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악인들의 원정대(3)
“모두가 모였네요.”
괴도는 쿡 웃으면서 망토를 들어 입가를 가렸다.
조커와 에이스가 정면으로 마주친 상황을 지켜보니 흥미를 느꼈다.
“두 사람은 같은 알카트로스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원수 같은 적이겠지만…….”
조커의 배신은 알카트로스 조직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에이스에게 있어 조커는 원한을 넘어선 숙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다시 같은 편이 되었다.
“유진하가 만든 팀인데 이제는 나도 슬슬 즐길 기분이 드네.”
조커는 자신의 백가면을 만지면서 앞을 막아선 에이스를 응시했다.
원래 임무는 공략전이었다.
유진하가 제시한 게임이 있었다.
-누가 먼저 공간의 주인을 제압하느냐.
조커, 괴도, 에이스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서로 협력과 배신을 반복했다.
다른 사람을 누르고 자신이 이기기 위해서였다.
저돌적인 조커와 달리 에이스는 침착했다.
“게임이 우선이니까 우리 간의 싸움은 잠시 미루도록 하지.”
이번 게임에서 승리하면 알카트로스 멤버들의 석방을 약속받았다.
배신한 조커를 해치우고 싶은 욕구가 강렬했으나 당장 급한 일은 멤버들의 해방이었다.
알카트로스 재건.
에이스는 목표를 위해서 분노의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았다.
“지금은 게임에서 이기겠다.”
에이스는 검은 종이를 꺼냈다.
곧바로 변형펜을 꺼내서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 고대의 페이퍼.
종이에 적은 내용이 반경 100미터 이내에 실현된다.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에이스는 급하게 적은 메모를 살짝 던졌다.
하늘하늘 공중에서 나부끼던 페이퍼가 희미한 빛을 발산하더니 곧바로 내용을 발현시키고 사라졌다.
종이에 적힌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장비를 전부 해제한다.’
반경 100미터의 모든 장비가 사라졌다.
“하하.”
조커는 자신의 손에서 단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웃음을 터트렸다.
고대의 페이퍼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에이스 역시 법칙에 적용을 받아서 사용하던 변형펜이 사라졌다.
“내 창이?”
세 사람의 목표였던 공간의 주인도 가지고 있던 창과 갑옷을 모두 잃었다.
무기가 사라지자 그의 온몸을 보호하는 오오라 역시 흩어지고 말았다.
힘으로 뚫으려던 조커와 달리, 에이스는 페이퍼의 능력을 이용해서 가볍게 적을 무장해제 시켰다.
“자, 이제 마무리다.”
에이스는 단숨에 다가섰다.
맨몸이 된 공간의 주인은 이제 빈털터리가 되어 저항할 태세조차 갖추지 못하고 무너졌다.
에이스는 날카로운 손을 공간의 주인에게 뻗어 심장을 위협했다.
막강한 창술 실력을 가진 공간의 주인은 꼼짝없이 제압당했다.
“후후, 지켜보다가 마지막에 낚아챈 거군요.”
멀리 떨어진 괴도가 팔짱을 끼고 쳐다봤다.
에이스는 승부에서 이겼음에도 여전히 괴도와 조커를 경계했다.
“다들 같은 목표였고 마지막에 잡는 게 이기는 거지.”
“대단하네요. 확실히 알카트로스라는 조직을 이끌 실력이군요.”
괴도는 박수를 치면서 축하해 줬다.
메마른 박수 소리가 잠시 들리다가 말았고 정적이 짧게 흘렀다.
“제압이 목적이지 죽이는 건 아닌 게임이다.”
에이스는 목표를 분명히 확인했다.
유진하가 제시한 게임은 공간의 주인을 제압하는 거였다.
제거하라는 목표가 아니었다.
“유진하에게 가겠다.”
에이스는 고대의 페이퍼 능력을 해제했다.
그러자 사라졌던 장비도 도로 돌아왔다.
에이스는 밧줄을 준비해서 공간의 주인을 꽁꽁 묶었고 계속 조커와 괴도를 의심하며 쳐다봤다.
“염려 마라. 뒤를 치지는 않을 테니까.”
조커가 툭 내뱉었다.
에이스는 그 말투에 신경이 거슬리자 곧바로 대꾸했다.
“조커,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뒤를 쳐왔던 너잖아.”
“…그건 그러네.”
조커는 순순히 그 말을 인정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부 요원과 알카트로스를 배신한 전력이 있었다.
빠르게 수긍한 조커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럼 자리라도 빠져주지.”
