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사건 의뢰
서울에서 패러사이트와의 격전이 마무리된 지 한 달.
많은 이들의 활약 덕분에 패러사이트 기생충은 완전히 소멸됐다.
“서울에서 일어난 사건은 신종 마약을 사용한 테러 조직의 짓으로 알려졌습니다.”
정부 발표는 사건의 은폐를 목적으로 삼았다.
사건의 배후도 조작했다.
“이번 테러는 범죄 조직 알카트로스의 짓으로 알려졌으며, 정부는 이들의 행방을 뒤쫓고 있습니다.”
사실 알카트로스는 유진하의 소탕전에 당해서 리더가 체포됐고 조직 자체가 궤멸됐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조직이었나 공식적으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제는 사라진 그들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다른 세계의 생명체가 나타났다고 발표할 수는 없으니까.”
마스터는 빌딩 옥상에서 서울을 바라봤다.
대낮부터 도시 곳곳에는 무너진 건물을 복구시키는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미 없어진 조직한테 죄를 떠넘기는 것도 참 재밌네.”
마스터의 곁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유진하였다.
“마스터의 아이디어죠?”
“아니, 그런 건 내 관심사가 아니라서 말이야. 정부 요원들이 처리한 거지.”
유진하는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마스터도 나란히 서서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거짓으로라도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야 할 때도 있더라.”
푸른 머릿결에 항상 생글생글 웃던 마스터는 자신감이 넘쳤다.
귀여운 외모 속에서 냉철함을 겸비한 그녀였다.
“어때? 내 제안은 생각해 봤어?”
마스터와 유진하는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어색했으나, 몇 번의 사투를 같이 겪다가 어느새 편해진 사이가 되었다.
“여기 사인만 하면 돼.”
마스터는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계약서였다.
“흐음.”
유진하는 계약서를 받아서 대충 훑어보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고민하는 척하지 말지?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잘 알잖아.”
“지금이 어떤데요?”
“호오, 계속 모른 척하겠다?”
마스터는 뾰로통해져서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이내 크게 소리쳤다.
“사람이 부족하다고!!”
마스터의 함성이 크게 퍼졌다.
연약하고 귀여운 외모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함성이었다.
평소의 생글거리는 미소와 달리 일에서는 단호한 면이 있었다.
“내 옆에 이제 사람이 없어.”
“요원들은요?”
“많이 줄었어. 간부들만 해도 이제 거의 안 남았다고.”
요원은 코드명으로 분류했다.
“A는 알카트로스 조직의 리더잖아. 날 배신해서 B도 죽였고.”
유진하가 치열한 격전 끝에 에이스를 잡았다.
현재 그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C와 D는 패러사이트의 숙주가 되었다가 지금은 병원에서 회복하는 중이야.”
마스터는 속사포처럼 말을 연이어 토해냈다.
“E는 알카트로스의 조커였고.”
최고 핵심이라는 간부 자리가 무려 5명이나 비었다.
남은 간부급 정예 요원이라고는 F와 G가 거의 유일했다.
“이래서는 뭘 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유진하가 도와줘야 해.”
마스터는 간청하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저렇게 애걸하는 사슴 같은 눈망울이라니.
유진하는 저 부탁의 눈빛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내가 생각한 방어전 구성에 너희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서울에서 벌어진 일이 또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꼭 도와줘야 해.”
“아니, 우리 말고도 프리랜서는 더 있잖아요. 실력 있는 사람들도 많을 테고요.”
“그 사람들은 신뢰할 수 없어. 제멋대로인 사람을 어떻게 쓰겠니? 너라면 모르는 사람을 중요한 동료로 삼겠어?”
마스터의 지적은 예리했다.
유진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알카트로스 소탕전과 패러사이트 소멸전을 벌이는 동안 요원들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전력 소모가 심했다.
“알았어요. 도와줄게요.”
“그래. 정말 고마워.”
마스터는 이내 환한 얼굴이 되어 밝게 웃었다.
마치 어린 소녀처럼 어깨춤까지 들썩이는 마스터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부끄러워진 사람은 이쪽이었다.
저렇게 좋을까.
‘마스터의 나이는 적어도 수십억 년은 될 텐데.’
