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새로운 제의
그날 밤.
알카트로스 소탕전은 종료됐다.
사무실로 돌아온 M은 혼자 책상에서 업무에 들어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오늘 작전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작전 입안은 유진하…….”
모든 전략 계획을 순서대로 적어 내려갔다.
알카트로스와 벌어졌던 대결도 하나하나 정리했다.
“과감하고 대범한 작전이었다.”
M은 혼잣말하듯이 입으로 읊으며 보고서를 적었다.
“팀원 구성부터 야간 기습까지 이어져 리더 에이스까지 체포했다.”
최고층 빌딩에서 벌어진 결전.
유진하는 알카트로스를 모든 면에서 압도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다만…….”
M은 마지막 단락을 작성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1분이 지나도록 잠시 생각한 후에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전원 체포는 아니었다. 조커와 하트는 놓치고 말았다.”
조커는 이중간첩이었다.
정부 요원 E와 알카트로스의 조커를 동시에 맡았다.
“녀석이 조커였다니…….”
동료이자 상관이었던 그에 대해 생각을 하자 M은 보고서 작성을 잠시 중단하고 커피 한 잔을 탔다.
그윽한 커피 향이 콧잔등에 따스하게 닿았다.
“그 녀석…….”
은테 안경을 끼며 매번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반듯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런 그가 사실은 알카트로스의 조커였다니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후우.”
M은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에 한숨을 내쉬었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중간첩 조커와 그의 조력자 하트의 행방은 현재 알 수 없다.”
알카트로스 소탕전은 성공적이었으나 미완의 대기였다.
그 둘을 추격하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았으나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오리라 여겼다.
“…반드시 나타나겠지.”
보고서를 완성한 M은 피곤한지 기지개를 켰다.
금세 식어버린 커피는 그대로 놔두었다.
“능력 분석이 남았군…….”
보고서 말미에 수정된 기록이 추가됐다.
소탕전이 끝나고 멤버들의 능력치를 새롭게 분석했다.
- 유진하 능력치
지력: SSS → U
전투력: 불명
민첩: B → A
정신력: A → S
체력: C
유진하는 전체적으로 상향된 부분이 많았다.
가장 큰 부분은 ‘지력’이었다.
유진하 혼자서 알카트로스 소탕전의 모든 전략을 구상했다.
작전은 완벽에 가까웠다.
“유진하가 처음으로 전투에서 단검을 썼는데…….”
전투력은 여전히 확실치 않았다.
리더 에이스를 혼자 힘으로 제압하긴 했으나 이번에도 두뇌전이었다.
단검은 단 한 번의 격돌만 있어서 이걸로 전투력 파악은 불가능했다.
“그 부분은 더 지켜봐야겠지.”
다음은 에어리스였다.
능력치에 역시 변동이 있었는데 큰 폭의 상승이 많았다.
- 에어리스 능력치
지력: C
전투력: SSS → U
민첩: A → S
정신력: B → S
체력: SS
에어리스는 대검술의 달인 스페이드에 맞서 치열한 혈전 끝에 승리했다.
일취월장한 실력이 능력치에 반영됐다.
“성장세가 대단하군. 앞으로도 기대된다.”
마지막은 이소민이었다.
장비로 무장한 새로운 전투법을 익힌 덕분에 많은 발전을 이뤄냈다.
살인마 잭을 쓰러뜨리면서 실전에서의 효용성까지 입증했다.
- 이소민 능력치 (장비 착용 시)
지력: B
전투력: B → SS
민첩: C → S
정신력: SS → SSS
체력: B → C
암시장에서 얻은 물리 면역 방어구가 핵심 장비였다.
물리 대미지를 전부 막아내는 굉장한 능력이 있었다.
살인마 잭을 이기면서 얻은 쾌속의 사바톤 부츠도 순발력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한손검까지 얻었으나 공격력에는 아직 의구심이 있었다.
다만, 방어와 순발력에서 구색은 확실하게 갖춰졌다.
“그런데 무거운 중장비를 계속 입어야 한다는 점이 이소민에게 무리가 되겠지.”
갑옷은 통풍이 안 되어서 땀이 계속 찬다.
강철보다 단단한 소재로 만들어진 덕분에 무게도 상당했다.
갑옷에 신발에 검까지 들면 도합 20킬로는 가뿐히 넘는 무게였다.
쌀 한 가마니를 메고 다니는 수준이었다.
“체력에는 의문이 남지.”
이소민의 체력 부분을 하락시킨 이유였다.
“운동을 많이 시켜야겠지.”
어차피 에어리스는 매일 아침 연습을 하는 편이었다.
이소민도 강제로 같이 체력 훈련을 시키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알카트로스 소탕전이 끝난 후에도 후폭풍이 남아 있었다.
