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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81화 (81/229)

81화 섬멸전(4)

기생의 나무 한 그루가 개화했다.

도시는 패러사이트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건…….”

서둘러 달려가던 유진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패러사이트 유충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을 타고 퍼지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녀석들이 늘어나고 있어.”

쏟아지는 씨앗들은 마치 절망의 하모니 같았다.

패러사이트는 강한 숙주에 기생하기를 원했다.

인간이라면 충분히 있었다.

“저게 퍼지기 시작하면…….”

재앙과도 같았다.

사람들이 지배당해 숙주가 될수록 최악의 상황이 된다.

숙주가 늘어나고 번식이 증가한다.

도시는 기생충의 둥지로 전락해 버린다.

“모든 나무가 개화한 것은 아니야. 아직 방법은 있어.”

기생충이 더 번식하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서울 전역이 범위였다.

“허억. 허억.”

달려가던 이소민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체력 훈련을 해서 나름대로 자신 있었는데도 중량이 늘어난 장비 탓에 숨이 벅찼다.

착용한 방어구의 무게 때문이었다.

“유진하, 잠깐만 천천히 가자.”

20㎏에 육박하는 갑주.

물리 대미지 면역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이 있으나 무거운 무게가 단점이었다.

쌀 한 가마니를 업은 수준이라 이소민의 체력으로는 오래 뛸 수 없었다.

“이소민 누나, 서둘러야 해요.”

“나도 잘 아는데 진짜로 숨이 차서 힘들어서 그래.”

그나마 쾌속의 사바톤 부츠를 신고 있어서 속도는 뛰어났다.

이소민은 발이 빠른 중무장 기사와 같았다.

“저기!”

이소민이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도로에는 무수히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정신을 잃은 듯이 비틀거리면서 맹목적으로 움직였다.

“기생충에게 지배당한 거예요.”

유진하는 금세 상황을 눈치챘다.

방금 퍼진 유충들이 사람들에게 기생했다.

“우으으.”

언뜻 보면 사람들은 마치 좀비처럼 걷고 있었다.

느릿느릿.

모두가 구부정하며 비틀거리면서 다리를 질질 끌었다.

“진하야, 왜 저러는 거야?”

“처음이라서 그럴 거예요.”

“처음?”

“기생충의 유충이 퍼진 거잖아요. 유충들은 처음으로 생명체에게 기생해서 익숙하지가 않을 거예요.”

예측은 정확했다.

유충은 갓 태어난 터라 숙주를 지배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금방 나아질 거예요. 며칠만 지나면 완벽하게 숙주를 지배하겠죠.”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좀비처럼 다가오는 인간들은 통제력은 잃었으나 완벽하게 통제되지는 않았다.

“유진하, 골목에서도 사람들이 나오는데?”

도로에 이어 골목 곳곳에서도 숙주가 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이 사방에서 비틀거리며 다가왔고 유진하와 이소민은 어느새 포위당했다.

“아, 이거 최악이네.”

위기에 몰렸음에도 이소민은 의외로 태평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진하야, 내가 유인할게.”

“이소민 누나?”

유진하는 고개를 돌려 이소민을 바라봤다.

이소민은 자신이 있는지 퉁퉁 자신의 갑옷을 두드렸다.

“원래 내가 유인은 잘하잖아.”

“누나는 인질을 잘했죠.”

“야 이, 그렇게 말하지 마.”

확 삐친 이소민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유진하에게 한 마디 쏘아붙이려다가 지금은 워낙에 긴급한 상황이라 다음으로 미뤘다.

따끔하게 혼내는 건 나중이었다.

“나한테 물리 대미지 면역 방어구가 있잖아. 상처를 안 입어. 부츠까지 있어서 잘 잡히지도 않을 테고.”

“잘할 수 있겠어요?”

“네가 그랬잖아. 나는 유인을 잘한다며?”

윙크를 찡긋 보인 이소민이 먼저 앞서갔다.

절그럭. 절그럭.

철제 부츠의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뭐 하냐? 어서 빠져나가.”

이소민은 크게 소리치면서 좀비처럼 움직이는 숙주들에게 달려들었다.

쾌속의 사바톤 부츠는 속력이 강점이었다.

심지어 벽을 타고 달릴 수도 있었다.

“자아, 여기를 봐.”

이소민은 경쾌하게 외치고 건물 벽을 타고 달려가면서 숙주가 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마치 자석처럼 이끌리듯이 그들의 눈빛이 모조리 이소민에게 향했다.

