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괴도단(2)
-버킹엄 궁전을 지키는 모든 분들께. 궁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갔습니다.
괴도단.
괴도단이 보낸 사건 종료 메시지를 받자 버킹엄 궁전은 일대가 침묵으로 조용해졌다.
그들은 사건 현장에서 벌써 ‘무언가’를 훔쳐갔다고 통보했다.
이소민은 당황해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유진하! 괴도단이 벌써 훔쳐갔다는데?”
유진하는 검은 초대장을 살피더니 이내 생각에 잠겼다.
“녀석들이 무엇을 훔쳤는지 알겠네요…….”
괴도단은 버킹엄 궁전에서 가장 귀한 것을 훔치겠다고 예고장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훔쳤다고 통보했다.
유진하는 머릿속에 딱 하나의 도난품이 떠올랐다.
“역시 ‘그거’였네요.”
유진하는 이제는 필요 없어진 괴도단의 초대장을 바람에 훅 날려 보냈다.
바람결 속에 나부끼던 초대장은 어둠 속에 파묻히듯이 사라졌다.
“진하, 정말 알았어요?”
에어리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어봤다.
“지금 가려고 해.”
유진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에서 바람의 카드를 꺼냈다.
괴도단이 목표로 삼은 것.
도난품이 있는 장소로 빠르게 바람의 날개를 사용해서 날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 * *
“괴도단이 버킹엄 궁전에 나타난다면…….”
개인 방에 들어온 여왕이 탁자 앞에 앉았다.
탁자에는 사자와 페가수스가 그려진 왕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방에는 왕가의 전통을 따른 깃발과 커튼이 진열되었다.
“상황은 끝났으려나?”
버킹엄 궁전에서의 소동이 일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를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새로 등극한 젊은 여왕은 새하얀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
기다란 은발 머리와 매끈한 콧날.
짙은 눈꺼풀이 자리 잡아서 아름다운 미모를 자아냈다.
이십 대 초반 절정의 미를 지녔다.
“햇필드 하우스에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명의 경관이 여왕의 근처를 경호했다.
여왕이 피신한 장소는 기밀이었다.
이곳에 남아 버킹엄 궁전에서의 괴도단 사건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삐익.
무선이 들렸다.
경관은 연락을 받아서 사태를 파악했다.
-괴도단은 버킹엄 궁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버킹엄에서 가장 귀한 것을 훔치겠다는 도전장을 보내놓고 나타나지 않았다니.
“녀석들이 겁을 먹은 건가?”
여왕을 경호하는 네 명의 경관들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농담을 주고받았다.
경관들끼리 가볍게 웃는 와중에 이윽고 한 명의 경관이 씨익 웃었다.
“괴도단은 벌써 왔습니다.”
목소리가 바뀌었다.
중년의 베테랑 경찰이었는데 젊고 낭랑한 청년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다른 사람들이 이상함을 감지할 즈음에 경관이 먼저 선수를 쳤다.
품에서 권총을 꺼내어 동료 경관을 겨누었다.
“너는?”
“어어, 괜히 움직이지 말라고. 불상사를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옆에 있던 다른 여성 경관도 본색을 드러냈다.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함께 권총과 수갑을 꺼냈다.
“미안. 괴도단은 처음부터 버킹엄 궁전에 가지 않았어.”
네 명의 경관 중에서 두 사람은 정체가 달랐다.
그 둘은 권총을 손에 들고 다른 경찰들을 위협했다.
“너희는 누구지?”
“우리가 괴도단이야.”
두 사람은 변장 카드를 손에서 꺼냈다.
모습과 목소리까지 완전히 바꿔주는 능력이 있어서 괴도단이 자주 사용하는 카드였다.
지금은 경관으로 위장해서 여왕에게 접근했다.
“괴도단!”
두 사람은 정체를 드러냈다.
눈을 가린 하얀 가면과 검은 옷.
휘날리는 망토.
두 남녀는 괴도단이었다.
“버킹엄 궁전의 가장 귀한 것을 훔치겠다고 했잖아. 그럼 당연히 여왕님이지.”
