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난입자(3)
밤이 깊어질수록 커다란 배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숨이 턱밑에 차오르듯이 유람선은 고통스럽게 침몰해 갔다.
발판이 무너지고 파괴되는 소리가 배의 비명처럼 들렸다.
“…끝나고 있어요.”
구명정에 탄 사람들은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다.
에어리스도 지친 몸을 추스르며 구명정에 타고 있었다.
옆에는 기절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데려오느라 힘들었네요.”
붉은 눈의 린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쓰러져 있었다.
응접실의 격전에서 린을 제압한 후에 에어리스는 기절한 그녀를 들쳐 메고 구명정에 함께 탔다.
침몰해 가는 배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에어리스는 침묵 속에 빠진 바다를 바라봤다.
어두운 저편 너머에 커다랗던 배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침몰했다.
깊은 바닷속에 갇혀 영원히 잠들어갔다.
“두 사람은…….”
에어리스는 주인공을 떠올렸다.
그들은 비극적으로 이별한다는 결말을 알았다.
그대로 끝나야만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는 시나리오 조건도 떠올랐다.
“하지만 바꾸고 싶었어요.”
에어리스의 눈빛은 차분했다.
깊어가는 밤.
고요해진 바다.
저곳에서 두 주인공이 살아 있기를 기도했다.
“꼭 그렇게 되었으면 해요.”
바다에는 나무로 된 문이 둥둥 떠올랐다.
거기에는 여자 주인공이 올라타고 있었다.
오들오들 떨면서 생존을 위해 버티고 있었다.
“힘을 내요.”
바로 옆에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짝은 하나가 아니었다.
또 다른 문이 하나 더 있어서 거기에는 남자 주인공이 올라탔다.
“제가 드린 선물이에요.”
또 다른 나무문은 에어리스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에어리스는 두 손을 모으며 계속 기원했다.
그랬다.
영화는 비극적인 결말대로 가지 않았다.
두 명의 주인공이 모두 살아남았고 엔딩은 바뀌었다.
베드엔딩이 아니라 에어리스가 바라던 해피엔딩이 되었다.
-시나리오 실패.
영화의 엔딩을 바꾸는 바람에 에어리스는 이곳에 결국 남았다.
아사신의 조커와 린을 상대하느라 체력은 바닥났고 부상은 심한 상태였다.
이제는 믿기로 했다.
“진하.”
자신을 구해준 그 사람이 다시 한번 나타나 주기를 믿기로 했다.
겨울과 빙하의 바다에서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 * *
또 다른 큐브의 방.
화창한 하늘 아래 엘리는 우두커니 있었다.
“후우.”
사브르 검을 손에 든 채로 드레스를 입은 엘리는 눈앞에 적을 두고 있었다.
강철의 기계였다.
“살인 기계라니…….”
미래에서 온 살인 전용 기계이다.
영화에서는 훗날 인간과 기계가 미래 전쟁을 벌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전쟁에 진 기계들은 미래의 인간 지도자를 죽이려고 암살 기계를 과거로 보낸다.
“하아.”
엘리는 불사의 존재처럼 살아나는 기계를 상대해야 했다.
-시나리오 개시
이 방을 지나가려면 결말대로 진행하십시오.
“결국 살인 기계와 싸우라는 소리야.”
엘리는 이 영화를 알고 있었다.
기계는 인간을 끝까지 목표물을 죽이겠다고 달려든다.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남아 주인공을 지켜야 했다.
사브르 검을 움켜쥔 엘리는 칼날에서 푸른 물의 기운을 발휘하여 온몸에 휘감았다.
“엘리먼트.”
물의 흐름을 타면서 엘리의 발이 미끄러지듯이 나아갔다.
기계는 개틀링 기관총을 들고 발사했다.
총신이 여러 개 달려 부피가 큰 기관총이라 대개 차량이나 헬기에 부착하는 무기였다.
기계답게 기관총을 쉽게 장착했다.
드르르륵.
개틀링 기관총의 총신이 맹렬하게 돌아갔다.
우수수 쏟아지는 총탄이 엘리를 향해 날아갔다.
“프로텍티브 월.”
Protective Wall.
엘리는 물보라를 이용해서 물의 방벽을 만들었다.
기관총이 강하다 해도 차원과 공간을 넘어서 가져온 무기는 한 단계 격이 높았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파아아!
물보라에 막혀 날아가던 총알은 전부 멈추었다.
“돌려줄게.”
이어서 물보라에 휩싸인 총알이 전부 살인 기계를 향해 날아갔다.
