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구출전(5)
유진하는 자신의 뒤를 노리는 그림자 같은 자를 느꼈다.
크리스털 속에 갇힌 이소민과 자매 요원들을 구하려다 적에게 등 뒤를 내주고 말았다.
배후를 잡힌 거였다.
‘살벌한 기운…….’
상대는 서열 4021위였다.
유진하는 지략에 뛰어났으나 상대는 수백만 코어 생명체 중에서도 강자였다.
서열 4021위.
전체의 0.13%.
전투 레벨도 4단계 내재화가 가능한 최상위 실력자였다.
이 단계를 발휘하는 적은 에어리스조차 완패할 정도로 강자였다.
“…….”
유진하는 호흡을 짧게 가다듬었다.
마치 등 뒤에서 적이 총으로 겨누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선택할 길은 단 하나였다.
‘몸을 돌려서 정면 승부한다.’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이 볼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톡.
물방울이 튈 즈음.
유진하는 과감하게 몸을 돌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 상대의 오오라가 언뜻 보였다.
불길처럼 흔들리는 기세가 불길하고 섬뜩했다.
“어?”
서열 4021위는 가만히 있었다.
유진하의 배후를 기습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여유일까?
아니면 경계일까?
유진하와 마주 보면서도 상대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레벨4 내재화는 얇은 띠처럼 몸에 저장된 오오라 기운을 몸에 감싼다.
경계를 가르는 띠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를 머금고 노려봤다.
“위에 있던 자와 함께 여기 온 거지? 인간이고.”
상대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코어 생명체는 무감각한 존재였다.
고통 말고는 느끼지 않았고 말수가 짧았다.
“제 발로 찾아왔으니 잡아가지.”
서열 4021위는 덤덤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인간을 잡아서 차지하겠다.
‘우리를 제거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사로잡으려는 건가?’
유진하는 저들의 행동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코어 생명체는 인간을 확보하려고 들었다.
크리스털 속에 이소민과 자매 요원들을 가둬 두고 어떤 실험을 하는 거였다.
분명 목적과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인간에 관심을 가지나?’
지금은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었다.
당장 눈앞의 과제는 적을 물리치는 일이 급선무였다.
촤라락!
유진하는 양손에 100장의 카드를 꺼내어 사방에 배치했다.
마술사답게 승부를 준비했다.
“…카드인가?”
서열 4021위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코어 생명체는 무기와 카드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의 전투 체계는 장비를 넘어서는 파괴력을 가졌기에 충분히 자신감을 내비쳤다.
“라이트닝.”
유진하는 모든 카드에서 번개를 발동시켰다.
지금은 어두운 밤.
유진하는 번개 카드에서 파생되는 빛을 모아서 연계 공격을 준비했다.
빛과 번개의 연계.
서열 4021위는 가만히 있었다.
작렬하는 번개의 향연 속에서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게 다냐?”
코어는 전투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힘과 속력이 상승한다.
레벨4는 차원이 다른 전투 기술을 발산했다.
온몸에 오오라를 내재한 덕분에 얇은 띠가 보호막처럼 몸을 보호했다.
번개 카드로는 흠집조차 하나 낼 수 없었다.
“지금…….”
유진하는 번개에서 발휘된 빛을 모아갔다.
심장에 빛의 카드를 각인했다.
빛의 카드.
내재화.
손등에 새겨진 태양의 문양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아압!”
유진하는 모아놓은 빛을 일순간에 방출시켰고, 폭발적인 파괴력을 발휘하면서 빛의 속도로 나아갔다.
서열 4021위의 상체에 코어가 있는 부근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아…….”
정확한 일격이 작렬했으나, 오오라 보호막의 띠를 두른 서열 4021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빛의 힘으로 나아간 유진하는 마치 차원의 장벽에 가로막힌 듯이 봉쇄당했다.
‘빛으로…….’
유진하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번개와 빛의 연계는 완벽히 틀어 막혔다.
최상위 0.13%의 코어 생명체는 한 걸음도 떼지 않았음에도 차원이 다른 위압감을 발휘했다.
‘막혔다…….’
