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공간 평가
“오랜만이다. 잘 있었지?”
파란 레깅스를 입은 마스터가 통통 튀듯이 달려왔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고무공에 가깝게 튀어 올랐다.
마당에는 유진하 일행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
푸른 머리를 휘날리며 마스터가 달려간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유진하였다.
“아!”
마스터는 유진하에게 다가가 확 끌어안았다.
톡톡 달려와서 한달음에 안겼다.
“정말 고마웠어. 감사 인사가 많이 늦었네.”
“아, 그래요.”
마스터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달라붙자 유진하는 얼떨떨해져서 그저 뒷머리를 긁고 있었다.
“야, 너희들!”
이소민은 얼른 마스터의 목덜미를 확 잡아끌었다.
“갑자기 껴안고 뭐 하는 거야?”
“아니, 왜!”
옥신각신하며 약간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마스터는 안 떨어지려고 버둥거리다가 이소민의 괴력에 의해 떼어졌다.
“하아,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유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터는 간혹 돌발 행동을 하는데 예측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수십억 년이나 살았으면 나잇값 좀 해봐.”
“비겁하게 나이로 공격하는 건 아니라고.”
이소민과 마스터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에어리스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방금 일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에어리스, 정신이 들어?”
유진하가 말을 걸자 그제야 에어리스도 정신을 퍼뜩 차렸다.
정신력이 강한 에어리스조차 순간 눈빛이 풀려버릴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괘, 괜찮아요.”
“응?”
“아니, 괜찮아졌어요.”
전혀 안 괜찮은 얼굴로 에어리스가 억지 미소를 짓더니 점점 표정이 이상해졌다.
어색해진 분위기는 시간이 조금 흐르자 겨우 진정이 되었다.
“자, 그럼 할 얘기가 있으니까요.”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이내 잠잠해졌다.
바람이 불어서 풀잎을 휘날렸다.
마스터는 은은한 바람을 느끼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야기를 해볼까나. 에어리스를 닮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유진하는 물론 에어리스와 이소민도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아까의 장난기 가득한 마스터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푸른 눈동자가 빛을 냈다.
바람에 날리는 풀잎이 이들의 사이를 살짝 지나쳤다.
“위치는 꽤 먼 곳이더라. 어차피 차원문으로 연결할 수 있으니까 가는 데 상관은 없지만 생각보다 큰 곳이었어.”
“큰 곳이라면?”
유진하가 되물었다.
마스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사는 공간도 그렇지만 세상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공간이 있어.”
“얼마나 되나요?”
“정확히는 나도 몰라. 대략 수천 조가 넘는 공간이 있겠지.”
엄청난 숫자였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세상이 은하수의 별처럼 존재했다.
“공간은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지. 우리 우주의 별처럼 그 이상의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대단하네요.”
“지금도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겠지?”
우주의 탄생처럼 공간도 비슷했다.
긴 세월 동안 공간은 운명을 생명체와 함께한다.
“우리가 사는 공간은 꽤 오랫동안 무사했어. 그 이유는 저번에도 알려줬지.”
“다른 공간과 연결되지 않아서라고 들었죠.”
“그래. 스스로 발전하느라 수십억 년이나 걸렸지.”
유진하는 기억을 떠올렸다.
마스터가 만든 우리 공간은 일부러 다른 공간과 연결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고 그랬다.
공간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면 다른 곳과 이어져야 했다.
지성체와 문명의 교류를 통해서 받아들여야 빠르게 발달하게 된다.
“만약 다른 공간과 연결되었으면 확실히 더 빨리 우리 공간은 성장했을 거야. 대신 문제점도 있어.”
“전쟁이겠죠.”
“그래. 맞아.”
유진하는 정답을 얘기했다.
다른 공간과 연결된다면 무기와 방어구, 카드 같은 발달된 문명을 받을 수 있었다.
대신에 역으로 상대의 침략을 받을 수도 있었다.
공간의 존속과 멸망을 건 싸움이 벌어진다.
“철저하게 폐쇄된 공간을 일부러 유지했어. 생명체가 스스로 태어나도록 어마어마하게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
“그래서 수십억 년이 걸린 거죠.”
“맞아. 나도 잊어버릴 만큼 긴 세월을 기다렸지. 지성체가 진화의 영역에서 성장할 때까지 말이야.”
마스터는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수십억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거치며 생명체가 기적처럼 태어났고, 지성을 가진 존재로 진화했으며 문명을 이루었다.
