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괴도단(3)
괴도단의 알파는 검은 상자를 가지고 있었다.
끼릭끼릭.
톱니가 돌아가는 기하학 큐브였다.
“우리는 화려하고 예술적인 방법으로 물건을 훔칩니다. 당신 같은 추적자들은 그 예술을 파헤치려는 훼방꾼에 불과하죠.”
“범죄는 예술이 아니야.”
유진하는 정색했다.
100장의 카드를 꺼내서 괴도단과 맞설 준비를 마쳤다.
괴도 알파가 든 검은 상자는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조각이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기하학 큐브는 마치 발전된 과학의 정수가 들어간 듯이 전류마저 흐르고 있었다.
“좋아. 직접 보여주지.”
괴도 알파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기하학 큐브를 내밀었다.
끼릭끼릭.
톱니가 빠르게 돌아가더니 큐브의 상자가 서서히 뒤틀렸다.
정육면체 기하학 큐브는 팔면체, 십이면체로 변하더니 점점 수백 개의 면을 가진 상자로 바뀌었다.
파아앗!
기하학 상자가 갑자기 사방으로 퍼졌다.
그때였다.
기하학 큐브가 발동할 시점에 창문을 깨면서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바람처럼 달려온 에어리스였다.
“에어리스.”
“진하, 저도 왔어요.”
가까스로 도착한 에어리스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가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어리스는 빛나는 대검을 메고 있었다.
“반드시 막아내겠어요.”
여왕은 에어리스를 바라봤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선 전사 같은 에어리스였다.
‘금발의 저 여성분은……?’
대검을 들고 괴도들을 상대하겠다는 포부의 여성.
깨어진 창가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금발 머릿결이 휘날렸다.
휘날리는 머리칼 속에서 에어리스의 당당한 눈빛이 보였다.
여왕은 에어리스의 자신감 있는 자세를 보며 기품 있고 아름답다고 여겼다.
“이소민 누나는?”
유진하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이소민의 행방을 물었다.
빠르게 달려오느라 미처 이소민까지 챙기지 못했던 에어리스가 순간 당황해서 식은땀을 흘렸다.
“아까까지는 거의 비슷하게 왔는데요. 마지막에 모르겠어요.”
그 순간.
괴도 알파가 가진 기하학 큐브가 1만 9천의 면을 가진 정육면체가 되어 사방 3㎞를 감쌌다.
외부와 차단된 공간이 만들어졌다.
기하학 큐브의 바깥에서 출입은 불가능해졌다.
“아앗! 늦었잖아!”
쾌속의 사바톤 부츠를 신었으나 이소민은 아직 조작이 서툴렀다.
몇 번 버벅거리는 바람에 늦게 도착해 버렸고 기하학 큐브의 차단벽에 막혔다.
“하아, 망했네.”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나마 바람을 가르듯이 날아간 에어리스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유진하, 에어리스…….”
홀로 남은 이소민은 큐브의 검은 차단벽 앞에서 어서 열리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사이렌을 울리며 뒤늦게 도착한 경찰차도 큐브의 벽 앞에 멈췄다.
그 즈음.
이소민은 불길한 감정을 받았다.
“뭐지?”
살기 어린 압박감.
저 기하학 큐브의 공간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 있어. 조심해야 하는데.”
위기감과 초조함.
시끄러운 사이렌과 고요한 조명, 수많은 경관들 속에서 이소민은 혼자 외로이 남았다.
유진하와 에어리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게임을 시작할까요?”
괴도 알파는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이 만든 기하학 큐브의 공간에 즐거운 대결을 구상하고 있었다.
“간단한 게임입니다.”
알파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신호가 나오자 갑자기 저택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앗?!”
지진 같은 울림이 발생하자 유진하는 비틀거리다가 살짝 주저앉았다.
신체 능력이 남다른 에어리스는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해서 버텨냈다.
“여긴 기하학의 공간이죠. 내가 원하는 어떤 물체든 만들 수 있습니다.”
괴도 알파가 손가락으로 옆의 벽을 쿡 찌르듯이 가리켰다.
