨났다.
“마음에 드는 정보지만 너희와 동맹을 맺을 이유는 아니다.”
유진하는 얼음처럼 굳었다.
녀석을 설득하기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서열 6위는 주먹을 꾹 쥐면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관심이 생겼으니 인간을 확보하면 되는 거잖아. 일단 너희 둘 다 내가 차지하겠어.”
“두 명을 얻고 네 명을 잃어도 된다는 건가요?”
유진하는 바로 대응했다.
말 몇 마디로 강자를 설득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인간들은 총 아홉 명이죠. 지금 7위는 두 명을 확보했어요.”
“둘이 없으면 남은 인간은 일곱 명이구나?”
“그래요.”
회심의 반격을 날릴 차례였다.
“저희와 동맹을 맺으면 남은 인간들은 전원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 거부한다면 어렵겠네요.”
서열 6위가 원한다면 유진하와 이소민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에어리스, 조커, 괴도, 에이스, M은 놓친다는 소리였다.
협상을 포함한 협박이었다.
“후후, 두 명을 얻느냐. 일곱 명을 모두 얻느냐. 이거 재밌네.”
교묘한 협상술이었다.
인간의 가치를 높여서 상대에게 양자택일을 시켰다.
두 명을 얻느냐.
일곱 명을 얻느냐.
이렇게 선택을 시키면 대부분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판단을 내린다.
유진하는 과감한 승부수를 걸었다.
“정말 즐거운 얘기야.”
서열 6위는 킥킥거렸다.
유진하라는 인간이 몰래 자신의 기지에 들어와서는 매력적인 정보와 제안을 가져왔다.
“인간이라더니. 정말 재밌는 녀석들이네.”
마음에 들었는지 서열 6위는 요란하게 웃었다.
마치 요새가 흔들릴 듯이 커다란 웃음소리였다.
“좋다. 받아들이지.”
서열 6위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붉은 머리에서 여느 때보다 강한 불꽃이 새롭게 피어났다.
마치 불의 꽃 같았다.
“마음에 든다. 너와 협력하겠어. 대신 조건이 있어.”
“그게 뭐죠?”
“여기에 하나는 남아라.”
쿵.
가슴이 떨어질 듯한 충격이 내려왔다.
유진하와 이소민 둘 중에서 한 명은 이곳에 남으라는 소리였다.
“코어가 이식된 인간에 관심이 있으니 연합의 증표라고 여겨라. 여기 남으면 손대지 않고 무사히 놔두겠다고 약속하지.”
“…….”
“거부하면 동맹은 없어.”
녀석은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여기 남으라는 결정은 누구도 쉽게 내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세상에서 가장 정신력이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 나섰다.
“…내가 남을게.”
“누나?”
유진하가 말릴 새도 없이 이소민은 한 걸음 나섰다.
“인질은 내가 가장 잘하는 분야잖아. 내 전문성이 발휘되는 거고.”
희미한 미소와 옅은 눈빛.
이소민은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무너지지 않을 신념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기다릴 테니까. 꼭 데리러 와 줘.”
“…그럴게요.”
담담하면서도 당찬 결의였다.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이소민의 결단을 보면서 유진하는 가슴이 메어 오는 감정을 받았다.
하지만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에 애써 슬픈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 헤어지는 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에.
다시 되찾을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했다.
“고마워요. 반드시 돌아올게요.”
“유진하, 너만 믿어.”
이소민은 서열 6위에게 다가갔다.
불꽃을 휘감은 서열 6위와 긍정의 이소민이 함께 자리했다.
동맹은 성립됐다.
서열 6위는 눈빛을 빛내며 강하게 선포했다.
“이제부터 나는 너희들과 동맹이야. 모든 인간을 차지하겠어.”
“…….”
인간 쟁탈전이었다.
이제 서열 6위와 7위는 인간을 두고 서로 치열하게 싸울 것이다.
유진하가 설계한 대로 그들은 분란 속에 휘말리게 된다.
‘내부에서 무너뜨린다.’
코어는 서로 간의 강한 경쟁심과 불화, 반목으로 인해 그들 스스로 파괴된다.
‘내 손아귀에서 너희들을 움직이게 하겠어.’
넓은 체스판에 서열 6위의 말과 서열 7위의 말을 올렸다.
둘이서 싸움을 붙이면 혼란이 발생한다.
‘한 수.’
유진하가 설계한 대전략이었다.
한 수를 두면서 게임을 시작했다.
툭.
유진하가 던진 동맹의 수.
그 최선의 수가 절묘하게 코어들의 틈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