괴도단의 남자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허를 찔린 경관들은 수갑이 채워지고 재갈까지 물렸다.
“불편해도 잠시만 버텨줘.”
괴도단의 여자는 꽁꽁 묶여 쓰러진 경관들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어깨를 툭툭 쳐줬다.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윙크까지 상큼하게 날려줬다.
괴도단은 이 상황을 즐긴다는 듯이 행동했다.
“당신들이 괴도단이라고요?”
여왕은 낯선 침입자의 존재를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기품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젊고 아름다운 미모 속에 왕가의 여왕에 어울리는 배포가 있었다.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여왕 폐하.”
괴도단 남자는 공손하게 손을 가슴에 올리고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췄다.
여왕을 맞이하며 매너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렇군요. 당신들이 괴도단…….”
괴도단이 예의를 갖추자 여왕도 가볍게 목례하며 답례했다.
“이제 알겠어요. 당신들은 처음부터 내가 목적이었군요.”
“송구하지만 사실입니다. 겁먹은 경찰들이 알아서 저희에게 여왕님을 모셔다드린 거죠.”
괴도단 남자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여왕의 눈을 바라봤다.
푸른빛의 눈동자를 머금은 여왕은 절세의 미모를 자랑했다.
“직접 뵈니 더 아름다우시네요. 저는 괴도단의 알파라고 합니다. 옆에는 베타라고 하죠.”
자신들을 소개한 괴도단의 알파는 마치 홀린 듯이 여왕의 얼굴을 계속 바라봤다.
“어이,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여왕님이 무안해지잖아.”
괴도단의 베타는 눈을 흘기며 남자 동료인 알파에게 잔소리를 했다.
왠지 질투하는 느낌도 조금은 담겼다.
“두 사람…….”
괴도단을 지켜보던 여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괴도단은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죠? 저에게 용건이 있나요?”
둘이서 아옹다옹하던 괴도단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흠흠.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괴도단의 알파가 여왕을 쳐다봤다.
“특별한 것은 아니죠. 그냥 재미가 있어서죠.”
“재미요?”
뜻밖의 대답을 듣자 여왕의 눈빛이 사뭇 날카로워졌다.
알파는 손을 머리 위로 올린 후에 천천히 내렸다.
여왕을 향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저희가 가진 능력이면 무엇이든 훔칠 수 있다. 그런 얘기죠.”
옆에 있던 괴도단 베타도 살짝 웃었다.
“호호,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우리가 무엇이든 훔칠 수 있다는 걸 세상에 증명하고 싶거든요.”
괴도단의 두 사람은 자신들의 행위에 자만심과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왕이 보기에 저들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무엇이든 훔칠 수 있는 자…….’
괴도단은 그 명칭을 자랑삼아 자신들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길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들이 하는 짓은 도둑질에 불과해요.”
“그건 저희도 동의하는 바죠.”
괴도단의 알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베타도 알게 모르게 미소를 지은 채로 살짝 윙크를 지었다.
“항상 최고의 부자들과 수집가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죠. 약간의 수고비만 빼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요.”
“…….”
훔친 물건을 나누는 도적단.
하지만 그들은 절대 자신을 의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의로운 도적은 아니었다.
그들은 괴이한 도적이었다.
괴도단.
세상을 훔치는 도적.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요.”
여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괴도단의 두 사람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하려는 건가요?”
여왕이 반문하자 괴도단의 두 사람도 멈칫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사실 저희가 사람을 훔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납치겠죠.”
여왕이 정정했다.
“아니, 훔친 거라고요.”
“사람을 훔치면 납치라고 합니다.”
여왕은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녀의 논리는 완벽해서 천하의 괴도단조차 말싸움에서 쩔쩔매게 되었었다.
“아, 저희들은 납치라고는 생각을 안 했는데요.”
“그럼 당신들은 이번에 실수를 한 거예요. 모든 것을 훔친다고 했는데 납치와 인질은 완전히 다른 영역 아닌가요?”
“…….”
