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난입자(2)
초호화 유람선은 서서히 빙하에 다다랐다.
비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파티와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아, 어디로 가야 하죠?”
에어리스는 객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은 결말대로 마무리하는 거였다.
비극적인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을 찾아야 했다.
“주인공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은 짧은 사랑을 나눈 후에 긴 이별을 맞이한다.
이 아름다운 배와 운명을 같이 하며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주인공들이 어디에 있을까?”
에어리스는 자세한 영화 내용까지는 기억하지 못한 터라 지금 주인공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객실과 응접실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면서 찾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다급했다.
“후우.”
허둥지둥하는 에어리스를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암살단 아사신이었다.
복면으로 가린 얼굴에 매서운 눈매를 머금은 여자였다.
아사신의 린.
그녀의 암호명이었다.
“…제물을 찾았어.”
아사신은 암살 대상을 ‘제물’이라고 지칭했다.
원래 그들의 최종 목표는 여왕 암살이었으나 이 방에서 나가려면 시나리오 조건을 따로 끝내야 했다.
-시나리오 개시
이 방을 나가려면 결말 그대로 진행하십시오.
-추가 시나리오
새로운 참가자가 들어왔습니다.
상대를 제압하는 추가 시나리오까지 해결해야 방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상대는 에어리스.”
금발의 아름다운 외모.
등에 멘 대검.
아사신은 세계 각지를 아우르는 조직답게 뛰어난 정보력을 가졌다.
“알카트로스 소탕전에 참가해서 활약. 지금은 괴도단 체포전에 투입 중.”
여왕 암살전에서 아사신은 브리핑을 통해 중요 인물들을 파악했다.
대검의 에어리스.
지략의 유진하.
두 사람은 주의 대상으로 기록해 놨고 여차하면 제거하라는 지시도 세웠다.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제거한다.’
아사신 린은 암기를 준비했다.
양손의 손목에 착용한 카타르는 암살에 최적화된 무기였다.
소매에 칼날을 감추고 상대에게 몰래 다가가서 슥 찌른다.
칼날로 목과 배를 가른다.
‘죽음을 내리는 자.’
암살 기술은 단번에 끝내기를 원칙으로 삼는다.
린은 에어리스의 뒤로 서서히 다가갔다.
영화의 주인공을 찾느라 정신이 팔린 에어리스가 허둥거리며 완전히 배후를 내주고 있었다.
방심하는 지금.
기습할 타이밍이었다.
손목에 착용한 카타르의 칼날이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목표는 에어리스였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아사신 린이 원했던 소리가 아니었다.
카타르가 대검에 부딪쳤다.
“누구?”
에어리스는 남보다 예민한 감각이 있었다.
방심하긴 했어도 반사적인 대응은 뛰어난 타입이었다.
카타르로 찌르려는 순간에 암살자가 살기를 뿜어내자 곧바로 알아차렸다.
살기를 느끼자마자 대검을 움직여서 막아냈다.
암살자의 살의 덕분에 에어리스는 가까스로 기습을 방어했다.
“…당신은 누구죠?”
에어리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암살자를 바라보았다.
복면의 여자였다.
붉은 머리에 눈빛마저 빨간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림자처럼 몰래 다가왔고 손에는 카타르가 있었다.
칼날이 섬뜩한 빛을 발현했다.
“혹시 암살자……?”
에어리스는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세계 3대 조직 아사신이었다.
“당신은 아사신인가요?”
아사신 린은 한 걸음 물러났다.
기습이 실패하자 정석대로 자리를 피하고 회피했다.
암살자는 무리하지 않는다.
응접실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이 많아서 몸을 숨기기에 좋았다.
“잠깐만요!”
에어리스가 서둘러 아사신 린을 쫓으려고 달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쿠웅!
커다란 충격이 느껴졌다.
응접실의 조명이 모두 한 차례 꺼졌다가 다시 반짝이며 정상으로 돌아왔다.
파티의 흥겨운 분위기는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정적이 흘렀다.
“무슨 일이지?”
“충격이 있었는데.”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불안한 음성 속에서 에어리스는 이내 운명의 시간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빙하랑 부딪쳤어요.’
유람선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배는 쏟아지는 바닷물에 의해 서서히 목구멍이 차오르듯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길어야 수 시간.
배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아, 사라졌어.”
아사신은 그 틈에 자취를 감췄다.
조명이 한 차례 깜빡이는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딘가에 숨었다면…….”
암살자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언제든지 다시 기습할 터였다.
에어리스는 아까 아사신 린이 발휘했던 그 살기를 기억했다.