빛의 힘은 레벨3에 육박하는 위력을 가졌으나, 레벨4를 상대로는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존재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지적 생명체에도 등급이 있다.”
서열 4021위는 중얼거렸다.
코어와 인간은 존재부터 다른 개념이었다.
그들은 적자생존의 법칙 속에 살았고,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로 세상을 구분했다.
인간은 그들에게 있어 하위 종족에 불과했다.
“으아아아!”
유진하는 최선을 다해 더 주먹을 내질렀으나 과부화에 걸려 팔꿈치가 꺾여갔다.
번개도 거의 사라지고 방출되는 빛은 옅어졌다.
서서히 한계가 왔다.
서열 4021위는 차분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짧은 빛으로는 끝이다.”
별똥별은 짧게 지나가고 사라진다.
희망 같은 빛이 사라진 후에는 가만히 어둠 속에 삼켜지고 만다.
“허억. 허억.”
지쳐 버린 유진하는 숨을 헐떡이며 제자리에 멈췄다.
지쳐 버린 육체만 남고 빛은 헛된 기대처럼 사라졌다.
한계에 막힌 인간이 되었다.
서열 4021위는 가만히 서서 유진하를 제압했다.
“인간이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사로잡아서 연구할 가치가 있을까?”
녀석은 인간을 모두 폄훼했다.
그 말을 듣자 유진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사대는 끝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로 원정길에 나섰고, 자신은 역대 최고의 실력자들로 소집한 이 팀의 리더를 맡았다.
“…….”
무너질 수 없다는 각오를 품고 코어들의 세계로 들어왔다.
유진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진 리더였다.
“으아아아!”
번개의 카드가 다시 재발동했다.
몰아치는 번개에서 마지막 빛을 다시 모았다.
녀석의 상체를 향해 부러진 오른팔을 대신해서 왼팔을 다시 들었다.
“무의미한 짓이야.”
서열 4021위는 여전히 방어막의 띠를 두른 채로 여유를 부렸다.
유진하가 막힌 기술을 반복해 봐야 무의미했다.
그때였다.
새로운 비장의 카드가 나타났다.
“새로 준비했던 카드…….”
한 달 동안 유진하는 악인들의 원정대를 이끌며 멤버들의 능력과 장비를 향상시켰다.
그동안 20개가 넘는 공간을 클리어했다.
조커는 키리나의 단검을 얻었고 새롭게 분신 능력을 확보했다.
유진하도 성과가 있었다.
“나에게도…….”
온몸에 들어오는 번개의 빛을 받으며 새로운 카드를 손에 들었다.
번개 카드로 발휘하는 빛을 넘어 새로운 초레어 카드를 준비했다.
“두 개의 태양.”
이 카드는 술사의 양옆에 빛의 덩어리를 발동한다.
태양에 견줄 만한 ‘구체’였다.
술사는 이 힘을 사용할 수 있고 빛과 열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
유진하가 숨겨놓은 비장의 기술이었다.
번개와 빛의 연계
그 기술을 발전시킨 힘이었다.
‘번개와 빛과… 태양의 연계.’
유진하는 강렬한 빛의 에너지까지 모조리 모아서 왼주먹을 내질렀다.
상대의 코어를 향해 정확히 날렸다.
정면승부를 걸었다.
레벨4 단계의 힘을 발휘하는 서열 4021위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전신에 둘러진 보호막.
절대로 뚫을 수 없는 방패에 도전했다.
“으아아아아!”
유진하는 ‘번개’와 ‘빛’에 이어 ‘태양체’까지 최대로 발휘했다.
빛과 열기.
손등에서 번쩍이는 태양의 문양도 하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최대치의 빛이었다.
유진하는 빛의 속도로 마지막 힘을 다해 나아갔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
‘빛의 창’이 된 듯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온몸에 타오르는 빛과 열기가 막대한 에너지로 작용했다.
최대 출력의 에너지가 집약되자 철벽같던 상대의 보호막도 서서히 뚫리기 시작했다.
“?!”
서열 4021위는 조금씩 무너지는 오오라 기운을 느꼈다.
얕보던 인간한테 방어벽이 서서히 뚫리자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뚫린다?”