투두두둑.
무수한 총탄에 맞은 기계는 파지직 전류가 튀는 소리가 내면서 이내 쓰러졌다.
시동 종료.
기계가 가동을 멈췄다.
“휴우, 일단은 끝났나.”
엘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드레스를 살짝 정돈했다.
기계는 잠시 후에 재가동할 터였다.
녀석은 여기서 쓰러질 괴물이 아니었다.
다음 방으로 넘어가려면 주인공을 도와서 계속 기계를 막아야 했다.
그때였다.
-추가 시나리오
새로운 참가자가 들어왔습니다.
상대를 제압하는 추가 시나리오까지 해결해야 방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누가 들어왔다고?”
엘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공원에는 혼자만 있었다.
누군가 들어왔다면 여기 있을 수도 있었다.
“유진하? 에어리스? 아니면 괴도? 대체 누가…….”
저 멀리 엘리를 보는 시선이 있었다.
나무에 숨어 손가락에 바늘처럼 작은 침을 들었다.
그는 엘리의 목덜미를 향해 바늘을 던졌다.
파앗!
아사신은 암살 집단이었다.
완벽한 범죄를 추구하는 알카트로스나 훔치기 자체를 즐기는 괴도단과 성향부터 달랐다.
의뢰 달성이 우선이었다.
‘상대가 알지 못하게 죽인다.’
‘암살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독침처럼 한 방에 끝낸다.’
엘리는 완전히 허를 찔렸다.
전문 암살자의 기습은 예리했다.
“아!”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바늘 침은 엘리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멈췄다.
“위험했네요.”
유진하가 옆에 나타났다.
빛이 몸에서 번쩍였는데 빛의 속도로 나타나서 먼저 침을 잡아냈다.
“유진하?”
“독을 바른 침이에요. 아사신이 이곳에 있어요.”
아사신이라는 말을 듣자 엘리는 표정이 새하얗게 변했다.
암살 집단 아사신.
악명이 워낙 유명한 조직이었다.
“아사신이 여기에 있다는 건가요?”
엘리의 말투와 눈빛이 단호해졌다.
여왕 이전에 과거 실력파 요원이던 모습이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유진하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눈빛으로 상대의 위치를 알려줬다.
공원 건너편에 독침사가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한발 늦었군.”
여왕의 옆에 한 사람이 도착했다.
하얀 가면과 턱시도, 검은 망토를 쓴 괴도 알파였다.
“많이 늦었네요. 하마터면 여왕님이 위험할 뻔했는데.”
“…그렇군요.”
괴도는 자신이 늦었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유진하는 큐브 방의 설계자인 괴도보다 더 빠르게 도착했다.
괴도가 설계한 공간이니 당연히 구조를 가장 잘 알 텐데도 유진하는 괴도보다 더 빨리 왔다.
“비상구를 잘 찾았거든요.”
“비상구?”
“게임을 만든 사람이 가장 게임을 잘하는 건 아니죠. 원작자도 모르는 빈틈이 많거든요.”
“…….”
괴도는 말문이 막혔다.
큐브 방의 설계자도 모르는 비상구를 찾아냈다니.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비상구로 쭉 타고 내려오면 돼요. 눈썰미만 있으면 찾을 수 있죠.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아사신부터 처리하죠.”
유진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괴도 알파는 아까의 대결에 이어 2연패를 속으로 인정해야 했다.
동시에 3연패는 절대 안 된다는 비장한 각오가 샘솟았다.
“독침사입니다. 뱀의 침이라고 불리죠.”
“옆에는요?”
독침사는 뱀의 침이었다.
암살이 실패하자 정체를 들킨 아사신은 정면으로 나섰다.
“옆에는요?”
“반월도의 만이군요.”
복면을 쓴 남자 둘이 살의를 드러냈다.
뱀의 침은 손에 무수한 독침을 쥐었고, 반월도의 만은 구부러진 검을 들었다.
동그랗게 휘어진 검날에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한 명씩 맡을래요?”
유진하가 먼저 제안했다.
괴도 알파는 평평하고 넓은 테두리가 달린 모자를 손으로 잡았다.
하얀 가면 속에서 눈동자를 빛내며 유진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왕님께 결례를 범한 죄를 이걸로 갚겠습니다.”
괴도는 검은 오오라를 발휘했다.
유진하는 빛의 힘을 최대로 모으며 온몸이 프리즘처럼 무지개 빛깔로 빛났다.
“한 명씩 상대하죠.”
아사신 뱀의 침. 반월도의 만.