“다른 공간과 연결되었다면 이미 침략당해서 멸망했을 수도 있어. 그게 공간의 운명이니까.”
“적자생존이네요.”
유진하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약한 공간은 사라지고 강한 공간이 살아남는다.
지금까지 벌어졌던 공략전과 방어전이 전부 이 개념에서 진행된 사건이었다.
마스터는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엄중한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지금까지는 외부와의 접촉 없이 무사했으나 결국 다른 공간과 부딪치는 일이 벌어졌어.”
“최초의 공략전이군요.”
“맞아. 작은 공간과 부딪쳤고 차원문이 열려 버렸지.”
차원문의 등장은 세상의 패러다임이 변했다는 걸 의미했다.
새로운 공간과의 접촉.
중대한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도전에 임했다.
마스터는 정부 요원과 각종 기관을 만들어서 우리 공간을 지킬 방어전을 준비했다.
“이제 알겠어요. 그럼 에어리스를 닮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 거죠?”
“꽤 먼 곳이야. 우리보다 훨씬 거대한 공간이고.”
우주까지 포함한 우리 공간은 제법 어마어마한 크기로 알려졌다.
여기보다 더한 공간이라면 대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마스터는 푸른 상태 창을 꺼내더니 공간에 대해 알려줬다.
“공간에도 레벨이 있어. 여러 가지 항목을 평가해서 분석하는 거지.”
“평가인가요?”
에어리스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평가에 따라 공간의 등급을 가른다는 소리는 너무 신기했다.
“여러 항목이 있어. 공간의 세세한 설정이야. 면적도 있고 무기와 카드 보유가 얼마인지, 지성체 숫자도 살핀다고.”
우리 공간의 현재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공간 번호. 23,790,547,824.
면적: A
전투력: B
문명: D
지성체 인원: A
자원: C
- 총합 B
“이게 우리 공간의 평가야.”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공간이 랭크에 맞춰져서 평가된다는 사실은 놀랍고 신기했다.
“면적은 뭐야?”
이소민이 묻자 마스터는 손가락을 척 들더니 친절하게 설명했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에게 가르치듯이 기초부터 알려줬다.
“면적은 말 그대로 공간의 크기야. 지구에 생명체가 있지만 실제로는 우주가 있잖아.”
“그럼 전체 크기구나.”
“맞아. 우리 공간은 침범을 받지 않았고 오랫동안 성장해서 꽤 넓어.”
공간 면적은 A등급이었다.
물론 최대치는 아니었기에 우리 공간보다 거대한 공간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전투력은 겨우 B인가요?”
에어리스는 전투력 항목에 관심을 보였다.
전투력은 싸우는 위력을 일컫는 듯한데 전체 실력이 겨우 B로 평가받았다.
“어쩔 수 없어.”
마스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공간은 차원문이 겨우 3년 남짓만 열렸잖아.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어.”
전투력을 발휘하려면 무기와 카드, 방어구까지 다양한 장비와 물건이 필요했다.
우리는 장비와 도구가 부족했다.
문명에서 D등급으로 평가받은 이유도 같았다.
“지성체 인원은 그나마 A네.”
이소민은 다음 항목에 관심을 기울였다.
지성체는 A라는 제법 좋은 등급을 받았다.
“외부와 단절되었으니까 지성이 있는 인간들이 엄청 많아.”
“세계 인구가 수십억이 넘으니까요.”
“인력풀이 좋다는 평가는 당연한 거라고.”
사람들은 공간의 잠재력과 같았다.
수십억에 달하는 ‘인간’이란 지성체가 있어서 장비와 물량이 충분하다면 언제라도 무장을 시킬 수 있었다.
전투력을 빠르게 끌어올릴 인적 자원이었다.
이소민도 같은 방식을 선호하기에 쉽게 납득했다.
“나 같은 사람도 무기와 장비만 있으면 잘 싸울 수 있어.”
초보 시절부터 적응력이 빨랐던 이소민이었다.
인간은 이성과 지성으로 학습한다.
그래서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
“사람은 충분하나 자원이 부족해서 문제인 공간이네.”
“맞아. 아직 우리는 다른 공간에서 먹힐 무기와 장비를 만들 수 없어.”
강력한 몬스터는 방어전에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우리 공간에서는 비슷한 개념으로 동물이 있으나 전투에 도움이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다른 공간의 이성체를 상대할 무기와 장비도 태부족이었다.
“무기를 생산할 기술도 자원도 없으니 치명적인 단점이네요.”
유진하는 B등급 평가를 냉철하게 분석했다.