손가락이 지목한 벽면은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원자 단위로 분해되다가 이내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원자 재결합?”
원자로 나뉘었다가 재결합 상태를 거쳐 물체의 형태가 바뀌었다.
아까의 벽면은 장검을 든 기사 조각상이 되었다.
“기사?”
하나의 조각이 아니었다.
좌우의 벽면이 모두 12명의 기사로 바뀌었다.
“어떤가요? 제가 만든 기사단입니다.”
괴도 알파는 여유를 부리면서 쓰고 있던 챙 모자를 잡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옆에서 베타는 입가를 가리며 쿡쿡 비웃음을 흘렸다.
“괴도단의 기사단이지.”
그들은 농담하면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어리스는 차분히 대검을 움켜쥐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한 번 숨을 고르더니 이윽고 단숨에 달려들었다.
기사들이 대응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검 하나로 기사들을 막겠다는 겁니까?”
괴도 알파는 에어리스를 얕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금발에 연약해 보이는 몸인데도 커다란 대검을 가졌다.
저렇게 큰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압!”
에어리스의 반응은 괴도의 예상을 넘어섰다.
기사 석상들이 검을 들어 방어하기도 전에 대검이 먼저 닿았다.
콰과과!
기사 석상이 대검에 갈라져 순식간에 반으로 나뉘고 조각이 되었다.
“어?”
괴도단의 두 사람은 예상치 못한 에어리스의 실력에 당황했다.
“하아아압!”
전광석화.
에어리스는 가속이 붙어 번개처럼 몰아쳤다.
홀로 기사단 사이로 파고들어 대검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와, 인간의 수준이 아닌데?”
괴도 베타는 같은 여자로서 에어리스의 몸놀림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대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기사 석상이 베어지는데, 거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눈동자에 새겨졌다.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예술적인 몸짓이라 여겼다.
“정말 대단해.”
괴도 베타는 에어리스가 대단한 검사처럼 보였다.
“훌륭한 실력자인 줄 몰랐군요.”
괴도 알파도 동의했다.
기사단 12명은 에어리스 하나에게 전멸당했다.
“하아.”
가루가 된 조각 속에서 대검을 든 에어리스가 홀로 남았다.
차분하면서도 가련한 눈빛으로 괴도단을 쳐다봤다.
“다른 팀과 질적으로 다르잖아. 이번에는 꽤 재밌게 즐길 수 있겠어.”
괴도 알파는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에 떨어진 기사단의 파편은 다시 원자화되더니 재결합을 시작했다.
“또 변화?”
에어리스는 사방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존재를 바라봤다.
새로운 형태로 변해 가다가 이제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괴물이 되었다.
기다란 손톱과 매서운 눈빛의 괴수였다.
크르르르.
에어리스는 대검을 들어 괴물을 향해 겨누었다.
살아 있지 않은 존재가 매서운 기운과 긴 손톱을 위협적으로 내밀었다.
곧바로 대검을 휘둘러서 괴물을 베어버렸다.
“아무리 부숴도 소용없습니다. 끝없는 싸움이 되는 거죠.”
괴도 알파는 가만히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지켜봤다.
어차피 이곳에서 그는 무엇이든 원자 재결합을 시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항상 여유를 가졌다.
“더 보여드릴까?”
손가락을 다시 튕겼다.
온 사방이 모조리 원자 단위로 변해 가더니 회오리처럼 뭉치며 재조합을 거쳤다.
이전에 만들던 기사단이나 괴물과는 달랐다.
모든 곳을 새롭게 만들어 냈다.
“여기가 게임의 무대입니다.”
이전의 저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원자 재결합을 거치자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100개의 방이 있죠. 이곳에서 승부를 내겠습니다.”
정육면체 큐브로 바뀌었는데 검은 상자로 뒤덮여서 칙칙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앞으로 24시간 동안 기회가 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찾아내서 제압하면 이기는 게임이죠. 제한 시간이 지나거나 게임을 포기하면 우리의 승리입니다.”
숨어 있는 괴도단을 찾아라.