마스터는 공간의 주인으로서 이 세계를 탄생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녀의 안전은 세상의 안위와 직결됐다.
고향 같은 지구.
이곳에 사는 한, 유진하는 이 활달한 마스터와 엮일 운명이었다.
“바로 부탁할게. 사건 의뢰야.”
“사건?”
마스터는 탁자에 내려둔 서류를 냉큼 넘겨주었다.
서류에는 사건 파일이 담겨 있었다.
내용 중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마스터가 손가락으로 꼬치꼬치 짚어가며 포인트를 알려줬다.
“요원들은 공략전과 방어전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고. 세상에는 미해결 사건들도 많아.”
“그렇다고는 들었어요.”
“잘 알고 있구나. 그럼 부탁할게.”
마스터는 불어오는 바람에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슬쩍 몸을 돌렸다.
손에는 카드 한 장을 쥐었다.
“잘 부탁해, 빛의 마술사.”
“네?”
마스터는 유진하에게 새로운 별칭을 붙여주더니 순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빛의 마술사라고?”
유진하는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태양의 문양을 내려다봤다.
빛의 카드를 ‘내재화’한 후로 문장이 계속 남아 있었다.
에어리스처럼 유진하도 문장이 남았다.
“…마스터는 알고 있었구나.”
마스터는 최초의 패러사이트와 벌어진 결전의 과정과 결과를 알고 있었다.
빛의 마술사.
유진하는 새로운 별칭을 받았다.
이윽고 넘겨받은 파일에는 사건 내용과 더불어 M이 작성한 전력 측정 보고서도 있었다.
“어? 우리 능력이 있네?”
사실 M이 능력 분석을 수첩에 적어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고서 자체를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왠지 떨리는 마음이 되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가장 먼저 이소민의 능력치가 보였다.
- 이소민 능력치 (장비 착용시)
지력: B
전투력: B → SS
민첩: C → S
정신력: SS → U
체력: B → C
평소에는 정신력 말고는 특별히 좋은 부분이 없으나, 특이하게도 장비를 착용하면 전반적으로 능력치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사실 그렇지. 이소민 누나는 장비가 없으면 별로니까.”
이소민은 장비빨이었다.
정작 본인도 장비를 그렇게 챙기고 다녔고 스스로 인정하는 바였다.
이번 패러사이트 소멸전을 통해서 정신력은 한 단계 더 올라갔다.
“대단하긴 했어. 혼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물어뜯는 걸 받아냈지.”
아무리 물리 대미지 면역 장비를 입었다고 해도, 수천의 사람들에게 물어뜯기면서 버티는 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신력만큼은 탁월한 단계였다.
“워낙 멘탈이 튼튼해서 미끼 역할과 유인에 최적화야.”
다음은 에어리스였다.
패러사이트의 숙주가 된 D와의 대결에서 크게 고전하다가 마지막에 결국 이긴 전적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능력치가 향상하기보다는 전투 실력을 더 확고하게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 에어리스 능력치
지력: C
전투력: U
민첩: S
정신력: S → SSS
체력: SS
전투력은 U등급을 유지했다.
대신 정신력이 대폭 상승했다.
큰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는 의지를 인정받았다.
“마지막은 나인가?”
유진하는 페이지를 넘겨 자신의 능력치를 직접 살펴봤다.
“아하.”
꽤 흥미로운 분석이 있었다.
- 유진하 능력치
지력: U
전투력: SSS 이상 (더 분석 요망)
민첩: A → S
정신력: S → SS
체력: C
“내가 이렇다는 거지?”
지력은 U.
괜찮게 평가받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작전 계획이나 구상에서는 유진하 본인도 자신하던 터였다.
“민첩이 S로 올랐네?”
바람 카드 사용법을 배운 덕에 민첩이 상승했다.
정신력도 한 단계 올라갔다.
가장 재밌는 부분은 전투력이었다.
“내가 SSS등급이나 된다고?”
전투력에서 SSS등급이면 에어리스의 U등급과 비교해서 딱 한 단계 아래였다.
스스로 느끼기에 꽤 고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최초의 패러사이트를 상대해서 그런 걸까?”
숙주 C에게 기생한 최초의 패러사이트는 압도적인 기세를 가진 괴물이었다.
