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작전 입안
하늘은 전투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열리려던 붉은 차원문은 푸른 성수의 방벽에 막혀 버렸다.
“…겨우 끝났네.”
마스터는 숨을 고르며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길바닥에는 조각난 괴물 조각이 있었다.
근처에서 전투에서 생존한 요원과 용병이 전열을 추슬렀다.
“젠장, 겨우 한 마리였는데.”
용병 대장 제이슨은 도끼를 든 채로 이를 악물었다.
단 한 마리의 괴물을 상대했는데도 용병팀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분한 마음이 가득했다.
“용병팀만이 아니라 요원들도 희생이 컸어.”
M이 다가와 제이슨의 어깨를 잡아주며 위로했다.
여덟 개의 뱀 머리를 가진 괴물 하나에 맞서 모두가 덤벼들어야 했다.
“만약 차원문이 열려서 저런 괴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면…….”
상상만으로 소름이 끼쳤다.
한 마리의 괴물만으로도 정예 요원들과 용병팀이 거의 전멸을 당했다.
하늘에는 성수의 방벽에 막혀서 차원문을 넘어오지 못한 수백 수천의 괴물들이 적의를 드러내며 아우성 거렸다.
“멸망의 문을 막은 거야.”
벤치에 앉은 마스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붉은 원형의 차원문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종말의 하루를 가까스로 벗어난 상황이었다.
마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가늘게 떨었다.
“진하, 괜찮아요?”
에어리스는 상체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온몸에 상처를 입었는데도 유진하의 걱정부터 하며 힘겹게 다가왔다.
빛의 힘이 사라진 지금.
유진하도 체력이 거의 한계에 달해서 발걸음이 무거웠다.
“…고생했어, 에어리스.”
유진하와 에어리스는 서로에게 다가갔다.
하늘의 차원문 아래.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두 사람은 잠시 서로 마주 보았다.
앞으로의 전투는 공간과 공간끼리 전면전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혼자서는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을 보던 유진하는 에어리스의 양어깨를 잡아서 잠시 공원의 나무에 기대 놨다.
격전에 지친 에어리스는 잠시 눈을 감고 쉬었다.
“같이 싸우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 될 거야.”
유진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A등급 공간과의 전면전은 곧 벌어질 현실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전략과 실력을 갖추고 전투에 대비해야 했다.
* * *
호텔의 넓은 로비는 파티처럼 다양한 음식으로 가득했다.
달콤한 케이크와 과자, 향긋한 음료가 곳곳에 있었다.
“우와, 맛있겠다.”
이소민은 케이크를 개인 접시에 옮겨 담으며 입맛을 다셨다.
얼른 입속에 털어서 냠냠 달콤하게 먹고 싶었다.
“에어리스, 너도 같이 먹자.”
“아, 저도요?”
이소민과 파티에 함께한 에어리스는 당황한 기색으로 곁에 있었다.
마스터가 초대한 파티였다.
차원문 봉쇄 작전의 성공을 기념하는 축하 자리였다.
“여기 케이크가 정말 내 취향이야. 에어리스도 마음에 들 거야.”
“그럼 저도 골라볼게요.”
에어리스와 이소민은 케이크를 시작으로 각종 디저트와 스테이크까지 가져갔다.
두 사람이 즐거운 파티 분위기에 어울리는 동안 다른 방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파티장 귀퉁이의 조용한 응접실에는 네 사람이 있었다.
마스터와 유진하.
그리고 요원 D와 M이었다.
“다들 잘 즐기고 있나 보네.”
마스터는 응접실의 대형 테이블 앞에 있었다.
탁자에 있는 과자를 하나 들어 한 입에 쏙 먹었다.
“다들 음식도 좀 즐기면서 상의하자. 어차피 오늘은 축하 파티잖아. D도 한 잔 마셔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장검을 옆구리에 찬 D는 칵테일 한 잔을 곁들이면서 응접실 회동에 참여했다.
C와 더불어 정부 요원 중에 가장 높은 책임자였다.
응접실에서 긴급 전략 회의에 요원을 대표해서 참가했다.
“D는 알아서 관리하는 타입이니까 괜찮고. 유진하도 한 잔 마셔.”
“저는 음료수로 할게요.”
유진하는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응접실 회동은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할 중요한 자리였다.
A등급 공간과의 전면전이 시작된 지금.
전면적인 작전을 새롭게 구성해야 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여기 새로 분석한 자료부터 보시죠.”