“역시 이소민 누나의 유인은 최고라니까.”

이쯤이면 전문가 수준 인정이었다.

유인은 최고.

탁월한 재능임은 확실했다.

“가볼까.”

사람들의 포위가 흩어진 틈을 타서 유진하는 바람의 카드를 사용했다.

J의 전매특허인 바람 이동술.

그녀처럼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가속력으로 이동하는 연습은 충분히 해두었다.

후욱.

카드에서 나온 바람이 발에 머물렀다.

폭발력을 응축하듯이.

바람결은 점점 퍼지더니 마치 등 뒤의 날개처럼 되었다.

유진하는 고유의 기술로 발전시켜 만들었다.

“전속.”

바람의 날개를 달아버린 유진하가 나아갔다.

투명한 바람의 깃털이 날리듯이 빠르게 하늘로 치솟았다.

“유진하!”

쾌속의 부츠로 달려가면서 사람들을 유인하던 이소민은 유진하가 엄청난 바람과 함께 나아가는 광경을 바라봤다.

“빨리 가! 나중에 보자!”

쏜살같이 나아가는 저 뒷모습.

던전에서 처음 유진하와 만났을 때가 새삼 떠올랐다.

“머리카락부터 잘라요. 괜히 싸움 중에 잡히면 위험해지니까요.”

유진하의 첫 번째 조언이었다.

이소민은 저 말을 듣자마자 냉큼 칼로 긴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후로는 줄곧 단발 스타일을 유지했다.

“처음에는 머리만 잘 쓰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달라졌다.

유진하는 에어리스를 만나면서 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렇게 피하던 일대일 대결조차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맡았다.

명실상부한 리더로 성장했다.

“가라, 이 녀석아.”

이소민은 손가락으로 살짝 콧잔등을 만지면서 웃었다.

뒤에서 믿었다.

언제나 유진하를…….

“아!”

이소민은 건물의 벽을 타고 달리다가 튀어나온 파편에 발목이 걸렸다.

“우아아아!”

달려가던 가속도를 못 이기고 그대로 몸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땅바닥까지 곤두박질치며 완전히 추락했다.

쿠웅!

“아차!”

물리 대미지 면역 방어구 덕분에 아프지는 않았다.

몇십 미터 높은 곳에서 추락해도 대미지는 전혀 입지 않았다.

“하나도 안 아프네. 정말 이 갑주는 사기야.”

방어구의 위력에 새삼 감탄하던 즈음이었다.

그때, 한껏 이목을 끌었던 숙주가 된 사람들이 모조리 덤벼들었다.

이소민은 당당한 눈빛을 머금은 채로 달려드는 그들을 절대 피하지 않았다.

“정신 차려요!”

사람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패러사이트는 정신과 육체를 지배한다.

달려드는 사람들의 이성을 잃은 표정을 보면서 이소민은 왠지 뭉클해지는 감정이 들었다.

“구해내고 싶어…….”

이소민의 표정이 일그러지듯이 비틀어지다가 이내 결의에 찬 눈망울로 변했다.

“반드시 구해내고 싶어!”

홍수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의 흐름을 이소민은 혼자서 온몸으로 모조리 받아냈다.

지금 이대로.

마치 피라냐에게 물어뜯기는 듯한 상황에서도 이소민은 자신의 역할을 완전히 이해했다.

모두를 유인한다.

그리고 버틴다.

‘이게 사람들을 구할 방법이야.’

숙주가 된 사람들이 다른 생존자를 공격하지 못하게 막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유진하는 직접 말하지 않았으나 이소민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성장했기 때문일까.’

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안다.

그만큼 강해졌다는 소리였다.

두려운 인파들의 흐름 속에서 이소민은 혼자서 방향을 바꾸려고 최선을 다했다.

초보자였던 예전에 비해서 지금은 한 명의 원숙한 실력자가 되었다.

“유진하! 너한테 맡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다음은 뒤를 부탁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사람들의 습격 속에서 이소민은 크게 소리쳤다.

그 외침은 곧 잦아들었다.

이제 한 명에게 모든 짐이 맡겨졌다.

유진하…….

가장 큰 과제를 짊어지고 유진하는 나아가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기생의 나무로.

나무 기둥의 정상에는 패러사이트 C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바람의 날개’를 타고 날아 올라간 유진하는 하나의 목표에 집중했다.

