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목숨이 걸린 왕좌
괴도단의 예고장으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암살단 아사신이 끼어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사건의 밤이 지나가자 버킹엄 궁전은 평화를 되찾았다.
“긴 밤이었어.”
엘리는 여왕의 응접실에서 잠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홍차가 좋아.”
부드러운 우유가 들어간 홍차는 영국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차였다.
아침마다 홍차를 마시면서 창가의 경치를 보곤 했다.
“날씨가 좋네.”
커튼을 젖히자 창문에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강렬한 햇살을 마주하자 엘리는 눈꺼풀을 찡그렸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빛이라…….”
엘리는 햇빛을 보다가 문득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빛의 힘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었다.
프리즘처럼 찬란한 빛을 머금으며 아사신을 단숨에 제압하던 유진하였다.
“국가 공인 탐정…….”
엘리는 홍차의 향긋한 향을 느끼면서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기사 작위를 주었는데…….”
여왕의 기사로 임명시켰다.
유진하는 그 임무를 완벽하게 이뤄냈다.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흐뭇한 미소 속에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젯밤 사건이 끝나고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여왕이 바뀌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똑똑.
“들어와요.”
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왔다.
초록빛 생머리에 무릎까지 오는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었다.
왕가의 상징이 새겨진 반지와 목걸이를 끼고 있었다.
그녀도 왕가의 혈통이었다.
“부르셨어요? 언니.”
“기다리고 있었어.”
여왕 엘리는 창가에서 떨어지더니 손에 든 홍차를 탁자에 내려놨다.
주전자와 빈 찻잔이 하나 더 있었다.
“한 잔 마실래?”
“아뇨. 이미 마시고 와서요.”
동생은 손을 내저으며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장갑을 낀 손은 우아함을 보이려는 듯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제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언니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걱정을 끼쳤구나. 고마워.”
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 레이첼과는 친자매였으나 어린 시절에 비해 만남이 줄어서 요즘은 소원해졌다.
여왕의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자주 만나지 못한 탓이었다.
“자주 연락해야 했는데 미안해.”
“아니에요, 언니.”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았다.
엘리는 찻주전자를 들어 자신이 마시던 찻잔에 홍차를 다시 부었다.
“어제 잘 피해 있었어?”
“집에 있었어요. 경찰이 경호해 줬거든요.”
“다행이네.”
짧은 대화가 오가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창문 너머에서 햇살만이 들어오고 있었다.
따뜻한 홍차 한 모금을 마시던 엘리의 입에서 차가운 말이 처음으로 나왔다.
“…왜 그랬니?”
뜻밖의 질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듣자 레이첼은 순간 당황했다.
“뭐를요?”
“왜 너였을까.”
엘리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눈빛은 차디찬 비수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아사신에게 의뢰한 사람이 왜 내 동생일까…….”
공기가 얼어버린 듯이 멈췄다.
차갑고 냉정하게.
엘리는 차가워지는 손을 따뜻한 찻잔으로 녹이는 기분을 맞았다.
유진하는 이미 여왕 암살을 의뢰한 자를 알아차렸다.
“여왕이 사라지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 의뢰인입니다.”
그 결과는 이미 전달받았다.
“왕위 계승 서열 1위는 너야, 레이첼.”
엘리는 어느새 레이첼을 심문하고 있었다.
여왕과 동생은 마치 살얼음판에 선 것처럼 매서운 눈매로 서로를 노려봤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가 언니를 죽이고 여왕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고요?”
“…….”
“말씀이 지나치신 거 같네요. 저는 언니가 무사해서 다행이라 생각해서 바로 여기에 왔는데.”
“…그러니?”
엘리는 동생을 상대하는 언니가 아니라 마치 적을 맞이하듯이 대우했다.
죄인을 노려보는 눈빛이었다.
“이건 어때?”
탁자에 툭 서류를 내려놨다.
레이첼은 서류를 꺼내서 내용을 확인했다.
계좌 추적 내역이 쭉 적혀 있었다.
“얼마 전에 많은 돈을 입금했어. 어디에 보낸 거니?”
“개인적인 용무였어요.”
“뭔데?”
“사생활까지 언니한테 얘기할 필요는 없어요.”
대립은 점점 고조되었다.
버티는 자와 파헤치려는 자가 대립하고 있었다.
자매라는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사신에게 보낸 의뢰금이지. 아사신이 의뢰인에게 받는 계좌 중 하나라고 밝혀냈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엘리는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었다.
왕위 계승 1위인 여동생이 언니의 암살을 의뢰한 범죄였다.
“네가 암살 사건을 의뢰할 적에 쓴 대리인도 찾아냈어. 이미 조사가 끝났지.”