서로를 믿지 않고 견제하는 악인들의 원정대였다.
이번 승부는 에이스의 승리로 결정됐다.
하지만 유진하의 생각은 달랐다.
“1차전의 승리는 에이스네요.”
공간의 주인을 묶어서 붉은 고원까지 데려온 에이스가 멈칫했다.
유진하는 게임의 규칙을 다시 설명했다.
“이 게임은 이제 시작이거든요. 앞으로 한 달은 계속될 텐데요.”
“한 달이라고?”
비수처럼 말이 날아왔다.
에이스와 조커, 괴도까지 모두의 귓가에 콕콕 박히는 소리였다.
“게임은 앞으로 한 달. 이 팀은 그때까지 유지됩니다.”
실제로 그랬다.
한 달 기간을 잡았고 게임은 단판 승부로 끝이라고 확정한 적도 없었다.
“설마 겨우 한 번에 끝날 거라고 기대했던 거는 아니죠?”
큭큭.
조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괴도 역시 짐작은 했는지 입가를 틀어막으며 웃었다.
“…물론이지.”
에이스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어차피 선택권은 없었고 유진하가 원하는 게임 테두리 안에서 진행되는 판이었다.
각오한 굴욕이었고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다들 수고했어요. 앞으로 2차전과 3차전을 계속 진행할 테고 누가 이기는지 보자고요.”
어두워진 분위기 속에서 유진하는 기쁜 얼굴로 세 사람을 맞이했다.
견제와 협력이 오가는 악인들의 원정대는 묘한 긴장감 속에서 계속 행동했다.
에어리스는 서먹한 분위기에 잘 적응하기 어려웠는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거 어렵네요, 진하.”
악인들의 원정대.
이 팀은 리더 유진하가 지배하고 있었다.
공간의 주인을 제압하는 게임은 계속되었다.
* * *
“엇차! 이번에 대목을 챙겨왔다!”
이소민은 한 아름 가득 담은 보자기를 메고 와서 바닥에 확 풀었다.
이번에 모은 장비들이 좌르륵 깔렸다.
검과 방패. 방어구.
던전에서 가져온 제법 쓸 만한 장비들이었다.
“이번엔 소득이 있었지.”
용병 대장 제이슨도 만족스러운지 턱수염을 매만졌다.
유진하와 달리 이 팀은 장비만 챙기는 목표를 가졌다.
물건 수집이 우선이라 굳이 던전에서 싸울 필요는 없었다.
“이소민이 확실히 장비를 잘 챙기더군.”
제이슨은 바닥에 깔린 검과 갑옷을 살피더니 문득 건너편의 이소민을 쳐다봤다.
언제 가져왔는지 이소민은 아이스커피에 빨대를 꽂아 쭉쭉 빨아먹으며 다리를 꼬고 앉아 쉬고 있었다.
“잘하는 거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긴 하다.”
이소민은 기지개를 켜면서 잔뜩 펼쳐놓은 장비들을 바라봤다.
힘들게 얻은 물건들이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이번까지 총 22개 던전을 돌았는데 마지막이 가장 수확이 좋았어.”
한 달 동안의 기록이었다.
그동안 모은 장비들은 창고에 가득 쌓아 놨다.
이제는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유진하는 언제 올까?”
에어리스와 같이 떠난 유진하는 독특한 원정대를 구성했다.
조커, 에이스, 괴도 알파로 구성된 악인들의 원정대였다.
그 팀은 위험 요소가 많았다.
“두 사람이 없으니 심심하다.”
용병 대원들이 장비를 정리하는 동안 이소민은 혼자 남았다.
원체 밝고 기죽지 않는 성격이지만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혼자 있으니까 지루해.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
크게 소리치며 쓸쓸함을 토로했다.
으스스한 찬바람이 지나가고 다 마신 커피 빈 잔처럼 혼자 남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이슨은 쿵쿵 발걸음을 크게 하며 다가왔다.
“심심하면 같이 놀아줄까? 헬스장에서 운동하면 힘이 쫙 붙는데.”
“아저씨 혼자 해…….”
이소민은 바로 거절했다.
무안해진 제이슨은 한 걸음 물러서서 작별 인사를 남겼다.
“그럼 다음에 만나자.”
용병팀이 장비를 챙겨 자리를 떠나자 진짜로 이소민 혼자만 남게 되었다.
“후우.”
집에 가기 싫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빈 커피 잔을 만지작거릴 즈음이었다.
그때였다.
지이잉.
차원문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누구지?”
경계심이 든 이소민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적들의 습격인가?
