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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84화 (84/229)

84화 각인된 문장

최초의 패러사이트와의 승부에서 이긴 유진하는 바닥에 쓰러졌다.

땅바닥에 짓눌린 패러사이트는 부서진 흔적만이 남았다.

“…….”

패러사이트와의 승부에서 이겼으나 유진하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대가를 받아야 했다.

심장에 내재화한 빛의 카드는 육체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했다.

최초의 패러사이트를 이기려는 결단이었는데,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었다.

그리고…….

유진하는 모든 힘을 잃고 바닥에 누워서 서서히 죽어갔다.

* * *

기생의 나무에는 유충의 알이 매달려 있었다.

생명의 개화를 앞둔 시점이었고, 인간과 패러사이트의 대결은 부화의 순간에서 승패가 달려 있었다.

수천수만이 넘는 유충이 일제히 깨어나서 인간에게 기생하면 그들이 이기는 게임이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파르르르.

유충이 알에서 부화하기 시작했다.

작은 날개를 단 유충이 일제히 쏟아졌다.

마치 메뚜기 떼가 나오는 듯했다.

벌레의 물결이 하늘을 뒤덮으며 흐르고 있었다.

“아, 조금 늦었나?”

그때, 높은 빌딩에는 한 사람이 도착했다.

푸른 머리의 귀여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동안 외모를 가진 ‘마스터’였다.

“이 기생충 벌레 녀석들.”

마스터는 이 공간의 주인이었다.

기생충 벌레들이 자신이 만든 세계에 침입해서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있었으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에휴, 이걸 가져오느라 늦었네.”

마스터는 특별한 물건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작은 컵인데 낡은 목재로 만들어진 형태였다.

“주인의 전리품…….”

마침내 고이 숨겨놨던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물품을 꺼냈다.

마스터만이 알고 있는 비밀 장소에 숨겨놓은 ‘주인의 전리품’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적에 사용하려고 아껴뒀다.

“사람들은 이걸 성배라고 부르던데…….”

성배라는 별칭은 부끄러웠으나 마스터도 썩 맘에 드는 표현이었다.

성배를 찾는 기사단의 이야기도 있었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숭배하는 심리도 흥미로웠다.

“이제 막아보자.”

마스터는 양손에 성배를 들고 힘을 부여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컵에 서서히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차오른 물결이 넘실거리듯이 가득 찼고, 나무였던 성배는 금빛으로 바뀌었다.

“다 모았다.”

마스터는 금빛이 된 잔을 높이 들었다.

성배에 모인 물은 성수가 되었다.

“가자.”

잔에 담긴 물은 끝없이 솟구치며 마치 파도처럼 몰아쳤다.

성배의 물결은 하늘을 뒤덮어오는 유충들에게 나아갔다.

파아아!

엄청난 물결이 유충들을 모조리 휩쓸었다.

“한 마리도 남기지 마라.”

마스터는 크게 소리쳤다.

도시를 뒤덮은 거대한 물결이었다.

성배의 물은 갓 태어난 유충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됐다.”

휩쓸린 유충들은 작은 날개가 떨어지고 몸체마저 짓이겨지며 사라졌다.

수천수만 마리가 넘었던 기생충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성배의 힘이었다.

-성배.

정화의 물길을 발휘한다.

사용자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를 제압할 수 있다.

저주의 힘도 풀어낼 수 있다.

부화한 유충을 전부 제거한 성수의 물결은 공중에서 휘몰아쳤다.

“그럼 나머지도 잡아볼까?”

마스터는 지휘자처럼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성수의 흐름을 제어하는 손짓과 표현이었다.

허공에서 한 번 손가락을 빙글 돌리자, 수신호를 받은 성수는 폭풍우처럼 치솟아 오르더니 이내 폭발이 터지듯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아아!

흩뿌려지는 물방울은 도시에 남은 유충들에게 뿌려졌다.

성수의 물방울이 기생의 나무에 닿자 조금씩 내부로 침투해 갔다.

울창했던 거대 나무들이 하나둘 성수에 의해 메말라가더니 죽어갔다.

“크으으으윽!”

