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섬멸전(1)
기생충의 나무가 사방을 뒤덮었다.
붕괴된 건물과 치솟는 불길.
도시는 혼란의 시대처럼 질서를 잃었고 차츰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진하, 어떻게 할까요?”
대검을 든 에어리스가 소리쳤다.
빌딩 옥상은 뿌리가 둘러싸고 있었다.
나무의 뿌리가 꿈틀거리는 동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유진하는 에어리스와 함께 패러사이트 C와 D에 맞서고 있었다.
“…승부를 걸어야지.”
상대는 패러사이트 기생충이었다.
태도의 검을 든 D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무표정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에어리스는 알카트로스 소탕전에서 함께했던 D를 향해 검을 겨누게 되었다.
“D…….”
두 사람은 체육관에서 함께 연습하던 사이였다.
이제는 예전의 D가 아니었다.
패러사이트에게 정신과 육체를 지배당한 인형 신세였다.
파앗!
D가 달려들었다.
에어리스는 자신의 코앞까지 도달한 D의 돌격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앗!”
D가 휘두른 베기를 에어리스가 가까스로 피했다.
얼굴에 살짝 상처가 생겼고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에어리스는 비틀거리면서도 대검을 휘둘렀다.
“아!”
최선을 다한 반격이었는데 D가 선수를 쳤다.
에어리스가 느끼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위로 날아올라 아래를 베어버렸다.
“아악!”
D는 에어리스의 어깨를 베었다.
부상을 당한 에어리스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D의 연계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공중에 떠오른 상태에서 단숨에 태도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일섬.
밑에 있는 에어리스를 향해 강렬한 일격을 날렸다.
건물은 하늘부터 땅 끝까지 반으로 갈라졌다.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아!”
흩어지는 파편과 먼지 속에서 에어리스는 눈을 깜빡거렸다.
D의 일섬을 정통으로 맞았으면 치명상을 입을 터였는데 다행히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하아, 늦지 않았네.”
에어리스의 앞에 든든한 갑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짧은 단발머리에 항상 밝은 미소를 머금은 이소민이었다.
“이소민 언니!”
“다행이야. 장비빨 덕분에 몸빵이 될 줄은 몰랐거든.”
이소민은 암시장에서 얻은 방어구를 입었다.
물리 대미지 면역 방어구였다.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의 말은 나중에 들어야겠어.”
이소민 앞에 선 D는 온몸에 강한 오오라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 강한 기운이 흘러가는 동력은 심장과 뇌로 향했다.
에어리스의 눈에는 그 패러사이트가 지배하는 흐름이 분명히 보였다.
“머리와 뇌에 연결된 에너지가 이어지고 있어요.”
패러사이트는 숙주의 뇌와 심장을 지배한다.
에너지를 쪽쪽 빨아먹으면서 최후에는 숙주의 모든 걸 먹어 치워서 껍데기로 만든다.
그 후에는 쓰레기처럼 버리고 다른 숙주를 잡아먹는다.
구하려면 빨리 패러사이트를 제거해야 한다.
“우리가 막아야 해요.”
에어리스는 대검을 다시 잡았다.
툭툭 갑옷 상태를 두드려서 확인한 이소민은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앞으로 나섰다.
“에어리스, 내가 막아내는 동안 빈틈을 노려.”
“…최선을 다해 볼게요.”
두 사람은 패러사이트를 어떻게든 막겠다고 일념을 불태웠으나 상대는 막강했다.
패러사이트 D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 파괴력을 가졌다.
점점 커지는 기생충의 나무 아래에서 패러사이트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
D는 검을 검집에 다시 넣고 오오라를 모으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운이 D의 온몸을 넘어 퍼져나갔고 강렬한 기세가 발휘됐다.
스산한 기세가 뿜어지자 에어리스와 이소민은 위압감에 눌렸다.
“이소민 언니, 조금만 버텨요!”
긴장감을 느낀 에어리스는 대검을 움켜쥐고 정면을 응시했다.
속성 부여 건틀릿.
충전식 넥클리스 목걸이.
장비의 힘을 전부 모은 에어리스는 기력을 발휘했다.
최선을 다해 기운을 발산했으나 사방을 뒤덮은 D의 오오라에 비해 반딧불 수준에 불과했다.
일섬 최대치.
D는 폭발력과 함께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릴 듯이 베어버렸다.
검 하나의 일격만으로 전부 밀어버렸다.
태도(太刀)의 일섬.
하나의 검이 도시를 가로질렀다.
지잉.
마치 검이 우는 듯한 소리가 계속 허공에 맴돌았다.
패러사이트 D는 부르르 떨리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마치 도시에 긴 자국이 생겨난 듯이 막강한 파동이 지나갔고, 땅바닥에 큰 흉터처럼 깊은 자국이 남았다.
“아아아악!”