아직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해서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푸른 차원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 안에서 누군가 확 튀어나왔다.
“너는……?”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유진하였다.
“유진하다! 돌아왔구나!”
“어? 이소민 누나가 있었네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이소민은 한달음에 달려갔다.
반가움에 확 끌어안으려다가 에어리스가 차원문에서 튀어나와서 엉겁결에 대신 안겼다.
“이소민 언니, 반가워요.”
“에어리스도 무사히 돌아왔구나.”
한 달 만의 재회였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기뻤으나 펑펑 울지는 않았다.
“동료끼리 좋은 모습이군요.”
괴도 알파는 세 사람이 반갑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살짝 웃었다.
가면을 쓴 그는 괴도단 시절에 파트너 베타와 함께했던 추억이 문득 떠올랐다.
두 사람이 있어야 완전한 괴도단이 된다.
“나도 다시 괴도단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는지 괴도는 모자 챙을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커와 에이스는 딱히 특별한 감상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간의 여정을 마치고 무뚝뚝하게 돌아왔다.
“싱겁게 끝났어.”
조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멈췄다.
오랜만에 돌아온 지구였다.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라 기분은 한결 나았으나 다시 요원들에게 쫓길 수 있다는 불쾌감도 있었다.
범죄자의 현실이 그랬다.
“계산은 끝내야겠지.”
에이스는 유진하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중요한 용건이 남아 있었다.
“게임은 어떻게 되었나?”
악인들의 원정대는 특별한 게임을 벌였다.
공간의 주인을 제압하라.
가장 많이 성공한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게임 결과를 알려줘야 하죠?”
유진하는 씨익 웃으면서 품에서 결과표를 내밀었다.
한 달의 여정.
이 게임에서 다섯 명의 성과는 다음과 같았다.
-게임 결과
괴도 알파. (클리어 횟수 6회.)
조커. (클리어 횟수 8회)
에이스 (클리어 횟수 11회)
“결과가 난 건가?”
에이스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 게임.
에이스의 승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짜 결과가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에이스, 당신은 우승자가 아니에요.”
“뭐라고?”
에이스는 순간 눈빛이 변했다.
유진하가 정한 기준에 따르면 게임의 우승자는 다른 사람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2차전부터는 저하고 에어리스도 참여했다는 거 알고 있죠?”
“…….”
게임의 룰이었다.
2차전부터는 유진하와 에어리스도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조커, 에이스, 괴도 알파에 이은 새로운 참가자였다.
“에어리스는 8회 클리어했어요. 조커랑 같은 횟수네요.”
“유진하, 너는……?”
유진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
“저는 클리어 횟수 12회. 에이스 당신보다 한 번이 더 많죠.”
“…….”
에이스는 말문이 막혔다.
이 게임에서 유진하는 특유의 지략과 빛의 힘을 바탕으로 승부를 압살했다.
마지막까지 겨뤘던 에이스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으나 결과는 저게 맞았다.
그래서 더 열이 뻗쳤다.
“너, 일부러 우리를 이용한 거냐?”
“그럴 리가요.”
“이 게임에서 네가 우승해 버리면 우리 모두를 다 부려먹고 버리겠다는 거야.”
“하하. 오해하지 마세요.”
유진하는 뻔뻔하게 주장했다.
게임의 결과는 공정한 승부였고 마지막에 가까스로 자신이 이겼을 따름이라고 항변했다.
물론 그게 더 에이스에게 굴욕적인 말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기회는 한 번 더 있거든요. 다음 게임이 또 있잖아요.”
“…그게 뭐지?”
“A등급 공간과의 전면전이에요.”
중요한 기밀 정보였다.
유진하는 악인들의 원정대를 확대 개편할 계획을 가졌다.
에이스, 조커, 괴도의 도움은 다시 필요했다.
이들은 절체절명의 현 상황에서 아쉬워서 써먹어야 할 실력파들이었다.
“여기서 이기면 모두 원하는 걸 이뤄 줄게요.”
유진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 달의 시간이 다되었다.
며칠 뒤면 A등급 공간의 적들이 차원문을 열어버리고 쳐들어올 터였다.
대규모 침략전이 예정되었다.
사느냐. 죽느냐.
생존이냐 멸망이냐.
모두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우리도 준비는 끝냈어요. 이제부터 대전략을 실행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과정은 이날을 위한 준비였다.
문명을 발전시키고 무수한 유물을 모았다.
최후의 승부수를 펼칠 날이 다가왔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진하는 결심했다.
“대전략을 실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