숙주가 된 사람들을 홀로 받아내던 이소민은 완전히 엎어진 상태였다.

사람들이 마구 물어뜯었으나 물리 대미지 면역 방어구를 입은 덕분에 혼자서 버텨내고 있었다.

다만, 기분은 확실히 나빴다.

“온몸을 너무 물어뜯네.”

사람에게 물어뜯기는 느낌은 역시나 불쾌했다.

그렇게 수십 분을 물어뜯기며 버티던 즈음에 하늘에서 수많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물방울?”

처음에는 근처에서 소화전이 터진 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금빛이네?”

이 물방울은 금으로 도금된 듯이 반짝였다.

쏟아지는 물은 햇살까지 받아 찬란함을 머금었다.

이성을 잃었던 사람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기적의 물방울 같았다.

우아한 소나기였다.

“어?”

물어뜯던 사람들이 전부 기절해 버렸고 이소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금빛의 비인가?”

고개를 드니 촉촉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을 한껏 얼굴에 받았다.

금빛의 물방울.

찬란한 비가 아름다웠다.

“…끝났구나.”

폭발과 화염, 고함 속에 번잡했던 도시는 이내 조용해졌다.

하늘에서 금빛의 빗방울이 쏟아지면서 기생의 나무조차 시들었고, 세상은 부드러워졌다.

추적추적.

고요해진 도시 속에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유진하는 혼자 쓰러져 있었다.

에어리스가 막 그 옆으로 다가왔다.

“진하…….”

이름을 불러도 유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은 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하…….”

에어리스는 무릎을 꿇고 유진하를 살펴봤다.

처음 그와 만났던 때가 기억났다.

전리품 상자에 갇혀 있던 에어리스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비좁고 갑갑한 궤짝은 끝없는 어둠과 고요한 침묵과도 같았다.

이곳에 영원히 갇힐 수도 있었다.

끼이익.

궤짝이 열리던 순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유진하였다.

서로 당황한 눈빛이 오가고 어색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정말 처음에는 그랬는데…….”

에어리스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옅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묵묵해졌다.

이제는 유진하가 영원한 침묵 속에 빠져들었기에.

깨어나지 않는 잠에 깊이 잠들었기에.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에어리스의 눈가에서도 같은 빛의 물이 내려왔다.

“진하, 제발…….”

금빛으로 빛나는 물방울과 에어리스의 눈물이 유진하에게로 오롯이 떨어졌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그 사람에게.

에어리스는 유진하를 안으며 오열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에어리스와 유진하는 그렇게 자리에 남았다.

두 사람 중에서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

에어리스는 흐르는 눈물 속에서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품에 안은 유진하를 바라보며 깊은 어둠 속에 자리했다.

문득 하나의 희미한 빛을 발견한 때가 그 즈음이었다.

“어?”

유진하의 손등에는 문장이 있었다.

태양이 그려진 문양이었는데 붉은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진하에게 문장이 생겼어요?”

에어리스는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문장을 바라봤다.

검과 방패가 그려진 문장이 있어서 태양의 문장과 비슷했다.

“어쩌면…….”

그 순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지나갔다.

에어리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등을 내밀어서 유진하의 손등에 포개었다.

문장이 새겨진 손등이 서로 맞닿았다.

“제발…….”

마지막 시도였다.

아름아름 내려오는 빗방울도 작아지고 있었다.

에어리스는 유진하의 손등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미약한 박동이 조금씩 느껴졌다.

마치 작은 심장이 뛰는 듯한 느낌이었다.

“…느껴져요.”

문양과 문양을 맞추니 마치 작은 실이 연결된 듯했다.

조금씩 뛰는 심장 박동.

고동이 전해졌다.

“아직 살아 있어요.”

미약하면서도 작은 숨이 느껴졌다.

유진하는 살아 있었다.

“진하, 기다려요.”

에어리스는 온몸의 기운을 모아서 손등의 문양에 집중했다.

검과 방패가 교차된 문장이 서서히 오오라를 모아갔다.

여기서 모인 기운은 서서히 유진하의 손등에 있는 태양의 문양으로 옮겨갔다.