뒤처리할 일이 많이 남아서 그 부분의 보고서는 나중에 따로 올릴 작정이었다.
“유진하……. 앞으로의 일은 네가 결정할 부분이다.”
유진하와 에어리스.
두 사람에게 있어 중대한 변화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후아, 집이 아직도 없다.”
아직 공사 중인 집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소민은 고개를 떨구었다.
알카트로스의 기습 때문에 유진하의 집이 날아간 뒤로 여전히 공사는 계속되었다.
쿵쿵. 뚝딱뚝딱.
망치 소리와 자재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 와요.”
유진하는 아이스크림을 홀짝홀짝 먹었다.
에어리스와 이소민에게도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새롭게 짓는 집은 보안부터 설비까지 전부 최신식으로 갖출 예정이에요. 시간이 걸려도 기다리면 좋을 거예요.”
“그때까지는 계속 다른 숙소에 있어야겠네.”
이소민은 푸념 섞인 투덜거림을 토로했다.
호텔 투숙도 좋지만 계속 룸에 있으니 집보다 불편한 점도 있었다.
호텔에서는 집 마당에서 혼자 서성이며 자유로운 혼자만의 휴식을 즐길 수 없었다.
이소민과 달리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던 에어리스는 활짝 웃었다.
“나중에 어떤 집이 될까 정말 기대돼요.”
에어리스는 기대감이 가득한 눈망울로 집을 바라봤다.
“어떤 물건이 들어올까요? 냉장고도 그렇고 새로운 주방도 정말 궁금해요.”
최신식 주방에서 요리하는 에어리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카레에 도전했다가 성공한 이후에 에어리스는 부쩍 요리에 자신감이 늘어났다.
“진하, 다음에는 튀김 요리도 도전해 볼게요.”
“아, 그래. 천천히 하자.”
의욕이 너무 많아서 걱정도 되었지만 옆에서 잘 도와주면 어떻게든 될 거 같았다.
셋은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발길을 돌렸다.
알카트로스 소탕전이 끝나고 달콤한 휴식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뭐 할까요?”
에어리스는 버킷 리스트가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놀이동산부터 극장, 번지 점프까지 섭렵했는데 오늘은 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상쾌한 기분으로 거리에 나왔다.
“진하, 동물원에 가고 싶어요.”
다행이었다.
스카이다이빙이라도 하자고 하면 고민이 크게 될 뻔했는데.
유진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물원에 가서 먹이도 주고 같이 놀고 싶어요.”
“그건 간단하네. 가자.”
에어리스는 벌써 기대감으로 가득 차서 어깨가 들썩거렸다.
유진하와 이소민도 오랜만의 휴가 장소로 동물원이 마음에 들었는지 당장 향했다.
푸른 하늘이 유독 맑은 날이었다.
“와아, 저게 코끼리구나.”
에어리스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동물원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한시도 고개를 가만두지 않고 계속 두리번거리며 토끼처럼 총총거리며 뛰어다녔다.
시끄럽게 떠드는 앵무새.
나무를 타는 원숭이.
날개를 활짝 편 공작새까지.
수많은 동물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와, 이건 정말 크네요.”
에어리스가 가장 신기해한 동물은 기린이었다.
목이 정말 길어서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키가 컸다.
“기린아, 여기야.”
에어리스가 힘차게 손을 흔들었으나 기린은 높은 나무의 잎사귀를 씹어 먹느라 관심이 없다는 듯이 심드렁했다.
무안해진 에어리스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잎사귀가 필요하구나.”
옆을 둘러보니 저쪽 벌판에서 떨어진 잎사귀 더미를 발견했다.
에어리스는 곧바로 거기로 가서 잎사귀를 품에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기린아, 여기 밥 많아.”
이번에는 기린이 반응을 보였다.
산더미처럼 가져온 잎사귀로 다가오더니 날름날름 먹기 시작했다.
에어리스는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농장 체험 같아요.”
밝게 웃는 미소가 에어리스의 환한 얼굴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중에 몬스터도 이렇게 키우면 어떨까요?”
“아, 그건 좀…….”
순간 유진하는 당황했다.
몬스터와 동물은 다르기에 동물원처럼 괴물을 키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하. 상상력은 재밌는데 말이야.”
“엉뚱한 걸 수도 있어.”
이소민은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마시면서 여유롭게 벤치에 앉았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서 산책의 여유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이소민 누나는 놀이기구 타도 괜찮아요. 옆에 있잖아요.”
“그건 별로네.”
“왜요?”
“그야 당연하잖아.”
이소민은 미묘한 눈빛을 흘리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가면 너랑 에어리스 둘만 남잖아. 데이트 기회를 쉽게 줄 거 같아?”
“아니, 그런 거 아닌데요.”