중절모를 쓴 M은 밤새 준비한 자료를 제출했다.
D는 마시던 칵테일을 살짝 탁자에 내려놓고 서류를 살펴봤다.
“전략 구성 계획서라…….”
“이번에는 차원문을 봉쇄하긴 했으나 전투는 이제 시작입니다. 대비책이 필요하겠죠.”
브리핑처럼 준비된 전략 계획서였다.
작전의 방향은 간결했다.
“이번 차원문에서 저들은 몬스터 괴물만 보냈습니다. 수천 마리에 육박하는 괴물들이었죠. 간신히 입구를 막아 버텨냈으나 다음에는 그 이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스터는 손가락으로 볼을 간질거렸다.
난감하다는 듯이 눈가를 찡그렸다.
“몬스터가 아니라 제대로 쳐들어오면 우리 쪽은 전멸하겠구나.”
응접실은 조용해졌다.
바깥의 파티장과는 다르게 침울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유진하는 주스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다음 차원문은 언제 열릴까요?”
“흐음. 며칠이려나.”
마스터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몇 번 세더니 결과를 알려줬다.
“일주일 정도.”
“그렇게 빠른가요?”
“이번과 같은 규모면 그럴 거야.”
“녀석들은 더 큰 규모로 쳐들어올 거예요. 더 큰 차원문이 열리는 시간은요?”
“…한 달 정도?”
마스터의 추측은 한 달이었다.
그 기간이 정확하다면 마지막 준비 시간은 그만큼이 될 터였다.
“남은 시간이 소중해요.”
유진하는 전략 계획서를 들었다.
M의 자료에는 세 가지 루트가 적혀 있었다.
유진하와 같이 만든 대안이었다.
“저랑 같이 만든 계획이에요.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을 적어놨죠.”
“어떻게 할 생각이야?”
마스터는 최종 계획에 관심을 기울였다.
방안은 총 3개였다.
“일단 우리의 전투 실력을 높여야 해요. 현재 우리 공간의 전투력은 B등급이고 상대는 A등급이죠.”
한 단계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몬스터 한 마리만으로도 이쪽의 정예 요원들과 용병들은 전멸 직전까지 내몰렸다.
전투력을 키울 방안이 필요했다.
“무기와 방어구, 카드까지 장비를 더 모아야겠죠. 가치 있는 장비를 모을 전문팀을 만들겠어요.”
“아이템 전담팀을 구성하자?”
“네, 반드시 필요해요.”
첫 번째 팀은 아이템 원정대였다.
만만한 공간에 들어가서 좋은 물품을 싹쓸이로 모아오는 팀이었다.
주요 멤버는 이미 구상해 놨다.
“이소민 누나가 아이템을 잘 챙겨요. 실제로 운도 좀 그쪽에 있는 거 같고.”
“이소민이라…….”
“용병들과 같이 팀을 이루면 좋은 장비를 얻어올 거예요.”
마스터는 이소민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에 눈썰미도 뛰어나서 수집에 일가견이 있었다.
“아이템 구하는 팀이구나. 그럼 다음 계획은 뭐야?”
“기술력과 자원을 확보해야 해요.”
우리 공간의 장단점은 명확했다.
문명: D
지성체 인원: A
자원: C
장점은 인구수였다.
카드와 장비만 충분하다면 수십억의 인간들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다.
단점은 낮은 문명 수준이었다.
자체적으로 카드와 장비 생산이 불가능했고 자원마저 부족했다.
“문명 수준을 높이고 자원을 확보해야 해요.”
두 번째 팀의 목표는 명확했다.
‘점령전’이었다.
우리보다 발전된 문명을 확보하면서 자원력이 좋은 다른 공간을 점령해야 한다.
“공간은 점령도 가능하다고요?”
“맞아. 공간의 주인 자리는 위임할 수가 있거든.”
마스터는 점령전의 규칙을 알려줬다.
타 공간을 제압해서 지배하려면 그에 따른 조건이 필요했다.
“주인의 자리를 넘겨받는 거야. 항복을 받는 거와 같아. 공간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어.”
좋은 문명과 자원을 가진 공간을 차지해야 한다.
굉장히 어려운 난관이 예상됐다.
유진하는 그 임무를 맡기로 자청했다.
“제가 팀을 이끌어서 가볼게요.”
“유진하가 맡는다고?”
마스터는 놀란 반응을 보이더니 곧 수긍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하가 간다니 첫 번째 팀보다는 훨씬 믿음이 가네.”
