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섬멸전(2)
서울은 많은 것이 바뀌어 갔다.
도시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패러사이트가 지배하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되었나.”
요원 M은 선글라스를 낀 채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 보이는 서울은 예전의 대도시다운 위용마저 사라졌다.
곳곳에 기생충 나무의 뿌리가 뻗어나갔고 도시는 폐허가 되어갔다.
“저 나무가 지키고 있는 거지?”
여성 요원 J가 붉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나타났다.
정장을 입은 요원들도 현장에 모이고 있었다.
“전원 집결 명령이야.”
“나도 들었어.”
요원들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었으나, 최악의 상황에서 전원 집결 명령이 발동한다.
마스터만이 내릴 수 있는 특별 권한이었다.
사상 최초의 집결 명령이었다.
“마스터도 온 건가? 집결 명령을 내렸다면 현장에 왔을 거 같은데…….”
M이 주변을 살펴봤다.
평소에 일반 요원들은 마스터를 만날 기회가 없었기에, 사실 이번이 최초로 만날 기회였다.
“모르는 거지, 뭐.”
J도 신경은 쓰였으나 마스터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현장이 신경 쓰였다.
“…완전히 지옥 같아.”
도시에 꿈틀거리는 뿌리들은 촉수처럼 징그럽게 움직였다.
사방에서 조여드는 위압감과 죽음의 공포가 가득한 이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을 터였다.
저 중에 그들도 있을까.
“유진하, 에어리스, 이소민…….”
연락이 되지 않았다.
통신 시설이 파괴된 탓에 도시와는 모든 연락이 끊겼다.
“어려운 문제가 되었어.”
탄식하듯이 M이 중얼거렸다.
“젠장. 요원들로 승부가 될지는 모르겠군.”
때마침 하늘에서 굉음이 들렸다.
초음속 전투기 편대가 날아가고 있었다.
“군대?”
바람결이 몰아치는 속에서 J는 자신의 붉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돈하면서 위를 바라봤다.
최신예 전투기가 활공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전차도 왔어.”
대규모 기갑 부대도 나타났다.
하늘과 지상 양쪽에서 사상 최대의 협공 작전이 펼쳐졌다.
모든 적의 섬멸이 목표였다.
슈우욱!
전투기 편대는 일제히 도시의 중심부로 향했다.
전투는 적의 중요 지점부터 타격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모든 뿌리가 연결된 중앙이 첫 목표가 되었다.
기생의 나무는 100층이 넘는 최대의 고층 빌딩에 뿌리가 뭉쳐 있었다.
여기가 패러사이트 C와 D가 있는 곳이었다.
“목표물 확인.”
명령을 받은 전투기 조종사들은 일제히 지시받은 목표물을 조준했다.
날아오는 전투기를 보면서 선수를 친 쪽은 패러사이트였다.
촤아악!
사방에서 솟구친 뿌리들로 인해 전투기들은 전진을 방해받았다.
회피 기동.
최고로 숙련된 파일럿답게 곧바로 방향을 틀어 뿌리가 움직이는 공격을 피하는 비행술을 선보였다.
소수의 전투기들이 뿌리에 부딪쳐 추락했으나 대부분은 생존했다.
“바로 발사하겠다. 어?”
그때, 파일럿은 눈앞에 나타난 장애물을 확인했다.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전투기에 사람이 올라타고 있었다.
“사람이 있다?!”
세차게 휘날리는 검은 생머리를 가진 여자가 매서운 눈매로 노려봤다.
초점을 잃은 눈빛이었는데 손에는 기다란 태도(太刀)를 들었다.
간부 요원 D였다.
“하압!”
D는 대검을 한 차례 휘둘러서 전투기를 베어버렸다.
일섬.
한 차례의 일격이 파동으로 뻗어나가서 근처에 있던 전투기도 동시에 3대가 파괴됐다.
콰과광!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무의 뿌리가 높이 치솟은 것은 전투기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패러사이트의 숙주가 된 D가 직접 전투기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말도 안 돼. 사람이라니.”