그 전투에서는 살아남은 일조차 기적이었다.
“흐음.”
손등에서 태양의 문양이 희미한 빛을 발산했다.
여전히 문장은 남아 있었다.
빛의 카드가 여전히 자신의 육체와 심장에 내재화되었다는 뜻이었다.
“에어리스의 문양처럼…….”
항상 궁금했던 문양의 정체였다.
가까스로 단서 하나를 잡아냈다.
“조금씩 알아내고 있어.”
유진하는 주먹을 꾹 쥐었다.
태양의 문양에서 나오는 빛이 더 따스하게 느껴지자 서류를 잠시 덮어두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따사로운 햇살 속에선 광활한 빛이 쏟아졌다.
“세상이 점점 다르게 보여.”
유진하는 새로운 느낌을 한껏 받았다.
혼자서 던전을 헤매던 초기와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많은 동료를 알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성장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지켜야 할 것이 어느새 많아졌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든 해보자.”
마스터에게 받은 의뢰는 하나가 아니었다.
알카트로스 이외에도 세상에는 유명한 범죄 단체가 있었다.
3대 조직이라 불리는 ‘괴도단’과 ‘아사신’이 존재했다.
“알카트로스처럼 부담이 되는 조직들이네.”
전 세계에는 알카트로스의 등장 이후로 난제에 가까운 사건들이 많이 등장했다.
기존의 상식을 넘어서는 범죄들이라 경찰이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였다.
마스터와 요원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건을 처리했다.
요청을 받은 유진하도 범죄 사건을 처리하는 새 업무를 시작했다.
“어? 뭐가 또 있네?”
서류 봉투 안에는 배지도 담겼다.
마치 경찰 배지처럼 은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물건이었다.
“국가 공인 탐정?”
아하.
유진하는 금세 깨달았다.
마스터는 단단히 준비해서 유진하에게 일을 맡긴 거였다.
“저번에 내 닉네임을 탐정으로 지었던 이유가 있었구나.”
귀여운 외모였으나 마스터는 속에 능구렁이를 감춰두고 있었다.
나름의 시스템으로 세상의 체계를 갖추었다.
마스터가 관여하는 기관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하하.”
배지를 손에 든 유진하는 마음에 들었는지 유쾌하게 웃었다.
명칭은 나날이 늘어났다.
정부 요원의 협력자.
마스터의 지원자.
빛의 마술사.
이제는 국가 공인 탐정이었다.
“사건 순서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일단 여기부터 가볼까?”
전 세계를 아울러 의뢰가 산적했고, 관심이 가는 사건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자, 하나씩 처리해 볼까.”
유진하는 서류를 든 채로 천천히 옥상을 내려왔다.
근처에는 백화점이 있었다.
에어리스와 이소민이 상황을 모른 채로 쇼핑을 하면서 모처럼의 휴가를 보냈다.
“진하, 여기예요.”
세일이라 백화점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마치 밀물처럼 몰려든 사람들 탓에 유진하는 에어리스 쪽으로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아,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진하에게 딱 맞는 옷을 봐두었는데.”
에어리스는 양손에 가득 옷을 들었으나 사람들 틈에 끼어서 머뭇거렸다.
당황한 얼굴로 발만 동동거리며 인파 속에 파묻혀 이리저리 휩쓸렸다.
“휴우, 사람들이 너무 많네.”
쇼핑백을 잔뜩 든 이소민 역시 사람들에 파묻혔다.
어디도 못 가는 신세였다.
“하하.”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유진하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쇼핑은 대책이 없었다.
결국 세 사람은 몇 분을 더 헤맨 끝에 간신히 휴게실에서 만났다.
“진하, 마스터는 잘 만났어요?”
“대단한 얘기는 없었어. 그냥 휴가가 끝났다는 거?”
에어리스와 이소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서로 말없이 바라봤다.
휴가가 끝났다니.
패러사이트 소멸전에서 겨우 한 달만 지난 즈음이었다.
“사건이야.”
새로운 사건을 의뢰받았다.
뛰어난 두뇌와 날카로운 추리력을 요구하는 탐정을 맡았다.
첫 번째 사건은 영국에서 벌어진 기묘한 행방불명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