이소민의 팀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였다.
문명이 발전된 공간은 그만큼 발전된 지역을 의미했고 세력 수준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공략 자체가 어려운 난제였다.
“해 볼게요. 대신 제가 원하는 팀을 이루고 싶어요.”
“어떤 팀을 생각하는 건가요?”
D가 불길한 낌새를 눈치챈 듯이 되물었다.
칵테일 잔을 마시다가 문득 눈빛이 달라졌다.
전투에서처럼 냉철한 시선으로 유진하를 바라봤다.
“요원들은 방어 전력입니다. 같이 갈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요?”
“…남은 사람이 있어요.”
유진하는 새로운 원정대의 멤버를 하나씩 소개했다.
“첫 번째 멤버는 에어리스예요.”
당연한 선택이었다.
에어리스는 처음부터 함께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가장 신뢰하는 멤버였다.
마스터와 D도 당연히 찬성했다.
“두 번째 멤버는…….”
유진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한 차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마스터와 D는 전략 계획서를 살펴봤다.
다음 장을 넘기니 에어리스에 이은 두 번째 멤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알카트로스의 에이스?!”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선택했다.
유진하와 M이 공동으로 작성한 전략 계획서에는 충격적인 멤버 구성이 담겨 있었다.
두 번째 멤버는 에이스.
세 번째 멤버는 조커.
마지막 멤버는 괴도 알파였다.
“조커에다 괴도 알파까지?”
지금까지 만났던 적수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와, 진짜 놀랐어.”
말문이 막힌 마스터는 D가 내려놓은 칵테일 잔을 원샷으로 마셔 버렸다.
외모는 어리게 보여도 수십억 년을 살았던 공간의 주인이었다.
이렇게 놀라기는 오랜만이었다.
“평생 손으로 꼽을 만큼 놀랄 일이야. 실력자가 부족하다는 건 알지만 꼭 이런 녀석들이랑 해야 해?”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들은 지금까지 만난 강적이었다.
알카트로스의 에이스는 마스터의 숙적이었다.
조커는 이중간첩이었고, 괴도는 속셈을 알 수 없는 괴이한 도둑이었다.
“그들의 실력은 최정상이에요. 제가 잘 활용해 보려고 해요.”
유진하의 제안은 과감했다.
숙적들을 모아서 원정대로 가겠다는 전략이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배신을 당하거나 뒤를 찔릴 수도 있었다.
양날의 검이 될 터였다.
전략 계획서를 같이 작성한 M도 이 부분에 대해서 처음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유진하, 정말 괜찮겠냐? 무리한 계획이라고 보여.”
“한 달 안에 우리 공간의 전력을 높이려면 과감한 수단을 써야 해요. 맹독이라도 써야 하는 거죠.”
“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감수할게요.”
유진하의 결심은 단호했다.
마스터는 딱딱한 빵을 씹어 먹듯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말리고 싶은데 그래도 유진하라면 꼭 하겠지?”
“…네.”
응접실 회동은 앞으로의 대전략을 결정하는 자리였다.
다수결 제도는 없었고 참가자 모두가 합의하는 방식이었다.
대전략은 전원 합일체로 정한다.
유진하가 전략 계획서를 작성하면서 굳이 M을 끌어들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숙적을 모으는 전략.’
과감하고 무리한 계획이라 한 명이라도 같은 편을 만들어 둬야 했다.
알카트로스의 리더 에이스.
조커와 괴도.
강하지만 제멋대로인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이 유진하에게 과연 존재할까.
의구심이 들었다.
“믿어보는 수밖에 없겠네.”
마침내 마스터가 결정을 내렸다.
빈 칵테일 잔을 테이블에 툭 내려놓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유진하를 믿겠어.”
지금까지 보여준 유진하의 실력과 지력을 신뢰했다.
빛의 카드를 활용한 전투력까지 겸비한 완전체에 가까운 실력자였다.
“모든 지원을 해줄게. 범죄자 녀석들을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까 제어 장치도 원한다면 해두고.”
“괜찮습니다. 제가 준비한 계획이 있어서 괜찮을 거예요.”
“좋아. 그렇게 하자.”
마스터의 결정에 D는 반대하지 않았다.
대전략은 결국 모두의 지지로 통과됐다.
유진하, 마스터, D, M.
네 사람의 응접실 회동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기간은 한 달.
스스로 강해져서 살아남는다.
A등급 공간과 전면전을 앞두고 생존을 위해 모두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대전략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