서류에는 모든 증거가 빼곡하게 담겨있었다.
마지막 장에 결론이 적혀 있었다.
-레이첼.
여왕 암살 미수 사건의 용의자.
서류를 쥐고 있던 레이첼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 그녀의 운명은 끝나는 거였다.
“내 자리가 그렇게 탐났니?”
엘리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친동생 레이첼에게 있어 이 자리가 대체 무엇일까.
어떤 의미였을까.
“언니가 먼저 태어나서 여왕이 되었으니까요.”
레이첼의 어투는 냉랭했다.
감정이 얼어버린 말 속에는 뜨거운 분노가 담겨 있었다.
여왕이 되지 못한 원망이었다.
“…그랬어?”
엘리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말하지 그랬어. 여왕 자리라면 처음부터 줄 수 있었는데.”
“…….”
자매 사이에는 극한으로 치달은 감정이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고 마음으로 미워했다.
응접실에는 차디차게 식어가는 홍차와 창가에서 들어오는 빛줄기만이 가득했다.
“네 소원대로 해줄게. 오늘 나는 여왕 자리에서 물러날 거야.”
“언니……?”
“너에게 줄게. 여왕이라는 무게를 말이야.”
응접실의 단상에는 유리벽으로 된 곳에 왕관이 진열됐다.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은빛의 관.
순백의 미처럼 여왕을 상징하는 왕관이었다.
“줄게.”
엘리는 직접 왕관을 꺼냈다.
동생 레이첼에게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왕관을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네가 여왕이야.”
왕관을 건네고 엘리는 레이첼을 지나쳤다.
응접실을 나와 곧바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비서와 만났다.
“기자회견을 잡아주세요. 양위를 발표하겠어요.”
화들짝 놀란 비서를 옆에 두고 엘리는 여왕으로서의 마지막 길을 걸었다.
이 길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여왕.
그 끝에는 유진하가 있었다.
“결정하신 건가요?”
엘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의 자리를 내주는 결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것도 파렴치한 동생에게 내줄 의도는 사실 없었다.
“잘하셨어요. 그래야 안전해지니까요.”
유진하는 엘리를 달래듯이 다독이는 말을 부드럽게 건넸다.
아쉽고 분한 마음을 억누르던 엘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려준 계획대로 한 건데 괜찮은 거죠?”
“물론이에요.”
마당에는 유진하와 엘리만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담소를 하듯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왕위 이양도 사실 유진하의 계획이었다.
“아사신은 한 번 정한 타깃을 반드시 제거해요.”
“그렇다고 들었어요.”
“이번 의뢰는 여왕 암살이에요. 어젯밤에 실패했어도 그들은 계속 시도할 거예요.”
“네.”
여왕 자리를 내준 이유는 하나였다.
엘리를 지키기 위해서.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아사신은 한 번 받은 의뢰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바꾸지 않아요. 그들은 새로운 여왕이 등극해도 여왕 암살을 반드시 계속할 겁니다.”
아사신 같은 암살단은 목표에 굉장히 집착했다.
실패했다가 자신들의 명성이 떨어지면 그만큼 신뢰가 하락하기 때문이었다.
받은 의뢰는 반드시 수행한다.
실패해도 계속 암살을 실행한다.
의뢰는 중간에 바꾸지 않는다.
“이제 아사신은 새로운 여왕을 노릴 겁니다. 암살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서죠.”
“죽음이 걸린 자리네요. 여왕의 자리라는 것이…….”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자리가 되었죠. 아사신의 암살을 전부 막는 것은 어려운 과제니까요.”
동생 레이첼이 여왕에 오르면 아사신의 암살 대상이 되어 버린다.
여왕은 독이 든 사과였다.
암살을 의뢰한 자가 오히려 목표가 되어 버린다.
인과응보.
자신이 뿌린 덫에 스스로 걸렸다.
레이첼은 자기 발로 함정에 빠져 버렸다.
“욕심이 많은 동생이니 죽음도 말릴 수가 없겠죠.”
“그게 사람 마음이네요. 자신의 죗값을 받는 거죠.”
쏟아지는 햇살이 찬란했다.
저 밝은 빛 아래에서 잠시나마 얼어버린 심장이 녹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고마웠어요.”
엘리는 감사의 의미로 한 손을 내밀었다.
여왕의 손을 받자 유진하는 가볍게 잡아주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중한 예법이자 매너를 보였다.
“다음에 뵙죠.”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유진하는 자리를 떠났다.
국가 공인 탐정으로서 괴도단과 아사신의 사건을 해결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유진하…….”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엘리는 묘한 감정을 받았다.