이소민은 용감하게 상대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았으나 충격파까지 막지는 못했다.
충격파는 물리 대미지가 아닌 탓이었다.
“위험해요!”
에어리스가 가진 모든 힘을 털어서 충격파에 맞섰으나 상대가 되지 않는 위력이었다.
이소민이 힘에 밀려나 버렸고, 에어리스마저 파동에 휩싸여 저 멀리 튕겨 나갔다.
“이제부터 지배하는 거야.”
패러사이트는 숙주 D의 입을 통해 중얼거렸다.
“다음 단계로 가야겠어.”
그들은 새로운 길을 기약했다.
기생과 번식.
그다음 최종 단계는 딱 하나였다.
멸망을 의미했다.
* * *
나비 효과.
단 하나의 작은 나비가 흔든 날갯짓이 훗날 폭풍처럼 되듯이.
패러사이트 한 마리는 나비 효과를 일으켜서 세상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유진하는 최초의 패러사이트와 마주했다.
기생충의 숙주가 된 C가 눈앞에 있었다.
“그만!”
유진하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닿지 않았는지 C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패러사이트는 생명체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들은 누군가를 지배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숙주를 지배할 수 없다면 녀석들은 존재할 수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두뇌를 잡아야 해.”
최초의 패러사이트.
C를 숙주로 삼은 존재였다.
기생충 뿌리가 온 사방에서 솟아났고 C는 그중 하나를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
‘잡아야 한다.’
유진하는 보유한 카드로 맞서겠다고 결심했다.
“화염.”
마술사처럼 수십 장의 카드를 촤라락 보내어 불길을 일제히 쏟아냈다.
엄청난 화력이 쏟아졌으나 C의 대응은 예상치 못한 수준이었다.
C는 손가락 하나만으로 전광석화처럼 움직여서 모든 카드를 차례차례 찔렀다.
손가락에 의해 구멍이 난 카드가 차례차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귀찮은 벌레에 불과하지.”
무수히 쏟아지는 카드와 함께 패러사이트 C가 옥상으로 내려왔다.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승산이 있다고 보나?”
해보는 수밖에.
유진하는 속으로 다짐했다.
식은땀이 흘러내려 간담이 서늘했다.
불길한 오오라를 내뿜는 C를 보면서 유진하는 자신을 믿기로 했다.
“6G.”
중력 카드.
6배의 중력을 발휘해서 녀석을 붙잡을 작정이었다.
‘지구에서는 어떤 생명체도 중력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어.’
자연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다른 차원의 존재에게도 그런 법칙이 해당할까.
우리가 아는 법칙이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아!”
유진하는 눈앞에 벌어진 현상에 주목했다.
6배의 중력을 받은 패러사이트 C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외로운 학처럼 고고하게 서서 이쪽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 눈빛에는 아주 작은 물음이 담겨 있었다.
‘왜 쓸데없는 짓을 하지?’
휘날리는 금발과 차가운 눈매.
마치 개미와 코끼리의 싸움처럼 무의미한 저항을 왜 하느냐는 듯한 뉘앙스였다.
녀석은 인간이 안중에도 없었다.
“아직이다. 끝난 싸움이 아니야.”
유진하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남은 번개의 카드를 전부 보내어 쏟아지는 낙뢰의 힘으로 상대하려고 했다.
쿠웅.
패러사이트 C는 발 구름을 했다.
한 번의 발 디딤이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을 발휘했다.
맨몸에서 발휘한 충격파만으로 옥상부터 균열이 시작되어 빌딩 전체로 퍼져갔다.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반경 100미터에 충격파가 일제히 퍼져나가서 건물을 일제히 붕괴시켰다.
“아!”
건물이 무너지면서 잔해와 파편이 쏟아졌다.
유진하는 바람의 카드를 사용했다.
철근 콘크리트 자재에 휘말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바람의 힘으로 날아다니며 회피했다.
그때, 유진하는 시선 너머에서 패러사이트 C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패러사이트는 인간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생할 숙주는 먹잇감에 불과했기에.
‘완전히 얕보고 있어.’
쏟아지는 잔해를 전부 피할 수는 없었다.
파편 조각을 무수히 맞던 유진하는 조금씩 정신을 잃어갔다.
‘…끝이다.’
바닥까지 무너지는 건물.
그 잔해에 파묻혀 가면서 유진하는 몸이 망가지는 충격을 받아갔다.
피할 수 없었다.
쿠구궁.
육중한 소리가 한동안 메아리처럼 이어졌다.
무수한 건물의 붕괴.
곳곳에서 폭발음과 잔해가 부서지는 소리가 뒤섞여 마치 장송곡처럼 울려 퍼졌다.
장엄한 죽음의 합주와도 같았다.
도시는 죽어가고 있었다.
* * *
“흐아, 살았다.”
