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구출전(1)
찰랑찰랑.
호수의 물결은 잔잔했다.
고요함 속에서 물결이 흐르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앞선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에어리스는 호수의 물로 상처 부위를 닦았다.
치유의 물이었다.
물결에 닿자 상처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호수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진하…….”
“에어리스.”
낯선 공간에서 재회의 순간을 맞이했다.
태양이 세 개가 있는 공간이었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유진하는 에어리스를 기다렸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위로 섞인 말이었다.
에어리스는 울컥 쏟아질 듯한 눈물을 참으며 유진하를 바라봤다.
첫 전투에서 고전했던 기억이 고통스러웠고 놔두고 온 사람들 생각에 괴로웠다.
“미안해요, 진하.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오지 못했어요. 제가 많이 부족했어요.”
이소민.
D와 J 자매.
세 사람을 잃고 혼자 이곳에 도착한 에어리스였다.
눈망울은 언제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유진하는 천천히 다가와서 에어리스를 살짝 안아주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에어리스를 구해준 거야. 이제부터는 내가 구하러 갈 생각이었어.”
유진하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머금으며 에어리스를 안아주고 진정시켰다.
“A등급 공간에 오면서 아홉 명의 결사대가 맡은 역할이 있어.”
멤버들은 맡은 역할이 있었다.
유진하는 아홉 명의 멤버들에게 각각 중요한 임무를 맡겨 놨다.
“D와 J 자매는 구조팀을 맡았어. 자신들의 역할을 알고 에어리스를 구조하러 간 거야.”
“저를 위해서요?”
“에어리스는 반드시 구해야 했어. 우리가 이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핵심 멤버니까.”
“…….”
유진하의 전략은 이미 시작되었다.
잘못된 선택 한 번만으로도 모든 계획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핵심 멤버는 반드시 지켜야 해. 에어리스, 마지막까지 너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이번 공략전에서 에어리스는 자신과 닮은 쌍둥이를 찾아야 했다.
쌍둥이 그녀는 우리 공간으로 넘어와서 지금의 전투를 경고했다.
“에어리스가 있어야만 여기서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도 있고.”
“…진하.”
“D와 J도 그걸 알고서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 거고.”
유진하는 이번 작전에서 고민을 무수히 거듭했다.
아홉 명 전원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일부라도 살아서 돌아올까.
아니면 전멸하고 패배할까.
하나의 선택만으로 결과는 완전히 뒤바뀐다.
전략을 구상한 리더로서 모두의 운명을 감당해야 했다.
“M은 정찰과 분석을 맡았어.”
요원 M은 이 공간의 분석을 맡았다.
특유의 정보 습득력과 뛰어난 분석력을 바탕으로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라 지시했다.
단독 임무였다.
“남은 사람들은요?”
“이소민 누나는 지원팀이었어. 자매 요원은 구조팀이었고.”
숨을 돌린 유진하는 나머지 멤버들의 역할도 설명했다.
“괴도 알파와 알카르토스의 에이스는 교란팀이야.”
두 사람은 지략이 뛰어났다.
유진하에게는 막혔지만 둘 다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훌륭한 전략을 준비했다.
완전 범죄를 추구하는 그들은 M의 전력 분석표에서도 최상위 수준의 지력으로 평가받았다.
지력: SSS
최초로 평가된 지력 등급은 SS로 추정됐는데, 한 달간 악인들의 원정대를 거치면서 현재는 SSS로 평가가 올라갔다.
유진하의 지력 U등급에서 딱 한 단계 아래 수준이었다.
“두 사람은 뛰어난 두뇌가 있고 상황 판단도 뛰어나. 자신을 숨기면서 유인도 능숙하게 해낼 거야. 코어들을 교란할 수 있어.”
유진하 다음으로 뛰어난 전략가 두 사람이 적들의 시선을 끌어가며 유인한다.
작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곳은 지성체 인원이 C등급이야. 마스터가 알려준 공간 전력 분석이 그랬어.”
이 공간은 전체 등급은 A였다.
전투력과 문명이 A로 높이 평가되어서 높았으나 지성체 숫자는 겨우 C에 불과했다.