초음속의 전투기가 뿌리를 피하려고 속도를 낮춰 회피 기동하는 틈에 D가 올라왔다.
파일럿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남은 기체는 21기…….”
하늘로 치솟은 뿌리들 위에는 패러사이트 C도 있었다.
그도 금발 머리를 휘날리면서 전투기에 올라탔다.
“뭐지?!”
전투기 조종사들은 믿을 수 없는 괴물들과 대결하고 있었다.
패러사이트에 지배당하는 요원들은 괴수와도 같았다.
콰악!
흑도가 움직이면서 전투기는 반으로 갈라졌다.
패러사이트 C와 D는 사방에 솟구친 뿌리들을 밟아가며 자유롭게 이동했다.
그들이 움직이면서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전투기는 모조리 떨어졌다.
콰과광!
“이렇게 당할 수 없어!”
남은 전투기 조종사들은 필사적으로 목표물을 조준했다.
가진 미사일을 전부 발사했다.
콰과광!
하지만 미사일 대부분은 뿌리에 막혔고, 심지어 적중한 한두 발은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작전 실패였다.
“아!”
마지막 남은 전투기 하나에 패러사이트 C와 D가 동시에 올라왔다.
“끝이다.”
흑도와 태도가 동시에 움직였다.
전투기는 3등분이 되어 완전히 파괴됐다.
지상에서도 상황은 같았다.
뿌리들이 난동을 부리며 움직이는 바람에 전차들은 지진에 휩싸이듯이 전열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전멸이었다.
“완전 실패군.”
멀리서 지켜보던 M은 안타까운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
군부대는 완전히 패배했다.
사실 요원들도 결과를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문명은 다른 공간에서 제대로 작동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요원들이 어떻게든 승부하는 수밖에 없겠어.”
다른 공간의 던전에서 구한 무기와 카드, 방어구만이 저들을 상대할 유일한 힘이었다.
“엄청난 괴물들이 상대로군. C와 D가 확실한데 실력은 훨씬 더 강해졌어.”
분석력이 뛰어난 M은 아까 전투기를 전멸시킨 그들의 실력을 똑똑히 봤다.
저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실력을 선보였다.
“괴물도 이런 괴물이 없군.”
옆에서 같이 지켜보던 J도 말문이 막혔다.
패러사이트 D는 J의 친언니였다.
어릴 적부터 경쟁했던 자매였기에 그만큼 서로의 실력도 잘 알았다.
지금은 그때와 차원이 달랐다.
“언니의 실력이 아니야.”
간부로서 뛰어나긴 하나 그래도 인간이라는 범주에서였다.
지금은 인간을 넘어선 실력이었다.
“패러사이트…….”
마스터는 요원들의 전원 집결 명령을 내리면서 브리핑을 간단하게 전달했다.
-기생하는 존재.
생명체에 기생해서 모든 에너지 자원을 사용한다.
숙주야 쓰고 버리면 되니까 에너지 사용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
덕분에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쭉정이처럼 에너지를 쪽쪽 빨아먹는다는 거군.”
M은 메모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라고 J가 투덜거리자 그제야 수첩을 도로 집어넣었다.
“모두를 구해내러 가야겠지. 언니도 있으니까.”
서두르는 J에 비해 M은 침착했다.
“그건 안다. 하지만 전력 분석도 중요해.”
M은 다시 수첩을 꺼내더니 작전 계획을 재점검했다.
“일단 우리 요원들이 주축이다. 사설 업체에서 용병도 보냈지만 그들의 실력은 신뢰할 수 없어.”
“그러겠지. 몇몇 용병팀이 그나마 자기 몫이나 하는 정도겠고.”
예전에 공략전에서 활약했던 제이슨의 용병팀이 쓸 만한 편이었다.
나머지 프리랜서 중에 최정상 실력자 몇몇 빼고는 대부분은 이런 대규모 전투에서의 실전 능력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간부 요원이 부족해. 그게 우리 쪽에서 최대의 불안 요소지.”
마스터가 이끄는 간부는 전체 7명이었다.