사람을 죽이려고 숨조차 완전히 죽이고 다가왔다.
마지막 순간에만 살기를 드러낸 실력자였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어요. 사람이 아닌 것 같았죠.”
냉정하고 매서웠던 붉은 눈빛.
살기만이 남은 그녀의 두 눈이 두려움을 주었다.
“후우.”
침몰해 가는 유람선 속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불안감에 젖어갔다.
분위기가 바뀌자 파티에 참가했던 귀부인과 신사들이 썰물처럼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배에 느껴지는 진동과 충격이 그들에게 깊은 불길함을 주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불안감이 대신 공간을 메워가고 있었다.
이윽고 응접실에는 에어리스가 혼자 남았다.
“…이제 나오세요.”
홀로 남은 에어리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상대를 불렀다.
아사신 린.
여기서 암살자를 기다렸다.
“추가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반드시 당신을 쓰러뜨리라는 조건이 있었거든요.”
대답은 없었다.
아마 어디선가 에어리스를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당신도 같은 조건일 거예요. 우리 중에서 한 명만 이곳에서 나갈 수 있으니까요.”
정적이 계속됐다.
에어리스는 대검을 들어 전투 자세를 취했다.
검날이 정면을 겨누었다.
“저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어요.”
암살자가 숨어서 기다린다면 밖으로 나가기가 곤란했다.
침몰하는 배에서 곧 아비규환이 벌어질 테고, 그 안에서 암살자는 무서운 위협이 된다.
“승부를 기다리겠어요.”
에어리스는 가만히 서서 집중했다.
눈에 보이는 시야와 귓가에 들리는 소리.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까지.
하나하나 주변 환경을 느끼며 집중했다.
‘아사신은 반드시 여기에 있어.’
오래지 않았다.
마침내 배가 기울어지자 응접실의 탁자와 의자가 기우뚱 흔들렸다.
비틀비틀.
에어리스가 살짝 발을 헛디뎠다.
자세가 처음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 순간.
아사신 린의 카타르가 움직였다.
은신의 카타르(오른손).
-은신 상태에 들어가면 온몸이 투명화된다.
단, 공격 시에는 해제된다.
에어리스의 예상대로 아사신 린은 처음부터 응접실에 숨어 있었다.
은신 상태로 투명화가 되어 숨었다가 재차 암살 기회를 노렸다.
하이에나처럼 사냥감이 지쳐 버리기를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
에어리스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자 기회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카앙!
기습을 예상했던 에어리스는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대검을 들어 가까스로 카타르를 막아냈다.
“아!”
카타르는 하나가 아니었다.
왼손에 착용한 두 번째 카타르가 나타났다.
칼날의 카타르(왼손).
-영기의 칼날을 발휘한다.
아사신 린의 온몸에 서린 살기의 기운이 카타르에 스며들었다.
모여진 기운은 이내 카타르의 칼날처럼 영기의 기운으로 집약됐다.
일순간 마치 파동처럼 칼날이 무수히 발산되었다.
100개나 되는 영기의 칼날은 자세가 무너진 에어리스를 향해 작렬했다.
대검 하나만으로 무수한 칼날을 막아내기란 무리였다.
“아악!”
팔과 다리.
어깨와 허벅지에 영기의 칼날이 사정없이 박혔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몸을 파고들어 강한 통증을 주었다.
“으윽!”
에어리스는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개의 카타르를 양손에 든 아사신 린은 붉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은신의 카타르와 칼날의 카타르.
수많은 암살 대상자와 호위자들을 무너뜨린 연계기였다.
“당신이 에어리스…….”
린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복면을 쓴 그녀는 카타르를 착용한 양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균형이 무너진 유람선에서 응접실은 차츰 기울어갔다.
“나는 아사신. 붉은 눈의 린이다.”
아사신 린은 자신의 호칭을 알려줬다.
복면 속에 그녀의 붉은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녀의 말을 들은 에어리스의 눈빛은 반대로 차갑게 식어갔다.
“붉은 눈의 린이군요.”
에어리스의 푸른 눈과 아사신 린의 붉은 눈.
서로의 눈은 오롯이 상대의 눈망울을 담았다.
붉은 눈의 린이 작게 속삭였다.
“암살자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지. 이름도 흔적도 남기지 않아.”
“그럼 지금 알려준 이유는요?”
“곧 기억에서 지워질 거야. 목숨이 사라질 테니까.”
린은 양손의 카타르를 내질렀다.
에어리스의 목과 심장.
두 곳을 동시에 노렸다.
“하압!”