숨바꼭질처럼 간단한 규칙이었다.
“패배한 쪽은 이곳에 남게 됩니다. 물론 여왕님은 참가하지 않으니까 게임이 끝나면 무사히 보내드리겠습니다.”
괴도단은 여왕에 대해서는 깍듯하게 대접했다.
어차피 여왕을 훔친다는 행위도 게임의 룰 중에 하나였고 경찰들을 바보로 만들었으니 만족했다.
괴도단의 이런 배려는 여왕에게는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행위였다.
무례하다고 여겼다.
“그럴 필요 없어요.”
여왕은 괴도단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하와 에어리스를 바라보더니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저는…….”
여왕은 어깨를 펴고 위엄이 어린 눈빛을 머금으며 선언했다.
“나도 게임에 참가하겠습니다.”
법령을 선포할 때처럼.
여왕은 당당했으며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하가 여왕을 만류했다.
“여왕님, 그건 위험해요.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잘할 수 있어요.”
여왕은 결심을 굳힌 뒤였다.
오히려 긴장감에서 벗어났는지 한결 표정이 편해지고 밝아졌다.
“저도 검술을 배웠고 기마술도 알아요. 한 명의 몫은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여왕은 손가방을 꺼냈다.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귀중품이었는데 요원들의 가방과 비슷한 기능이 있었다.
카드와 무기를 보관할 수 있었다.
“제 검이에요.”
여왕은 호신용 무기를 소환했다.
가늘고 기다란 사브르 검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가녀린 외모의 여왕은 은발의 머리를 휘날리며 검을 들었다.
대검의 에어리스.
사브르의 여왕.
카드의 유진하.
세 사람이 괴도가 만든 게임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좋습니다. 셋이서 함께하십시오. 그럼 이만.”
괴도단의 알파와 베타는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뒤쪽의 검은 벽에 닿자 그들은 스르륵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괴도 알파는 벽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숙녀분들에게 인사를 드리죠. 무사히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괴도단은 자취를 감추었다.
검은 큐브에는 100개의 방이 있었고, 괴도단은 은신처를 마련해 두고 숨어 있을 터였다.
“정말 정신이 없는 도둑들이야.”
유진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어리스는 대검을 도로 등에 메고 여왕을 바라봤다.
“여왕님?”
젊고 아름다운 여왕은 사브르 검을 들어 남다른 자태를 자아냈다.
여왕도 에어리스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까 대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봤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했어요.”
여왕은 슬쩍 에어리스 옆으로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머릿결이 좋네요. 어디 괜찮은 미용실에 가나요?”
“아, 집 근처에서 미용실 언니가 해주셨어요.”
근엄할 줄 알았던 여왕은 친근한 성격이었다.
스스럼없이 격식을 차리지 않고 털털한 매력을 보였다.
“여왕님도 아름다우세요.”
“어머, 칭찬은 괜찮아요. 그리고 여왕님보다는 편하게 불러주세요. 엘리자베스 3세인데 애칭으로 엘리라고 불러요.”
“아, 저는 에어리스에요.”
평소에 엉뚱하고 순진한 모습이 있으나 전투에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나서는 에어리스.
차분하고 위엄 있는 여왕임에도 물러서지 않는 엘리.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편해졌다.
“나는 조금 소외된 느낌이네.”
엘리는 유진하에게도 다가왔다.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마술사라는 별명이 있다고요?”
“네, 여왕님… 아니, 엘리.”
“편하게 얘기하세요. 국가 공인 탐정이라고 들어서 대단하다 느꼈거든요.”
엘리는 활짝 웃었다.
너무나 환한 미소라서 눈부실 만큼 밝았다.
“하하. 감사합니다. 저에 대해서 알고 계셨네요.”
“마스터에게 들었어요.”
“네?”
예상치 못한 엘리의 대답이었다.
오히려 엘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당돌하게 얘기했다.
“저는 여왕이 되기 전에 정부 요원이었어요.”
엘리가 든 사브르는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요원 L. 마스터의 곁에 있던 저의 코드명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