귓가에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도착한 곳은 기생의 나무 정상 부근이었다.

“당신은…….”

그곳에는 패러사이트 C가 금발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그가 쥔 흑도에서 영롱한 빛이 감돌았다.

“…패러사이트.”

공중으로 날아오른 유진하는 옆에 뻗은 나무의 가지에 착지했다.

건너편에서 패러사이트 C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이 먼 곳만 바라봤다.

“…….”

살짝 고개를 돌려서 유진하를 차분하게 바라봤다.

무미건조한 눈동자.

감정이 담기지 않은 표정.

인간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자세였다.

“패러사이트…….”

유진하는 그를 기생체라 불렀다.

숙주에게 기생하는 존재였고, 숙주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최초의 패러사이트는 다른 녀석들과 느낌이 달랐다.

녀석이 첫 마디를 꺼냈다.

“…인간이냐?”

패러사이트는 마치 초월적이고 우월한 존재처럼 말을 내뱉었다.

녀석은 지배하는 숙주의 기억마저 읽을 수 있다.

덕분에 인간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역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 기생체?”

“숙주에게 기생하는 존재를 의미한다면 맞다.”

“너는 왜…….”

“왜 이곳에 왔냐고?”

패러사이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다가 냉소적인 웃음을 드러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 어차피 나는 공간을 유랑하는 존재니까.”

“유랑한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거야. 내가 살던 곳처럼 다른 공간을 바꿀 뿐이지.”

유진하는 말문이 막혔다.

패러사이트에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여행’이었다.

공간과 공간 너머.

녀석은 방랑자처럼 돌아다녔고 ‘우연히’ 우리 공간에 왔다고 순순히 얘기했다.

“그게 전부냐? 이곳의 사람들을 전부 기생시키겠다는 이유가……?”

“너희도 알 텐데. 생명체의 법칙에 대해서 말이다…….”

환경에 잘 적응하는 존재가 살아남는다.

진화론이었다.

녀석은 지금 진화된 존재와 약육강식의 원리를 얘기하고 있었다.

“약자가 사라지든 말든 세상은 관심이 없어. 기록조차 남지 않지.”

“이 녀석…….”

패러사이트는 멋대로 인간을 약자로 규정했다.

기생하든 없애버리든.

녀석은 자신이 강자이므로 이곳의 생명체를 좌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패러사이트의 눈빛은 차가웠다.

반대로 유진하는 마치 온몸에서 뜨겁게 치솟는 감정을 받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인간에 대해서 전부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거냐?”

“대략은…….”

패러사이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너희 인간들의 기억을 읽었어. 덕분에 인간이란 존재가 그간 살아온 역사와 문명을 전부 보았지.”

“그래서……?”

“형편없었다.”

패러사이트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왔다.

녀석은 인간의 문명이 하찮은 값어치라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1,000곳이 넘는 공간을 지나왔다. 그곳에 번식하고 공간 자체에 기생해서 집어삼켰지.”

1,000곳.

녀석의 먹잇감이 되어 멸망한 공간들의 숫자였다.

“다른 공간에서는 나름 훌륭한 상대들이 있었다. 물론 너희보다 가치 있는 존재들도 존재했지.”

“우리는 미달이라는 거야?”

“이곳은 쓸 만한 무기조차 생산하지 못하는 곳이다. 생명체라는 인간들은 제대로 된 능력 하나조차 없다.”

패러사이트는 우리의 문명에 대해 지적했다.

인간의 기술력은 어디까지나 우리 세계에만 적용되는 수준이었고, 다른 공간에서 사용하는 무기나 카드는 전혀 생산할 수 없었다.

“미개한 곳이지.”

패러사이트는 이곳의 가치가 없다고 단언했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빨리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다.”

“누구 맘대로?”

유진하는 한마디를 토해냈다.

그동안 듣고 있느라 속에 쌓았던 분노를 마침내 터트렸다.

“너희는 기생하지 못하면 아무 힘도 없는 존재야. 생명체로서 생산력이 전혀 없어.”

“…….”

“너희가 최악이야. 말 그대로 기생충이지.”

유진하는 양손에 100장의 카드를 전부 꺼냈다.

상대는 우리 공간으로 넘어온 최초의 패러사이트였다.

이 자가 있는 한 기생체는 계속 태어나고 번식할 수밖에 없다.

“발버둥치고 싶으면 쳐라.”

패러사이트 C.

유진하.

기생의 나무 정상에서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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