마스터가 왜 그렇게 재능 있는 실력자의 스카웃에 열을 올리는지 이해가 갔다.
“원인을 알면 해결법도 찾을 수 있어요.”
유진하는 턱에 손을 괴고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우리 공간이 발전할 방향은 명백해요.”
-장비를 제조하도록 문명을 발전시킨다.
-자원을 확보한다.
-전투력을 높인다.
“장비를 제조할 기술력을 확보해야 해요. 기술 이전이라도 어떻게든 받아야겠어요.”
“그게 노력하긴 했는데 쉽지는 않더라고.”
마스터는 난감하다는 듯이 볼을 간질거렸다.
“간부 요원들에게 맡긴 임무 중 하나가 그거였는데 워낙 우리 공간으로 쳐들어오는 침입자들이 많아서 막느라 급급했거든.”
“어떻게든 시스템적으로 기틀을 만들어야겠네요.”
유진하의 눈빛이 번뜩였다.
우리 공간의 발전을 상의하는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
이 자리의 회의는 어쩌면 앞으로 모두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일 수도 있었다.
옆에서 듣던 이소민과 에어리스도 피부로 전해지는 긴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생존과 멸망을 건 결정이었다.
“방법을 찾아볼게요. 자원이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고, 할 일이 많네요.”
“아, 새로운 공간을 지배해서 위성 공간처럼 만들 수 있어.”
마스터는 새로운 개념을 알려줬다.
지금까지의 ‘공략전’이 아니라 다른 공간을 제압하는 ‘점령전’의 새로운 패턴이었다.
“조건은 훨씬 까다롭지만 말이야.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공간 운영의 측면에서 마스터는 이제 유진하를 마치 참모처럼 여기고 상의했다.
원래는 최고 핵심 간부와만 긴밀하게 나누는 주제였다.
그동안 보여준 유진하의 리더십과 지략, 실력을 마스터가 인정했다는 소리였다.
“좋은 방법을 찾아줄 거라 믿어.”
다시 마스터가 은근슬쩍 유진하에게 다가가자, 이번에는 이소민이 빠르게 알아차리고 둘 사이에 먼저 끼어들었다.
“껴안는 건 금지야.”
“알았다고.”
뾰로통해진 마스터는 금세 침울해져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두 사람의 가벼운 실랑이를 보면서 유진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지켜보던 에어리스는 다음 핵심 주제를 꺼냈다.
“그런데 저를 닮은 사람이 있던 곳을 알았다고 그러셨는데…….”
“아, 맞다. 위치를 알았는데 그 얘기를 하다 말았네.”
마스터는 손뼉을 마주치더니 바로 상태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 여기야.”
공간을 기록한 상태창에는 수많은 공간이 표시됐다.
마치 수많은 은하를 표시한 듯이 광범위했는데 그중에는 붉은빛으로 처리된 공간이 있었다.
“여기 빨간 공간은 뭔가요?”
마스터가 가리킨 화면에는 붉게 빛나는 공간이 있었다.
“저 공간이 A등급이라는 표시야.”
“A등급?”
모두가 깜짝 놀랐다.
A등급의 공간은 우리보다 한 단계가 높았다.
공간에서의 단계 차이는 엄청난 격차를 의미했다.
“세부 능력으로 보면 모든 면에서 우리와 큰 차이가 있어.”
화면에는 세부 능력치가 표시됐다.
-공간 번호. 549,001,232,506.
면적: B
전투력: A
문명: A
지성체 인원: C
자원: A
총합: A
“에어리스를 닮은 사람은 저기서 온 거야.”
마스터는 단호하면서도 평온한 감정을 유지했다.
“전투력 등급 하나만 차이가 나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지.”
붉은빛으로 빛나는 A등급의 공간.
그곳에서 우리 공간으로 넘어왔다.
“왜 왔는지도 알아냈어. 우리한테 경고해 주려고 한 거야.”
“경고?”
유진하의 반문에 마스터는 차분하게 세 사람을 쳐다봤다.
마스터의 한 마디는 앞으로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에어리스와 닮았던 그 사람이 있는 곳……. 그 A등급 공간에서 우리한테 쳐들어올 예정이었어.”
“네?”
모두가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보다 강한 공간에서 공격이 들어온다.
예상치 못한 위기였다.
“에어리스에게 피하라는 말을 전해 주려던 거지.”
공간 대 공간끼리 전투.
사생결단의 전면전이었다.
마스터는 진지한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봤다.
“…이미 시작됐어. 녀석들이 곧 올 거야.”
최대의 위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