“우리 공간은 수십억의 인간이 있어서 A등급으로 평가됐어. 이곳은 C등급이니 수백만 명의 인원만 있을 거야.”
“개개인의 전투력이 강하지만 인원이 훨씬 적다는 거네요.”
지성체 생명체가 적다는 부분이 이 공간의 약점이었다.
유진하는 처음 작전을 구상할 적부터 이 부분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자생존…….”
강자가 모든 걸 차지하고 지배하는 세계였다.
유진하는 이곳의 법칙을 빠르게 알고 대응책을 마련했다.
“전투력이 강하면 높은 서열이 되어 지배하는 곳이야. 수백만 명이 힘의 논리로 살아가고 있어.”
서열이 높은 자가 모든 걸 차지하는 세계였다.
“지성체가 적으니까 전투력에 더 열중하는 시스템이 된 거지. 강한 전투력으로 서열까지 구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
“생명체가 부족해서 힘을 더 강하게 키우려는 거군요. 경쟁을 더 심화시켜서요.”
“맞아. 녀석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적자생존의 법칙을 선택한 거야.”
유진하는 이 공간의 법칙과 처한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A등급 공간의 서열전.
그들이 만들어낸 규칙은 본인들이 처한 현실에서 나온 고육책이었다.
“괴도와 에이스가 돌아다니면서 교란을 시작했어. 지금이 기회야. 우리는 다음 목표로 갈 거야.”
“진하…….”
유진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전략은 시작됐고 반격의 시작은 이제부터 핵심 멤버들에게 달려 있었다.
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낯선 발자국이 다가왔다.
“후후, 기다리기 지루하네.”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에어리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다가오는 남자의 정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백가면을 쓰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삐에로 문양이 새겨진 백가면은 그자의 상징이었다.
조커였다.
“전투팀은 우리 셋인가?”
기다리기가 지루했는지 조커는 어깨를 손으로 주무르며 나타났다.
살얼음판 같은 전장에서도 조커의 행동은 특유의 여유를 드러냈다.
마치 긴장감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이제 갈 거예요.”
유진하는 조커를 바라보며 다음 작전을 떠올렸다.
“그래? 서두르면 좋겠다.”
전투조에는 에어리스와 조커가 배치됐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두 사람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었다.
전투력: U
전력 분석에서 Ultimate 궁극 등급이라 평가받은 사람은 셋이었다.
유진하, 에어리스, 조커.
세 사람은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손등에 문양도 가지고 있었다.
태양의 문양. 유진하.
검과 방패의 문양. 에어리스.
쌍단검의 문양. 조커.
이 셋이 결사대의 핵심 주력이자 전투팀이 되었다.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였으나 호흡은 사실 불안감이 있었다.
에어리스는 조커와 나란히 한 팀이 되어 서게 되었는데 여전히 어색함을 느꼈다.
“그런데 정말 저희 셋이서 가는 건가요?”
“악인들의 원정대에서도 한 달 동안 함께했잖아.”
유진하가 반문했다.
분명 한 달이나 같이 원정대로 돌아다녔는데도 에어리스는 조커와 여전히 거리감을 느꼈다.
“그렇긴 해도, 저희가 같이 싸운 적도 없고. 대화를 많이 나누지도 않았고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같은 전투팀인데도 개성이 다른 편이라 호흡 면에서 걱정이 많았다.
유진하는 의외로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걱정 안 해도 돼. 조커는 원래 혼자 움직이는 편이니까 이번에도 목표만 알려주고 그렇게 놔둘 거야.”
“나를 자유롭게 해 주겠다?”
조커는 괜찮은 제안을 받자 흥미를 느꼈는지 턱을 만지작거렸다.
조커를 비롯해 에이스와 괴도는 탁월한 개인 실력을 가졌다.
그들은 억지로 호흡을 맞추려다가는 역효과를 낼 수 있었다.
“조커는 혼자서 움직이도록 해요.”
“나야 좋지.”
조커는 바로 받아들였다.
독자 행동은 본인도 가장 원하는 방식이라 자신이 있었다.
“지금부터 목적지를 알려줄게요.”
유진하는 전투팀의 첫 번째 목표를 결정했다.