코드명 A부터 G까지.
현재는 남은 인원이 거의 없었다.
“A는 요원들을 배신하고 알카트로스의 에이스가 되었다. 녀석은 B를 죽였지.”
J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안타까운 감정이 드러났다.
최고의 요원 A와 B가 동시에 사라지고 말았다는 아쉬움이었다.
“C와 D는 패러사이트에게 지배당한 상태이고…….”
두 사람은 적이 되었다.
기생충에게 지배당한 숙주의 운명에 놓여 있었다.
“E는 조커였다…….”
녀석은 이중 첩자였다.
간부 요원 E이자 알카트로스의 조커였다.
현재는 지명 수배된 상태였다.
“F는 행방불명이고, 그나마 G가 살아 있다.”
육체파 덩치에 해머를 무기로 사용하는 G가 이번 집결전에서 유일한 간부였다.
7명의 간부 중에 단 한 명만이 참가하는 작전이었다.
전력은 압도적으로 부실했다.
“일단 부딪쳐 봐야지.”
J는 카드와 한손검을 챙겼다.
승산이 낮을지라도 작전은 반드시 결행해야 했다.
앙다문 입술에서 의지를 다졌다.
‘포기하지 않아.’
요원이라는 자존심은 물론 언니 D의 목숨이 걸린 싸움이었다.
떨리는 긴장감을 억누르며 모두의 목숨이 달린 작전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M도 검을 꺼내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간부들이 거의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다. 작은 승산에 걸어봐야지.”
M은 나름의 복안이 있었다.
“작전의 승률을 올릴 방법은 있다. 도시에서 유진하와 에어리스를 먼저 찾아내는 거야.”
“두 사람을?”
J는 놀랐다가 이내 수긍했다.
둘의 실력은 간부 이상의 최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전력이었다.
“유진하의 집 근처가 첫 목표로 좋겠지.”
M과 J는 첫 번째 목표로 유진하와 에어리스를 찾아내는 수색을 선택했다.
반드시 두 사람과 만나야 했다.
“이번 전투에서 이기기 위한 필수 요소다.”
M은 두 사람이 핵심 요소라고 단언했다.
그들을 찾아내느냐가 작전의 성패를 가르리라고 확신했다.
* * *
우둑. 우두둑.
기생충 나무의 뿌리는 무한정의 흐름처럼 도시 곳곳을 계속 뻗어나갔다.
무너진 건물 사이와 골목을 넘어갔다.
어디에서도 저 촉수가 움직이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정말 최악이 되었군.”
M은 조용히 사방을 둘러봤다.
군부대 전면전이 실패한 이상, 소수 정예로 잠입해서 승부를 보는 작전만이 남았다.
“기생충의 나무까지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어.”
마스터는 최종 목표를 패러사이트 제거와 기생충 나무의 제거라고 명시했다.
-저 나무가 부화하면 패러사이트들이 번식한다. 그럼 인간들은 전멸이다.
간결하지만 두려운 시나리오였다.
멸망과 생존이 걸린 전투였다.
저 멀리 100층 빌딩에 자리 잡은 기생충의 나무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붉은빛의 기운을 감싼 저 나무가 서서히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유충의 알이 부화를 앞두고 꿈틀거렸다.
“부화는 막아야 해. 하지만…….”
저곳까지 가려면 무수한 뿌리와 감시자 C와 D를 피해야 했다.
이번 작전에서 소수 정예로 잠입을 시도한 이유였다.
“다른 팀들은 중앙부로 갈 거야. 우리는 유진하와 에어리스부터 찾는다.”
M과 J는 서두르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폭발하는 현장에서 천천히 유진하의 숙소로 향했다.
“혹시 이 사람 봤어요?”
가는 길에 만난 생존자에게 수소문했다.
물론 안전한 방향을 가르쳐 줘서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줬다.
생존자들이 많았으나 구조팀에게 뒤를 맡기고 둘은 작전에 집중했다.
목숨을 건 사람들, 희생을 각오한 사람들이 작전을 맡고 있었다.