-번개와 빛과 태양의 연계.
-빛의 창.
마침내 유진하는 오오라 방어를 뚫고 녀석의 상체에 주먹을 꽂았다.
“크윽!”
모든 빛의 힘을 최대치로 모은 기술이었다.
육체와 정신과 에너지까지 모조리 쏟아부은 터라 발동시킨 힘은 조절할 수 없었다.
콰앙!
기지 최하층에서 갑자기 빛줄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두 사람은 빛에 휩싸여 하늘로 날아갔다.
촤아악!
유진하와 서열 4021위는 빛에 휩싸인 채로 끝없이 나아갔다.
빛의 속도였다.
조절할 수 없는 에너지는 모든 힘을 소모할 때까지 나아간다.
그 힘으로 대지를 넘어 하늘을 가르듯이 지나갔다.
혜성처럼 긴 궤적이 자리 잡았다.
촤아아악!
이윽고 빛줄기에는 서서히 꼬리가 생겼고 빛의 힘은 줄어들었다.
빛이 사라져가자 유진하는 지상의 목적지에 주목했다.
‘저기로…….’
도착할 만한 장소가 보였다.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아래로 낙하했다.
마지막 일격이 내리꽂혔다.
서열 4021위는 빛의 힘에 이끌려 기지 지하부터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최후에는 땅에 처박혔다.
엄청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반경에 어마어마한 파편과 먼지가 가득 찼다.
카앙!
코어는 산산이 부서졌다.
서열 4021위는 형체조차 남지 않고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허억. 허억.”
유진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남은 왼팔마저 부러졌고 무리했던 양팔은 너절해졌다.
몸은 가루가 되기 직전이었고 모든 기력마저 소모했다.
“…무리였어.”
이 기술에는 대가가 있었다.
빛을 무제한으로 모으는 만큼 술사도 그 힘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었다.
체력과 에너지까지 전부 소모하고 만다.
풀썩.
유진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빛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육체의 모든 에너지가 방전됐다.
쓰러진 채로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심장 박동이 서서히 멈춰갔다.
“…….”
눈동자가 허공에 머물렀다.
최선을 다해 세상을 보고 싶었으나 남은 힘은 없었다.
기술의 대가는 참혹했다.
부서진 육체와 에너지 소모로 인해 술사도 서서히 목숨을 잃어간다.
죽음이었다.
쓰러진 유진하는 서서히 영원한 침묵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꿈.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전투에서 맞섰고 이제는 마지막 열의마저 불태우며 싸웠다.
‘…차가워.’
온몸의 열기가 식어갔다.
차가운 죽음의 감정이 육체를 지배해갔다.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축축한 감정을 느끼며 서서히 잠들었다.
그리고…….
물에 젖어가듯이 촉촉하게 적셔지는 기분을 느꼈다.
차가운 감촉은 서서히 열이 느껴지더니 따스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따뜻해.’
멎어가던 심장이 다시 뛰었다.
유진하의 멍했던 눈동자도 초점을 되찾았다.
눈앞에는 바닥을 흘러가는 물이 보였다.
보통의 물이 아니었다.
이곳은 호수였다.
‘치유의 호수.’
서열 7위와의 결전에서 부상을 입었던 에어리스가 치유했던 장소였다.
아까 섬광 같은 빛줄기가 줄어갈 무렵에 유진하는 착지할 장소를 결정했다.
치유의 호수였다.
이곳이라면 모든 기력이 다하더라도 금세 치유하리라 여겼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이곳이 아니었으면 생명이 멈췄을 터였다.
죽음을 각오한 싸움에서 정확한 판단력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온몸이 물에 젖은 유진하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부서진 코어 조각을 보면서 방금 치열했던 승부를 떠올렸다.
“레벨 4단계가… 이 정도였어.”
상대의 서열은 4021위였다.
레벨 4단계와의 승부에서 목숨을 걸어서야 간신히 승리했다.
이보다 강한 적들은 얼마든지 존재했고, 더 높은 전투 단계도 있을 터였다.
코어의 세계.
A등급 공간에서 유진하는 한계에 다다른 격전을 이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