에어리스는 대검을 연속으로 휘둘러서 카타르를 동시에 쳐냈다.
파열음이 들렸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치며 격렬한 검술 대결이 벌어졌다.
“하아.”
린은 카타르의 달인이었다.
양손의 단도에서 발휘하는 연속 베기와 찌르기가 일품이었다.
하지만 에어리스는 쌍검의 기술에 익숙했다.
‘조커.’
순간 회피술의 조커는 양손의 단검술마저 압도적으로 발휘했다.
무수하게 날아오는 칼날.
강한 압박감과 회피력이 겸비되어 까다로운 상대였다.
에어리스는 숱한 격전 끝에 조커의 단검술에 적응한 터였다.
붉은 눈의 린이 발휘하는 카타르 양손 베기도 비슷한 궤적으로 움직인 터라 익숙했다.
카앙!
대검을 휘두르며 카타르의 속도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바람처럼 연속으로 파고드는 카타르의 맹공을 일일이 대검 하나로 받아냈다.
“…….”
붉은 눈의 린은 당황했다.
원래 에어리스는 아사신에 새로 들어온 조커에게 맡겨둔 터였다.
조커가 했던 말이 있었다.
“유진하와 에어리스는 아주 재밌는 상대야. 너희들에게 내 타깃을 양보하지 않겠어.”
조커가 여왕 암살 의뢰라는 어려운 임무에 자청한 이유도 사실 에어리스와 유진하와 맞서기 위해서였다.
대검의 에어리스.
조커가 경계하는 대상이었다.
지금 아사신 린 앞에서 모든 카타르의 공격을 받아내며 괴물 같은 실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압!”
에어리스가 반격을 준비했다.
그 순간에 다시 배가 크게 기우뚱 흔들렸고 응접실 바닥은 45도로 기울었다.
에어리스와 린은 기울어진 각도에 따라 동시에 나동그라졌다.
“아앗!”
미끄러져 떨어지다가 에어리스는 안전하게 착지했다.
아까는 응접실의 벽이었으나 지금은 유람선이 기울어져 바닥이 되었다.
“아! 또 놓쳤어.”
주변을 돌아보는데 붉은 눈의 린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또 은신인가요?”
카타르의 은신 능력을 사용해서 모습을 숨긴 모양이었다.
다시 기습할 작정이 확실했다.
아까는 가만히 기다렸던 에어리스지만 이번에는 대응을 바꾸었다.
“계속 숨어 있겠다면…….”
에어리스는 온몸에 기운을 모았다.
손등에 새겨진 검과 방패의 문장도 빛을 뿜어냈다.
하얗게 서린 오오라 속에서 에어리스는 대검을 들고 있었다.
“다시 나오게 하겠어요.”
양손으로 대검을 거꾸로 든 에어리스는 최대한 높은 곳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려쳤다.
검기에서 나오는 위력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바닥부터 벽까지 응접실 전체가 부서졌다.
“아!”
부서진 바닥과 벽이 파편이 되어 휘날렸다.
파편 중에서 어딘가에 부딪치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 있었어요.”
은신은 투명화 능력이었고 겉모습을 가려준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물을 뿌리면 투명 인간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이는 원리와 비슷했다.
에어리스는 파편을 사방에 흩뿌려서 같은 효과를 노렸다.
“하압!”
에어리스는 단숨에 치솟아서 파편이 부딪친 허공으로 달려 나갔다.
마침내 은신 상태의 린을 찾아내고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거침없이 내려치는 대검은 붉은 눈의 린에게 완벽한 일격을 가했다.
“아악!”
부서지는 카타르의 칼날.
타격을 받자 은신이 해제되면서 린의 모습이 드러났다.
“끝내겠어요.”
가라앉아가는 유람선에서 벌어지는 에어리스와 아사신의 린의 대결.
에어리스는 첫 번째 가르기에 이어 반원처럼 가르는 두 번째 베기를 휘둘렀다.
연속 베기가 휘몰아쳐서 붉은 눈의 린에게 작렬했다.
“커억!”
암살자 린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쓰러진 붉은 눈의 린을 보면서 에어리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에 박혔던 칼날이 계속 통증을 주었다.
“…이겼어.”
에어리스는 지친 기색 끝에 고단함을 느꼈다.
조커에 이어 붉은 눈의 린과의 연이은 격전을 벌이느라 피로감이 누적된 탓이었다.
“결말을 봐야 하는데…….”
에어리스는 이내 힘이 빠졌다.
부상 탓에 움직이기 힘들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친 기색으로 벽에 기댄 에어리스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진하,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뒤를 부탁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