“제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손등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기운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일어나요.”

에어리스는 두 손을 모아 빌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빛의 물방울 속에서 고요하게 기다렸다.

두근.

처음으로 강한 박동이 전해졌다.

차갑던 그의 손등에서 조금씩 생기가 돌아옴을 느꼈다.

“진하…….”

손등에서 손등으로.

문장에서 문장으로.

에너지가 전해지면서 유진하는 서서히 기운을 되찾아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성수의 물방울도 힘이 되었다.

“에어리스…….”

세상은 하나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한 사람의 힘으로 안 되면 도와주는 사람이 다가온다.

또 다른 사람이 연이어 손을 잡아주면서 계속 이어진다.

많은 이들의 힘이었다.

“에어리스…….”

다시 들리는 그의 목소리.

불러주는 이름.

유진하는 마침내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

처음에는 얼굴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느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성수의 물만이 아니었다.

에어리스의 눈에서 내려오는 눈물도 느껴졌다.

둘 다 따스했다.

“반가워…….”

에어리스의 품에서 눈을 뜬 유진하는 처음으로 인사했다.

“저도요.”

에어리스는 활짝 웃음을 지었다.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였다.

평온해진 도시에서 두 사람은 평화로운 빗방울 속에 자리를 잡았다.

긴 시간.

오래도록 기억될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 * *

쿵쿵.

패러사이트가 사라진 도시는 빠르게 복구를 시작했고, 곳곳에서 공사장이 바쁘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다행이에요.”

에어리스는 모처럼 평범한 외출을 나와서 기분이 경쾌했다.

총총거리며 걸어가는 발걸음이 경쾌한 리듬을 보였다.

“하암. 천천히 가자니까.”

옆에는 이소민이 하품을 하면서 에어리스의 뒤를 따라왔다.

원피스를 챙겨 입은 에어리스와 달리 츄리닝에 분홍 레깅스를 입었다.

“진하가 기다릴 거예요.”

지금은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유진하는 기력을 아직 회복하지 못해서 병실에 입원했다.

조금씩 힘을 되찾아가며 하루하루 빠르게 나아지고 있었다.

오늘은 마침내 퇴원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이제 진하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잖아요.”

에어리스는 경쾌하게 서둘렀다.

일찍 간다고 유진하가 빨리 퇴원하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왠지 서둘러 가고 싶었다.

에어리스와 달리 이소민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터덜거렸다.

“유진하, 참 대단하지.”

요원들이 많았지만 결국 최대의 공로자는 유진하였다.

최초의 패러사이트를 제압하면서 모두가 살아남을 가능성을 열었다.

자기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로 해냈다.

“정말 녀석이 없다면 끔찍했을 거야…….”

이소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략전에서 초보로 참여했던 날.

처음 만난 유진하는 이소민에게 살아남는 조언을 아낌없이 알려줬다.

“자신이 없으면 긴 머리로 오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었어.”

이소민은 그날 이후로 줄곧 단발을 유지했다.

유진하의 조언을 명심했다.

어쩌면 유진하가 이소민을 끝까지 믿을 만한 동료로 받아들였던 데에는 그의 말을 신뢰하고 믿어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에어리스도 그렇게 기억했다.

“진하는 항상 생존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그건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걸 거예요.”

살아 있어야 동료를 지킬 수 있다.

그것이 유진하가 지키려 했던 핵심 가치였다.

“우리에게는 살아남으라고 해놓고는 정작 자기는 희생하려고 했지.”

이소민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시는 녀석을 볼 수 없을 뻔했다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다시는 이런 짓을 못 하게 해야지. 유진하, 이 녀석 말이야.”

“저도 노력할게요.”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이었다.

오늘따라 햇살이 너무나 환하게 보였고 세 사람은 다시 하나의 팀이 되기를 기약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새로운 꿈. 새로운 길.

모두가 새 출발을 마음먹을 즈음.

낯선 존재가 유진하를 찾아왔다.

뛰어난 두뇌와 날카로운 추리력을 요구하는 일을 제안받았다.

발신지는 영국.

새로운 사건 의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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