괴도단은 할 말을 잃었다.
여왕은 특유의 위엄이 담긴 어투로 도적들을 압도했다.
“물론 버킹엄 궁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부분에서는 제가 맞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납치는 납치일 뿐입니다.”
“아, 그건…….”
“저를 데려갔다고 알려지면 당신들이 그동안 보여준 괴도로서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질 거예요.”
여유를 부리던 괴도단의 두 사람은 사색이 되어 서로를 바라봤다.
이건 그들이 원한 바가 아니었다.
여왕의 납치는 도적질을 넘은 중죄였다.
“하아…….”
괴도단의 알파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꼬였다는 인상이 확실했다.
“여왕님 말이 맞습니다. 저희가 경찰을 데리고 놀려다가 제 꾀에 빠진 거 같네요.”
“으음. 실수한 거 같네요.”
베타도 동의했다.
의외로 그들은 순순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다.
여왕의 당돌한 언변은 세계 제일이라는 괴도단을 압도하고 있었다.
“역시 여왕님답습니다. 저희도 어차피 곧 물러날 예정이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행히 그들은 여왕의 신변을 노리지 않았다.
괴도단은 도적일 뿐이지 납치범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밤이 깊어가는 그 즈음.
서로 어색한 시간이 흘러갔다.
파아아!
그 즈음.
버킹엄 궁전에서 여왕이 있는 하우스까지 날아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람의 날개를 머금고 재빠르게 날아가는 탐정이었다.
유진하였다.
별안간 창문을 깨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늦지 않았네요.”
방에 도착한 유진하는 방 안에 있는 모두와 마주했다.
괴도단을 압도하는 위엄을 보이던 여왕이 가장 먼저 보였다.
새하얀 얼굴 속의 푸른 눈동자.
아름다운 여왕은 차분한 눈매와 흔들리지 않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잘 있으셨구나.’
여왕이 무사한 모습을 보자 유진하는 안심했다.
다행히 늦지는 않은 듯했다.
이제는 이 모든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과 마주해야 했다.
“당신들이 괴도단인가요?”
창문에서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유진하는 옷에 묻은 유리 파편을 툭툭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턱시도에 망토를 입은 남자와 여자가 눈을 가린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괴도단이었다.
“버킹엄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훔친다더니 여왕님이었나요?”
“아, 그랬죠.”
괴도단은 여왕과는 다르게 유진하에게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유진하는 저 말투가 신경 쓰였으나 대화를 계속했다.
“당신들은 경관들로 몰래 위장해서 여왕님을 데려갔겠네요. 그런데 이거 반칙 아닌가요?”
“반칙?”
“그래요. 사람을 데려가는 건 훔치는 게 아니라 납치잖아요.”
“…….”
여왕이 지적했던 논리와 같은 얘기였다.
도둑질이 아니라 납치.
괴도단은 할 말이 없어지자 서로를 바라보며 버벅거렸다.
“뭐, 훔칠 수도 있습니다만…….”
“사람을요?”
“여왕님의 마음을 훔쳤을 수도…….”
괴도 알파가 엉뚱한 말을 하자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여왕은 싸늘해진 표정으로 바로 정색했다.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괴도 알파는 바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매너를 생명으로 여기는 도적들이었다.
“우리 실수를 인정하죠.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앞으로는 그럴 필요 없거든요.”
유진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양손을 펼쳤다.
동시에 100장의 카드가 촤라락 모여들었다.
“괴도단은 오늘 잡힐 거니까요.”
호기로운 선언이었다.
전 세계의 모든 것을 훔칠 수 있다는 괴도단을 상대로 유진하가 도전장을 던졌다.
괴도단의 알파는 순간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여왕님 앞에서 무자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는 관심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냉랭한 여왕님의 싸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느껴졌다.
마술사 유진하의 카드술에 맞서 괴도단의 알파는 새로운 물건을 꺼냈다.
검은 상자였다.
“오랜만에 꺼내는군요.”
상자는 기이한 톱니바퀴가 연결되어 돌아갔다.
‘기하학 큐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