건물 파편 더미에서 가장 먼저 무사히 빠져나온 사람은 이소민이었다.
“이 갑옷 덕분이야.”
물리 대미지 면역 방어구 덕분에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다.
거기다 같이 있던 에어리스 앞을 막고 몸빵으로 대신 받아줬다.
온몸을 내던진 희생이었다.
“에어리스는……?”
분명 같이 있었는데 에어리스의 행방이 보이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에어리스는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혹시…….”
다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던 이소민은 무너진 건물 쪽을 둘러봤다.
저 멀리 자욱한 먼지로 뒤덮인 지평선 너머를 쳐다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유진하한테 간 거지?”
반경 100미터.
무너진 잔해에는 자욱한 먼지만 가득했다.
“진하!”
에어리스는 잔해더미에서 크게 소리쳤다.
호흡할 때마다 짙은 먼지가 계속 입가에 들어왔다.
“에취.”
쿨럭거리면서도 에어리스는 미친 듯이 파편 더미를 찾아다녔다.
“진하, 대답해요.”
몇 미터를 갔을까.
고통을 토해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구해드릴게요.”
에어리스는 무거운 잔해를 맨손으로 가볍게 들어서 치웠다.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힌 사람들을 구조했다.
“혹시 유진하라고. 못 보셨나요?”
생존자를 구해낼 때마다 물어봤지만 아무도 행방을 알지 못했다.
수많은 잔해 속에서 점점 새벽녘 빛이 밝아오던 무렵이었다.
“…진하?”
희미하게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하!”
에어리스가 미친 듯이 달려갈 즈음이었다.
모든 파편이 차례대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둥둥 떠오른 잔해 속에 한 사람이 있었다.
유진하는 혼자 있었다.
중력 카드를 손에 들고 있었다.
헝클어지고 먼지가 잔뜩 묻은 상태인데도 유진하의 눈빛은 새롭게 빛나고 있었다.
“진하……?”
무너진 건물 파편에서 에어리스는 유진하와 마주쳤다.
떠오르는 새벽녘의 해가 지평선 너머에서 비쳤다.
“에어리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밤이 지나가고 새로운 아침이 시작될 즈음.
전쟁터처럼 처참한 잔해 속에서 두 사람은 쓸쓸하면서 슬픈 눈빛을 교환했다.
“땅에 떨어질 적에 기절했던 거 같아. 이제는 괜찮아.”
“정말 다행이에요.”
에어리스의 눈동자는 기쁨과 안도의 감정을 담았다.
그때, 유진하는 머리에서 살짝 피를 흘렸다.
“진하, 피가 나와요!”
“그래?”
“다치면 안 된다고요.”
에어리스는 헐레벌떡 주변의 헝겊을 찾아와서 유진하의 이마를 닦아줬다.
허둥지둥 서두르며 얼굴까지 깔끔하게 다독였다.
“계속 안 좋으면 안 되는데……. 진하는 괜찮은 거죠?”
“처음부터 괜찮았어.”
어느새 바람이 불어와 먼지가 걷혔고, 흐려진 하늘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에어리스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유진하 역시 환하게 웃었다.
“유진하, 에어리스!”
그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너진 잔해를 넘어 달려온 이소민이었다.
“아, 둘을 내가 방해한 건가?”
“아니에요.”
유진하와 에어리스가 동시에 소리쳤다가 문득 서로를 마주보더니 웃었다.
전장의 폐허 속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세 사람은 다시 모였다.
“꽤 긴 싸움이겠네.”
이소민은 도시를 바라보다가 짧은 감상을 남겼다.
기생충의 나무는 수백 개로 늘어났고 외부와 도시를 완전히 차단시키려는 듯이 막대하게 뻗어나갔다.
이곳에 남은 사람들끼리 내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어려운 싸움이 될 거 같아.”
“진하……?”
유진하는 한마디를 토로했다.
에어리스는 깜짝 놀라서 유진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타개책을 찾아내던 평소와 지금은 사뭇 달랐다.
“다른 방법…….”
유진하는 중얼거렸다.
망망대해의 바다에서 조각배 하나에 겨우 몸 하나 실은 듯했다.
이대로 표류하느냐. 길을 찾느냐.
어디로 가야 제대로 된 길인지 알 수 없었다.
“찾아내겠어.”
세상에는 길잡이가 있었다.
밤하늘의 별자리는 길 잃은 여행가에게 길을 알려주는 지도였다.
“거의 보이지 않아.”
하늘을 바라보던 유진하가 걸음을 묵묵히 옮겼다.
새벽녘이라 별도 사라진 즈음.
유진하는 새로운 계획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잔해와 파편 속에서 별자리가 그려지듯이 푸른빛이 길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유진하는 발자국을 옮겼다.
“해보겠어.”
패러사이트에게 대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