안도감부터 편안함.
의지가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다시 만났으면 해.”
혼자 남은 엘리는 묵묵히 서서 햇살 속에 머물렀다.
궁전에서 벌어진 음모와 암투는 과거의 사건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왕으로서 마지막 날이자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태양은 따사로웠다.
* * *
집으로 돌아온 유진하와 에어리스, 이소민은 오랜만에 거실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배달 왔다.”
모처럼의 휴가였다.
다들 여행의 피로가 남은 터라 오늘은 외출보다 집에서 휴가를 선택했다.
“맛있겠다.”
배달 음식을 잔뜩 가져온 이소민이 거실에 쫙 음식을 펼쳐 놨다.
피자와 치킨, 샐러드와 햄버거, 스파게티까지 가득 차렸다.
“에어리스, 유진하. 같이 먹자.”
이소민은 치킨 한 조각을 들어 한 입에 물어뜯었다.
입안 가득 치킨의 튀김 맛을 느끼며 한 아름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역시 맛있는 음식이 최고지.”
이어서 피자도 먹었다.
치킨과 피자를 각각 양손에 들고 볼이 빵빵할 정도로 입안에 가득 담았다.
“이소민 누나, 음식 엄청 많으니까 식탐 안 부려도 돼요.”
유진하는 햄버거를 먹으면서 곁눈질로 이소민을 바라봤다.
어차피 음식이 많이 있으니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봤는데 이소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을 계속 탐닉했다.
“식탐이라니 그냥 열심히 먹는 거뿐이라고.”
“저도 먹을게요.”
에어리스는 포크를 들어 스파게티를 둘둘 말았다.
얌얌.
한입에 쏙 넣자 행복감과 포만감이 가득해졌다.
“맛있어요.”
음식은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 주었다.
세 사람은 모여 앉아서 오랜만의 휴가를 만끽했다.
에어리스는 내일의 여행 계획에 기대감이 가득해서 활짝 웃었다.
“내일은 어디로 갈까요?”
“공원도 있고. 호수도 있고. 에어리스가 원하는 곳으로 가자.”
“좋아요, 진하.”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도 마무리되었다.
혼란스러운 일이 많았으나 평화로운 나날이 되었다.
“괴도단의 알파는 놓친 거죠?”
“그 큐브 안에서는 잡을 수가 없었어. 기회는 있었지만 말이야.”
유진하는 피자 한 조각을 들었다.
치즈와 통통한 햄이 가득 올려져 먹음직스러웠다.
“알파는 놓쳤으나 베타는 사로잡았어. 물론 베타는 알파에 대해서 말을 안 하지만…….”
“조커는요?”
“에어리스가 어렵게 잡았잖아. 덕분에 체포했어.”
조커는 감옥에 가두었다.
정부의 간부였던 그는 알카트로스의 멤버가 되었다가 이제는 아사신의 암살자가 되었다.
이제는 범죄자가 되어 완전히 추락했다.
“아사신 세 명도 같이 잡아넣었으니까 지금쯤 조사하고 있을 거야.”
“아사신에도 단장이 있을까요?”
“그럴 거야. 정체가 누군지는 더 조사해야 할 거야.”
유진하는 피자를 마저 먹고 치킨 한 조각을 들었다.
에어리스 역시 닭다리를 하나 손에 들었다.
기름에 잘 튀긴 닭튀김의 향이 콧잔등을 자극했다.
“어떻게든 되었네요.”
에어리스는 닭다리를 한 입 물은 채로 살짝 웃었다.
치열한 격전 끝에 조커와의 승부에서 간신히 이겼다.
전투의 여파가 욱신욱신 온몸에 남아 있었다.
“괴도단의 알파를 놓친 게 정말 아쉬워.”
유진하는 치킨을 뜯으며 중얼거렸다.
괴도 알파는 강적이었다.
자취를 감추고 숨어서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을 터였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잡아야지.”
띠리리리.
전화벨이 울렸다.
치킨을 내려놓은 유진하는 스마트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아, 마스터.”
마스터의 전화였다.
호텔 옥상의 로비에 있던 마스터는 먼발치에서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연락을 걸었다.
“잘 있었어? 좋은 소식을 알려주려고 전화했어.”
푸른 머리카락을 바람결에 휘날리며 마스터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중요한 정보였다.
“드디어 찾았어. 에어리스를 닮은 그 여자가 어느 공간으로 갔는지 말이야.”
마스터는 전화기 너머로 또박또박 자신의 용건을 알려줬다.
중요한 내용이었다.
“바로 만나서 알려줄게. 새로운 시작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