“아니긴 개뿔…….”
이소민은 킥킥거리며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 듯 모를 듯 미묘한 뉘앙스의 미소를 짓더니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알았어. 방해꾼은 사라져 줄 테니까 잘 놀라고.”
“하하…….”
커피를 든 이소민은 다른 산책로 방향으로 향했다.
어색해진 유진하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남았다.
“진하, 같이 기린 먹이를 줄래요?”
아까 가져온 잎사귀는 여전히 한 아름 뒷동산처럼 가득했다.
기린은 어느새 무리를 이루며 몰려들었고 에어리스 혼자 모든 먹이를 주기에 무리였다.
“저게 뭐냐.”
엉겁결에 유진하도 기린 먹이 주는 일에 동참했다.
잎사귀를 주다가 기린의 혓바닥이 손에 닿기도 했다.
끈적끈적.
워낙 기린이 많아서 먹이를 다 준 후에는 온몸에 잎사귀가 이리저리 붙었고, 손에는 기린의 침이 묻어 질척거렸다.
“정말 기린이 많구나.”
“진하가 도와준 덕분에 금방 친해졌어요.”
에어리스는 온몸에 땀을 흘리면서도 보람차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동물들과도 금세 친해지고 평온한 그 모습이 굉장히 밝아 보였다.
에어리스의 천진난만한 그 모습이 언제나 좋았다.
“오늘 즐겁게 보내서 다행이야.”
“정말 재밌었어요.”
지금은 양 무리가 있는 곳에 왔다.
음매.
귀여운 아기 염소의 울음소리에 에어리스의 얼굴은 저절로 엄마 미소가 되었다.
품에 안아서 귀엽게 바라봤다.
“에어리스…….”
유진하는 행복해하는 에어리스를 바라보면서 미소 짓다가 갑자기 차분한 표정이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한마디 말을 꺼냈다.
그 물음은 마치 작은 돌멩이가 호수에 던지듯이 작은 파장을 이루며 퍼져나갔다.
“에어리스를 닮은 그녀는 찾아내지 못했잖아.”
“진하…….”
아기 염소를 쓰다듬던 에어리스의 손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생각이 길어졌는지 손짓은 무의미하게 움직였다.
“알카트로스의 리더가 그녀에게 대해서 알려줬어.”
소탕전에서 사로잡힌 알카트로스의 멤버들은 전원 구금되었다.
리더 에이스.
잭. 퀸. 킹.
스페이드. 클로버. 다이아몬드.
7명이 수감되었다.
얼마 전에 새로 지은 최고 경비 태세의 감옥인데 위치와 시설은 불명이었고 마스터가 직접 관리했다.
“리더 에이스가 알려준 정보야. 쌍둥이처럼 닮은 그녀는 처음부터 잡지 못했다고 그랬어.”
원래 그녀는 정부 요원들에게 잡혀있었다.
알카트로스가 습격해서 빼돌리려고 했으나 혼란한 틈에 쌍둥이 그녀는 차원문을 열고 사라졌다고 전했다.
“그럼 돌아간 걸까요?”
에어리스는 처연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자신과 닮은 그녀.
에어리스의 과거를 알고 있을 그녀와 결국 만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대신 기다리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그랬어. 그리고 조심하라고 했어.”
“…….”
쌍둥이 그녀와 에어리스.
완전히 닮은 존재였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의문만 남기고 떠났다.
기다리겠다는 말.
조심하라는 말.
에어리스는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찾아가야 해요.”
“그렇게 할게.”
유진하는 에어리스의 과거를 반드시 찾아주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쌍둥이 여자가 신기루처럼 사라졌어도 그녀가 간 공간을 찾고 있었다.
“마스터가 도와주기로 했어.”
다른 공간의 던전과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같았다.
마스터가 우리 공간의 주인이었다.
그는 이 세계의 주인답게 공간의 상태와 출입을 살필 수 있었다.
“차원문에는 반드시 자취가 남아.”
푸른 머리에 귀여운 외모를 가진 마스터는 이미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차원문이 열린 궤도를 역추적할 수 있다고 그랬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마스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어리스를 닮은 그녀가 어느 공간으로 갔는지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만 기다리자.”
“진하, 저는 괜찮아요.”
에어리스는 아기 염소를 끌어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항상 믿고 있으니까요.”
유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답례했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쳤다.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불어오는 풀내음 속에서 두 사람은 잠시 우두커니 있었다.
“언제나 기다릴게요.”
다음 날.
소식 하나가 찾아왔다.
마스터가 직접 숙소까지 찾아와서 유진하에게 제안을 하나 건넸다.
“뭐라고?”
“들은 대로야.”
마스터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당당하게 요구했다.
“너희들을 특별 채용 하고 싶어.”