유진하와 괴도는 두 명의 암살자를 상대했다.
상대도 강인한 오오라를 발휘하며 총력전 태세에 들어갔다.
아사신 역시 같은 작전이었다.
“하나씩 맡는다.”
뱀의 침은 수많은 침을 꺼내어 공중에 고요한 물결이 흐르듯이 풀어놨다.
마치 뱀의 형상처럼 침들이 길게 이어졌다.
반월도의 만은 휘어진 칼날에 기운을 불어넣어 날카로운 검기를 발휘했다.
일촉즉발.
양측은 상대의 기색을 살피며 탐색전을 시작했다.
움직이는 순간에 격돌한다.
승패는 한순간에 결판이 난다.
“신호를 할게요.”
온몸에 빛을 머금은 유진하가 차분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짧은 호흡을 내뱉으며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제압해요.”
괴도와 유진하는 신호와 동시에 달려들었다.
검은 기운을 머금은 괴도 알파.
빛의 기운을 발휘하는 유진하.
두 사람은 섬광처럼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듯이 나아갔다.
아사신도 상당한 실력자였으나 빛의 속도는 차원이 달랐다.
허공에 뿌려둔 독침은 빛에 의해 튕겨 나갔다.
한순간에 승부가 났다.
파아아.
유진하는 강렬한 빛을 머금으며 자리에 착지했다.
빛이 바람처럼 느껴졌다.
이어서 괴도 알파가 검은 오오라로 나아갔다.
“여왕님 앞에서 오래 끌지는 않겠습니다. 더는 결례를 보일 수는 없으니까요.”
어둠으로 휘감아 반월도의 만을 그대로 잡았다.
단숨에 짓누르듯이 마무리했다.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녀석이 기절해 버렸다.
“끝났다.”
괴도는 모자를 잡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기쁜 느낌은 아니었다.
“도둑질이 아니라서 재미가 없는 건가요?”
유진하가 옆에 다가왔다.
괴도는 슬쩍 곁눈질로 유진하를 보더니 슬쩍 웃었다.
“정확하군요. 이제 속마음까지 알아채는 겁니까?”
“행동 패턴을 보고 추측한 거죠.”
괴도 알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서운 녀석…….’
그나마 이번 대결에서는 유진하와 무승부를 기록했다.
3연패의 불명예는 피하게 되었다.
“아사신 중에도 고위급이 있어.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아사신에 대해서 잘 아네요.”
괴도 알파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예전에 알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괴도 알파는 특이한 도둑이었다.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했으나 본질은 도둑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서 피해를 주었다.
“이번 일에서 제가 한 실수는 정중하게 사과하겠습니다.”
괴도 알파는 손을 한 번 흔들며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그가 선 바닥에서 갑자기 변화가 시작되었다.
바닥이 분해되더니 큐브 조각으로 바뀌었다.
마치 꽃송이가 피어나듯이 무수히 나타났다.
“기하학 큐브를 해제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유진하는 괴도를 쳐다봤다.
만들어진 공간은 서서히 조각으로 나뉘어 괴도의 몸을 감쌌다.
“다음에 보도록 하자. 유진하라는 이름은 꼭 기억하도록 하지.”
큐브의 방이 해제됐다.
무수한 큐브 조각 속에서 괴도는 몸을 돌리고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지평선 너머의 하얀 영역으로 갔다.
조각이 쏟아지는 저편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괴도 알파…….”
유진하는 사라져 가는 괴도를 바라봤다.
괴도단, 아사신과의 승부까지 어느새 끝나갔다.
큐브가 사라지고 해방을 맞이했다.
바깥으로 나오니 밤이 지나가고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길었던 밤이었어.”
유진하는 주변을 돌아봤다.
경찰차들의 사이렌과 수많은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진하!”
에어리스도 무사히 빠져나왔다.
전대미문의 여왕 납치 사건은 서서히 다음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정말 고생했어요.”
에어리스가 천천히 걸어왔다.
온몸에 무수한 상처를 입었지만 그래도 환한 미소로 생글생글 웃었다.
“에어리스, 정말 수고했어.”
유진하는 에어리스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조금씩 밝아오는 새벽빛 아래에서 모두가 평온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무리는 아직이지.”
유진하는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여겼다.
배후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여왕을 노렸던 자.
아사신에게 암살을 의뢰한 자.
그자가 남아 있는 한 엘리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아사신의 의뢰자.”
유진하는 곰곰이 암살 의뢰자의 정체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여왕의 주변을 의심했다.
가까운 곳에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