이번 공략전에서 중요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우리 멤버를 구해야 해요. 세 사람부터 되찾겠어요.”
“진하,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이소민과 자매 요원들의 행방이 몹시 궁금하던 참이라 에어리스는 밝은 표정으로 반색했다.
유진하의 결단은 과감했다.
공간의 주인을 직접 노리는 방법이 아니라 예상외로 멤버 구출을 먼저 선택했다.
“흐음. 구출이 먼저다?”
조커는 탐탁지 않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끌릴수록 우리가 불리해질 텐데? 단숨에 공간의 주인을 노릴 계획이 아니었나?”
조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되물었다.
소수의 희생을 각오하고 목적을 달성하자는 제안이었다.
처한 현실에 따라 작전의 향방은 달라지는 법이었다.
유진하는 조커와 생각이 달랐다.
“저도 많은 가능성을 생각해 봤어요. 결사대가 공간의 주인부터 노릴 수도 있으나 이곳의 서열 최상위들의 실력은 압도적인 수준이에요.”
“현재로서는 승산이 없다?”
“네, 강해질 방법은 M이 조사하고 있어요. 앞으로의 길에서도 세 사람은 꼭 필요하고요.”
유진하는 날카로운 두뇌로 앞으로 벌어질 모든 전략의 수를 냉철하게 분석했다.
“한 번의 수가 먼 훗날을 바꾸게 될 거예요. 멤버들을 구하는 길로 가면 나중에 큰 힘이 될 거예요.”
“좋다. 네 생각을 믿어보지.”
조커는 순순히 작전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유진하는 지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유진하의 지략과 에어리스의 전투력에 호되게 당했던 조커는 두 사람의 실력을 가장 인정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유진하는 작전 브리핑을 시작했다.
“에어리스가 맞섰던 사람은 서열 7위예요. 이곳의 방어전을 맡은 책임자이기도 하죠.”
“진하, 알고 있었어요?”
“여기 오자마자 빠르게 정세 파악부터 시작했어. 확실히 M은 조사 능력이 남달라서 빠르게 정보를 파악했고.”
“그렇군요. 정말 빠르게 알아냈네요. 대단해요.”
유진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M이 알아낸 정보는 저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져요.”
정보력은 작전의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밑거름이 된다.
M의 탁월한 정보 파악력과 뛰어난 분석력이 초반 판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정보 하나하나가 귀중했고 앞으로의 여정에서 큰 힘이 될 터였다.
“M은 서열 7위의 본거지가 근처에 있다고 알아냈어요.”
유진하는 전송 카드를 이용해서 M과 정보를 수시로 주고받았다.
“인간들이 그곳에 잡혀갔다는 소식도 받았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니 그곳에서 세 사람을 구해내요.”
첫 번째 전략.
세 멤버를 구한다가 결정됐다.
“대단하군. 벌써 빠르게 다음 수를 준비하고 지시까지 내리다니.”
조커는 유진하의 지휘력과 실행력에 감탄했다.
처음 새로운 공간으로 넘어오면 낯선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대개 당황한다.
낯선 기후와 생명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게 마련인데 정예로 구성된 결사대는 확실히 달랐다.
리더의 지시에 따라 금세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뛰어난 리더에 뛰어난 멤버들이라 손발이 척척 맞는군.”
굳이 유진하가 악인들까지 끌어모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결사대는 최정예 실력자로만 구성해서 승부를 걸었다.
“진하, 저도 힘을 내볼게요.”
에어리스는 치유의 호수에서 부상을 회복하고 기운을 되찾았다.
물론 이 장소도 M이 알아낸 정보에서 나왔다.
“진하, 저는 준비됐어요.”
에어리스는 아까의 전투에서 붙잡힌 이소민과 자매 요원들을 구하겠다는 목표를 받아들였다.
의욕이 불끈 솟아올랐다.
“어서 가요.”
에어리스가 앞장서서 출발했다.
조커는 백가면을 만지면서 뒤를 따랐고 쌍단검을 꺼내서 긴장감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목적지는 서열 7위의 본거지였다.
유진하, 에어리스, 조커.
전투팀은 본격적인 대반격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