모두가 대단한 희생정신과 정신력을 지녔다.
“여기다.”
M과 J는 최초의 공격이 있던 자리에 도착했다.
뿌리가 처음으로 생겨난 곳이었다.
반경 100미터에 충격파가 퍼져나간 첫 지점이었다.
“아마 유진하 일행은 이곳에 있었을 거야.”
전투의 흔적이었다.
유진하 일행이 먼저 패러사이트와 대결했던 자리로 추측했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유진하와 에어리스가 이곳에 있을 거야.”
J는 부서진 잔해를 바라봤다.
추측은 맞았으나 한 가지를 간과했다.
“너희들 요원이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J는 순간적으로 이 냉랭한 음성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평생 들었던 그 육성이었다.
“언니……?”
D가 무너진 잔해 너머에 있었다.
패러사이트의 숙주가 된 그녀는 기다란 태도를 든 채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런!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나?”
M은 낭패를 당한 지금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이곳은 유진하와 패러사이트가 ‘같이’ 있던 장소였다.
당연히 적도 있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걸 놓치고 말았다.
“기억이 난다. 이 숙주의 동생이라는 J이네.”
패러사이트 D는 숙주의 기억 속에서 동생이라는 존재를 떠올렸다.
물론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었다.
언니와 동생. 형과 동생.
가족이란 개념은 기생충의 세계에서 없었다.
패러사이트의 번식은 생명체가 지닌 욕구였고 그게 후손이라는 개념의 전부였다.
“방해하러 온 자…….”
동생이란 개념은 패러사이트에게 없었다.
그저 적이었다.
“온다!”
M과 J는 검과 카드를 꺼내어 상대를 맞이했다.
먼저 유진하를 찾을 계획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전투를 감수해야 했다.
J는 기생충의 숙주가 된 친언니를 바라봤다.
“언니가……?”
평생을 살아오며 항상 경쟁했으나 그래도 자매였다.
패러사이트에 기생당한 언니는 겉으로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무심한 얼굴과 차가운 기운.
의지를 잃은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니 괴로웠다.
“언니!”
그 순간.
D가 검을 뽑으면서 내리찍었다.
쿠웅!
검에서 발휘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밑에 있던 M은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검을 거대화시켜서 방어벽으로 사용했다.
순식간에 5층 건물 크기로 커진 대검이 D의 검격을 막아냈다.
“J, 뭐 하나?”
혼란에 빠졌던 J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M처럼 자신의 검도 거대화시켰다.
빙룡과 싸울 때처럼 오랜만에 두 사람은 거대화된 검을 동시에 사용했다.
D의 검격에 맞섰다.
일섬.
D는 빠르게 다시 검을 검집에 넣었다.
이어서 단 한 번의 베기를 다시 시전했다.
매서운 속도의 검이 번개처럼 발동했고, 재차 위력이 터지자 하얀빛이 내려치는 듯했다.
그 빛은 부서진 잔해들마저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이건!”
거대화된 두 검이 깔끔하게 베어졌다.
전투기를 갈라버리는 일섬의 파괴력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M과 J는 실력 차이를 체감하며 패배에 몰렸다.
상대는 터무니없이 강했다.
지잉.
그때였다.
D가 휘두르는 일격 속에서 새로운 힘이 등장했다.
절망 직전에서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던 J는 희망처럼 다가오는 빛을 무의식적으로 바라봤다.
“햇빛?”
이제는 밤이 걷히고 어느덧 새벽이 되었다.
그런데 단순한 빛은 아니었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존재가 햇빛의 너머에서 나타났다.
대검을 든 여자였다.
“너는?”
새하얀 빛이 쏟아지는 아침 햇살.
기적처럼 나타난 여검사가 대검을 휘둘러 D의 일섬을 받아내는 데 힘을 보탰다.
“간신히 안 늦었네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M과 J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땅을 진동하는 충격파가 사라진 후에야 그녀는 차분히 고개를 들었다.
“제가 막아내겠어요.”
쏟아지는 빛 속에서 에어리스는 환한 미소와 함께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